원더풀 라이프
어두컴컴한 새벽 노인은 신사(神社) 어귀를 쓸고 있다.
히라야마는 까슬까슬한 대빗자루 소리에 맞춰 눈을 뜬다. 길게 내쉬는 호흡, 그리고 몸을 일으켜 이불을 접어 구석에 밀어놓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양치질을 하고, 콧수염을 정갈하게 다듬고, 유선 면도기로 턱수염을 밀고, 다시 이층 다다미방으로 올라간다. 분무기로 작은 화분들에 정성 들여 물을 뿌리고, 벽에 걸린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아래층 계단 턱에 가지런히 놓인 차 키와 소지품을 챙겨 들고 현관문을 연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에는 환하게 웃음이 번진다. 구석에 놓인 자동판매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 경승합차의 운전석에 앉은 채 커피를 들이켠다.
카 스테레오에 테이프를 꽂자 The Animals의 ‘The House of the Rising Sun’ 노래가 흘러나온다.
There is a house in New Orleans they call the Rising Sun
뉴올리언스에 떠오르는 태양이라는 집이 하나 있지
And it's been the ruin of many a poor boy And God I know I'm one
수많은 불쌍한 소년들이 인생을 망친 곳, 하느님 나도 그중 하나라는 걸 알아요.
히라야마는 낡은 차의 시동을 걸고 도쿄의 스카이트리를 올려다보며 서서히 골목을 빠져나와 고가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의 거리는 한산하다. 조용히 아침의 해가 떠오르고 그는 목적지에 당도한 듯 자신의 차에서 내려선다. 흘러나오던 음악이 끊기고 그는 공공화장실로 들어선다. 도쿄 번화가인 시부야의 공공화장실, 바로 그가 일하는 터전이다.
온전히 혼자만이 존재해야 하는 내밀한 공간인 화장실에서 그는 숙련된 장인의 손길로 바닥의 휴지를 주섬주섬 줍더니 변기를 닦기 시작한다. 세면대의 보이지 않는 밑부분 찌든 때를 제거하기 위해 거울까지 들이대며 꼼꼼한 그의 손놀림이 계속된다.
점심시간은 신사의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허공을 뒤덮은 나뭇가지 사이로 해가 반짝인다. 그는 오래된 필름 카메라에 그 풍경을 담는다.
코모레비木漏れ日,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빛을 의미하는 일본어로 그는 매일 그 햇살을 카메라에 담아 간직한다.
오후의 업무를 마치고 퇴근길 그는 다시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의 ‘Pale Blue Eyes’를 듣고 있다.
Sometimes I feel so happy Sometimes I feel so sad
가끔은 엄청 기쁘고 가끔은 엄청 우울해
Sometimes I feel so happy But mostly you just make me mad
가끔은 엄청 기쁘지만 대체로 네가 그냥 날 미치게 해
Baby, you just make me mad
자기야, 네가 그냥 날 미치게 해
Linger on, your pale blue eyes
네 창백한 푸른 눈에 머물러
Thought of you as my mountaintop Thought of you as my peak
널 내 목적지라 여기고 널 내 정점이라 여겼지
Thought of you as everything I've had, but couldn't keep
한때 가졌지만 내가 간직하지 못한 모든 것으로 여겼어.
유부녀에 대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갈망이 음울한 루 리드Lou Reed의 목소리를 타고 흐르다 집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리는 순간 뚝 끊긴다.
히라야마는 동네 목욕탕이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자전거를 타고 가서 탕 안에 깊숙이 몸을 밀어 넣는다. 따뜻한 수온은 경직된 근육을 눅진하게 풀어놓는다. 목욕탕을 나선 뒤 자전거를 타고 스미다강을 건너 지하상가의 선술집 실외 탁자에 앉아 보리소주로 만든 하이볼을 마신다. 얼음을 가득 채운 술 한 잔은 종일 몸을 움직이고 난 그의 몸속에 퍼지며 긴장을 이완시킨다.
집으로 돌아오면 헌책방에서 산 책을 읽다 잠자리에 든다. 감긴 눈 사이로 하루 동안 스쳐 간 잔영들과 무의식이 겹친다. 그가 애써 유지하려는 평온 사이로 문득문득 불온하게 감도는 기운들이 아른거리다 깊은 잠에 빠져든다.
