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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편 May 18. 2024

나와 클로버

원더풀 라이프

난 벚꽃이 좋다. 하지만 왠지 꽃이 지면 맘이 편하다.

화사한 벚꽃을 좋아하면서도 그 찬란함이 못내 불편한 다케모토는 미대생이라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오히려 희귀한 존재이다.


하마모토 교수의 집에서 친목회가 있던 날, 다케모토는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정원의 벚꽃을 거대한 캔버스에 옮기고 있는 하구미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다케모토의 곁에서 누군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처음 목격한 마야마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건축 디자인 연구소의 디자이너를 짝사랑하고, 그런 마야마 바라기를 하는 도예과 야마다, 그들의 어긋난 사랑의 짝대기가 캔버스에서 펼쳐지는 중이다.

그렇게 청춘들의 잔잔한 호수 위로 8년째 학교에 적을 둔 채 훌쩍 어딘가로 떠나버리곤 하던 천재 모리타가 돌아오며 파문을 일으킨다.      



그들과 달리 그림은 내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그것을 완성해야 한다는 무게에 짓눌려 기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내 불안을 가라앉히고 위안이 되어주는 것은 오직 글뿐이었다. 책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내게는 어떤 희열을 안겨 왔다.

오랜 방황 끝에 찾아간 사설 작문 학원은 이미 한 학기 강의가 진행되고 있었고 중간에 합류하게 된 나는 그곳에서 작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첫 단편을 제출하자 선생님은 칭찬에 덧붙여 빨간펜으로 꼼꼼히 교정을 해주셨다. 작문의 모든 것을 그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로부터 자극을 받아 더 치열한 글쓰기를 하게 되기도 했다.      


는 석유 개발 공사에 다니고 있던 경력이 말해주듯 화려한 프로필뿐만 아니라 필력 또한 출중했다. 내가 입문하기 전 제출한 단편으로 선생님의 극찬을 얻어 낸 터라 사기충전 상태였지만 워낙 나르시즘이 다분한 성향이기도 했다.

그해 그는 그 작품으로 신춘문예 등단을 했다. 글의 완성도가 높기도 했지만 원유를 개발하는 스토리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전문적인 소재라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선되자 선생님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때려치우고 백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등단이 결코 작가 생활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뛰어든 무모한 선택이었지만 그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어 많은 외화벌이를 하겠다는 포부를 버리지 않았다.

내가 카뮈, 클레지오, 모디아노를 거쳐 쿤데라로 넘어와 있던 그 무렵 쿤데라 마니아였던 그와 일치하는 지점이 플롯의 묘미였으나 앙숙이었던 우리의 관계는 끝나갈수록 악화되었다.     


와는 첫 수업이 있던 날 집으로 가는 전철을 같이 타고 오면서 좋아하는 작가가 알베르 카뮈라는 바람에 서로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했고 줄곧 어울려 다니게 되었다. 지방신문의 신춘