다음 날 히라야마는 전날과 똑같은 아침을 맞이하고 오래된 루틴처럼 똑같이 출근을 준비한다. 카스테레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아니었다면 어제의 영상을 다시 재생하는 것으로 여겨질 법한 일상에 변주를 가져오는 것은 오티스 레딩Otis Redding이 부르는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 뿐이다.
Sittin' in the morning sun I'll be sittin' when the evening comes
아침 해를 보며 앉아 있고 저녁이 와도 앉아 있을 거야
Watching the ships roll in Then I watch them roll away again, yeah
배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또 그들이 흘러가는 것을 볼 거야
I'm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 Watching the tide roll away
밀려가는 조수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부둣가에 앉아 있어
무심(無心)하게 흘러가는 삶의 무위(無爲)는 그를 대변하는 듯하다.
그다음 날도 날씨나 약간의 에피소드들로 그의 표정에 미묘한 차이를 일으키는 정도 일 뿐 재생 반복되는 하루는 충만한 그의 삶을 보여주는 것으로 화면을 채우고 있다.
공중화장실에서 엄마를 잃고 울먹이는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의 엄마를 찾아 나서거나 점심시간 신사 앞 나무 밑에서 발견한 어린 생명을 캐내어 집으로 가져가는 일은 일상에서 그가 누리는 소소한 기쁨이다.
사장은 오전 11시경 출근을 했다.
그의 머리는 언제나처럼 헤어젤을 발라 올백으로 가지런히 넘겨져 있다. 상의와 하의를 깔맞춤한 골프웨어는 60대의 나이에 비해 군살 하나 없는 그의 체격을 돋보이게 한다.
그는 사무실로 들어가 우편물을 들고 쓰레기 처리장으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걸어가 등기나 내용증명을 꼼꼼히 훑어보고는 찢어서 폐기 처분한다. 계산대에 있던 직원을 지나치면서는 눈을 흘기는 시늉을 해 보인다. 단순하기만 한 직원은 사장의 눈초리에 움찔하더니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그는 자신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서늘한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구석구석 매장을 둘러보며 비어있는 물품을 확인한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한결같은 루트를 따라 맥주나 음료, 라면 등의 빠진 물품을 채우기 시작한다. 고객이 신라면 4개들이 멀티팩을 들고 계산대로 오면 그는 창고에서 신라면 4개들이 멀티팩을 들고 진열대로 향한다. 고객이 카스 1.6리터 페트를 계산하고 나면 그는 어김없이 카스 1.6리터를 들고 주류냉장칸으로 향해간다. 단 한 곳의 빈구석도 용납하지 못하고 시종일관 매장에 물건을 진열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까닭인 것처럼 매장의 빈 구멍을 메우느라 쉴 새 없이 움직거린다.
사진작가 안드레아 구스키Andreas Gursky의 <99센트> 실사판처럼 매장 안은 빼곡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을 위해 사장은 1년 365일 출근한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왕국에 갇혀서 절대 그곳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져 있고, 물건을 진열하는 동안에도 누군가와 끊임없이 전화 통화를 해댄다. 대금을 받지 못한 거래처, 월세를 받지 못한 임대인,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해서 안달이 난 빚쟁이들로부터 하루 종일 독촉 전화에 응대하느라 분주하다. 그의 화술은 능수능란하며 막힘이 없다. 한참 통화를 하다 보면 돈을 떼인 빚쟁이는 욕설을 시작하고 사장은 그것을 빌미 삼아 경찰을 부른다. 월세를 받지 못한 임대인은 임차인에게 정신적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가 되어 있거나 거래처의 과장은 제발 일부만이라도 물건값을 입금해 달라며 애원한다. 피해자와 피의자의 자리가 뒤바뀌어 전세가 역전되어 있는 것이다.
오후 5시가 되면 계산대 직원 하나가 정성스레 싸 나르는 반찬과 햇반을 데워 저녁을 먹는다. 사장이 고분고분하게 길들여놓은 접대원은 그와 오붓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그 시간을 마냥 즐기고 있다. 그녀의 본분인 계산대 업무는 늘 오류가 나기 마련이지만 주군에 대한 헌신만으로 모든 것은 용서가 된다.
허기를 모면한 사장은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고 직원들이 퇴근한 저녁 이후의 시간은 온전히 그들만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그들은 상한 과일을 손질해 나눠 먹으며 어두컴컴하게 조명이 꺼져가는 홀 안을 어슬렁거린다.
가끔 사장은 사무실의 말라가는 화분들에 물을 주기도 한다. 그의 보살핌을 받은 식물들은 그의 손길에 반응을 하듯 싱그러운 빛깔을 띠고 있다.
가게 문을 닫기 직전에는 아내와 분가한 아들의 가족을 위해 매장에 있는 식품들로 장을 본다. 그는 성실한 가장의 역할을 너무나 충실히 잘 해내고 있다.
익숙한 패턴으로 유지 되어오던 히라야마의 평화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직장 동료 타카시가 여자 친구와 함께 자신의 차 안으로 틈입해 오면서부터다. 타카시의 무례는 그에 멈추지 않고 바에서 알바를 하는 여자 친구와 밤을 보내기 위해 아끼던 카세트테이프를 팔아 치우자며 히라야마를 부축인다.
“돈 없으면 사랑도 못한다니 뭔놈의 세상이 이래요?”
레트로 붐을 타고 옛것에 대한 향수에 목말라하는 이들 덕분에 루 리드의 몸값은 자그마치 1만 2천 엔으로 치솟아 있다.
하지만 히라야마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테이프를 돈 몇 푼에 넘길 리가 없는 터라 자신의 지갑을 털어 타카시의 손에 쥐어 준다. 식비를 몽땅 내어줘 버린 그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만 한다.
주말이 되면 작업복을 챙겨 빨래방으로 향한다. 도중에 필름 가게에 들러 일주일 동안 찍은 코모레비 사진 현상을 맡기고 카메라에는 새 필름을 갈아 끼운다. 돌아와서는 현상된 사진을 확인하고 버려야 할 것과 간직할 것을 선별해서 벽장에 켜켜이 저장한다.
다다미방을 청소하면서도 카세트 스테레오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The tax man's taken all my dough And left me in my stately home
세무사가 내 돈을 몽땅 가져가 버리고는 저택에 날 두고 갔어
Lazin' on a sunny afternoon And I can't sail my yacht
화창한 오후 느긋한 시간을 보내면서 요트를 타고 바다로 갈 수도 없어
He's taken everything I got All I've got's this sunny afternoon
그가 내 소유를 다 가져갔어. 내가 가진 거라고는 이 따사로운 오후가 전부야.
저녁이 오면 단골 선술집으로 향한다. 여주인은 반갑게 히라야마를 맞이하고 그녀가 늘 부르던 노래 ‘해뜨는 집’의 일본 버전을 들려준다.
내가 도착한 곳은 뉴올리언스의 해뜨는 집이라는 유곽이었어.
사랑했던 남자가 돌아오지 않은 그때 나는 고향을 떠났지.
기차를 타고 또다시 기차를 타고.
가난한 나에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가끔 생각나는 것은 고향에 있는 그 어둑한 승강장이지.
그는 하이볼을 들이켜며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서글픈 노래의 곡조에 취한다.
집으로 돌아온 그가 잠자리에 들면 다시 하루를 마친 잔영의 물결들이 불온하게 아른거리고, 잠에 빠져들고, 무심히 놓인 그의 삶은 이어진다.
주말이 되면 사장은 아내와 함께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그의 아내는 장로이다. 물론 진실한 믿음만으로 그녀에게 그런 직함이 부여될 리가 없었다.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끊기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을 것이다. 사장은 아내를 매개체로 천국행 티켓을 예매해 놓았다.
그런데도 그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천국행 티켓을 끊어놓고 지옥에 사는 사람의 표정은 결핍으로 가득 차 있었다. 늘 배가 고파 죽겠다며 유령처럼 가게 안을 어슬렁거렸다. 접대원이 쉬는 날이면 허기진 뱃가죽을 부여잡고 더욱 죽는 시늉을 해댔다.
“배가 고파 죽겠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고?”
그는 째진 눈으로 번들거리는 광대를 드러낸 채 누군가에게 묻고 있었다.
어느 날 히라야마가 퇴근을 하고 돌아오자 계단에는 소녀가 앉아 삼촌을 기다리고 있다. 어릴 때와는 너무도 달라져서 알아볼 수조차 없는 조카 니코는 가출을 한 뒤 곧장 삼촌의 집으로 직행했다고 한다. 잔잔하던 자신의 일상에 끼어든 니코를 보며 히라야마는 당황스러우면서도 따사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보살핀다.
니코는 삼촌의 직장에 동행하겠다며 어깃장을 놓고 히라야마는 하는 수 없이 공공화장실로 그녀를 데려간다.
혼자이던 여느 때와 달리 니코를 태우고 향하는 차에서는 밝고 경쾌한 밴 모리슨Van Morrison의 ‘Brown Eyed Girl’이 흘러나온다.
Hey where did we go, days when the rains came?
안녕, 비오는 날 우리는 어디로 갔었지?
In the misty morning fog with our hearts a thumpin' and you
아침 안갯속에서 우리 우리 두근두근 그리고 너
My brown eyed girl
내 갈색 눈의 소녀
“이거 스포티파이에서도 들을 수 있어요?”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를 알 리 없는 히라야마는 어디에 있는 가게인지를 되묻는다. 깔깔거리는 니코의 웃음이 경쾌한 음악 사이로 흩어진다. 각자의 세계에 속해 있는 그들은 상대의 세상을 가늠할 수가 없다.
이 세상은 수많은 세계로 이루어져 있지. 서로 연결된 세상도 있고 그렇지 않은 세계도 있어.
자신이나 엄마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삼촌은 니코에게 혈연의 관계를 넘어선 존재로 여겨져 왔고 삼촌의 세계를 엿보고 싶었던 니코는 이렇듯 삼촌의 세계를 기웃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호기심 가득한 사춘기 소녀는 삼촌을 도와 서투르게나마 화장실 바닥을 닦는다.
히라야마는 니코를 데리고 점심을 먹기 위해 신사로 향한다. 삼촌과 같은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핸드폰으로 코모레비를 찍는 니코의 표정이 해맑다. 히라야마 역시 필름 카메라로 허공에 셔터를 누른다. 니코는 어릴 적 자신에게 삼촌이 준 필름 카메라를 내밀어 보인다.
각자의 세계에서 조금씩 다가서는 삼촌과 조카는 어쩌면 서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린다. 히라야마는 이 강을 달려 바다로 나가자는 니코에게 다음에 가자고 한다.
“다음이 언제인데?”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하루하루를 버텨야 하는 이들은 훗날을 기약할 수가 없다.
히라야마는 조카를 그녀의 세계로 돌려보내기 위해 오래도록 연락을 끊었던 여동생에게 전화를 건다.
운전사가 운전하고 온 승용차에서 내린 여동생은 역시 히라야마와는 다른 세상에서 날아온 듯하다.
“오빠가 공공화장실 청소를 한단 말이지?”
화장실 청소부와 부잣집 사모님으로 마주한 남매의 포옹은 서로의 간극을 메울 수가 없다. 서글퍼하는 여동생의 눈을 통해 본 피사체 히라야마는 낙오자에 불과해 보인다.
여동생과 니코가 떠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히라야마는 지금껏 애써 다잡고 있던 평정심이 흔들리는 듯 흐느끼기 시작한다.
Just a perfect day 너무나도 완벽한 날
You made me forget myself 스스로 누군지도 잊고
I thought I was someone else 마치 딴 사람이 된 기분
Someone good 더 나은 사람으로
Perfect Day, 하루에 하루의 더께를 씌우며 일상에 윤을 내는 일이란 평정심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며 애써야만 가능한 일이다.
사장은 오전에 출근하지 않았다. 그런 날은 십중팔구 법원에 들러 재판을 받기 마련이었다. 그만둔 직원들의 임금을 떼어먹거나, 임대료를 내지 않아 임대인으로부터 소송을 당하거나 체납한 거래처의 물품비 따위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일이 그에게는 일상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듯 번거로운 송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산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한 일이라도 참고 견디며 버틸 심산이었다.
오후에 가게로 돌아온 그의 표정이 밝아보였다. 그가 또 승소한 모양이었다. 임금을 떼어먹고, 임대료를 체납하고, 빚을 갚지 않아도 그는 신체에 털끝만큼의 구속조차 당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소중한 재산을 내어놓을 리는 만무했다. 지금껏 해왔듯 몇 번이고 사업자를 바꿔서 자신과 사업체가 무관하게 보일 수만 있다면 그는 영원한 무사안일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계산대를 지나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도드라진 광대 밑으로 움푹 꺼진 볼의 팔자 주름이 입꼬리를 따라 실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행복이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계산대 직원은 사장의 웃음을 따라 헤프게 깔깔거렸다.
완벽한 날이었다.
히라야마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들르던 선술집 문을 열다 전남편과 함께 있는 여사장을 보고는 착잡한 마음에 캔맥주를 들고 강가로 향한다. 그를 쫓아온 전남편은 그녀를 잘 부탁한다며 자신이 시한부 암 환자라고 밝힌다.
“그림자가 겹치면 더욱 어두워질까요?”
죽음을 앞둔 전남편은 세상의 이치에 무지한 채 떠나야 하는 자신을 한탄한다. 그들은 서로의 그림자를 겹쳐보며 그것을 확인하려 하지만 인간의 눈으로는 그림자의 음영을 가늠할 수가 없다.
“내, 돈을 받아야 월급을 줄 낀데?”
사장은 몇 달째 그 타령이었다.
경기 부진으로 장사는 적자였고, 가지고 있던 사업장 두 곳 중 한 곳을 팔아넘겼다. 처음에는 눈먼 놈이 가게를 인수한 데 대해 쾌재를 부르는 듯싶었다. 하지만 차일피일 미루기 시작한 잔금은 몇 달째 주지 않았고, 그제야 그는 자신보다 더한 놈에게 물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사업자를 계속 바꾸는 데에 대한 직원들의 불안이 가중되었고, 퇴직금에 대한 항의가 이어졌다.
“니들이 나를 노동청에 고발해라.”
자신의 주머니에서 한 푼도 꺼내지 않겠다는 심사는 결국 직원들을 통해 자신을 고발하기를 권고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자신의 주머니에는 구멍 하나 뚫리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하는 방식이었다.
사장은 늘 구멍이 나는 것을 참지 못했고, 매번 구멍을 메우는 데 급급했다.
퍼펙트 데이즈, 그는 언제나 그렇듯이 천국으로 직행할 티켓과 함께 완벽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똑같은 루틴으로 맞이하는 아침, 여느 날처럼 카스테레오에 테이프를 꽂자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이 흘러나온다.
Birds flying high You know how I feel
높이 나는 새들아 너흰 내 기분을 알지?
Sun in the sky You know how I feel
하늘에 떠 있는 태양아 넌 내 기분을 알지?
Breeze drifting on by You know how I feel
불어오는 산들바람아 넌 내 기분을 알지?
It's a new dawn It's a new day
새로운 새벽이야. 새로운 날이야
It's a new life for me And I'm feeling good
나를 위한 새로운 인생이야. 기분이 좋아.
노래를 들으며 만감이 교차하던 히라야마의 표정은 가히 압권이었다.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파노라마가 켜켜이 쌓인 잔상들을 한순간에 펼쳐 보이듯이 그의 얼굴에는 그가 거쳤던 모든 삶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무심한 듯하던 얼굴에 기쁨이 차오르더니 금세 애잔한 서글픔으로 바뀌고, 아쉬움과 함께 밀려드는 애환들이 나타나다 이내 떠오르는 아침 해에 삼켜져 버린다.
과연 우리는 완벽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감독 빔 벤더스는 <파리 텍사스> 때부터 개개인의 ‘섬’을 이야기했다. 그 장소가 텍사스 사막의 한가운데서 일본의 도쿄로 옮겨왔을 뿐 현대인들이 느끼는 감정의 고립은 그의 정서를 관통하고 있다. 단, 메마르고 거칠던 사막의 황폐함이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햇살을 간직하는 따사로움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나이 듦’에 윤기를 낸 흔적 같아서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함부로 '비움'이라는 말을 지껄인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자들이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뻥 뚫려 있는 자신의 구멍을 들여다볼 생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고개 두리번거리지 말고
너, 너 말야!
사장, 그 개자식이 천국에 갈 리는 없겠지만 스스로 행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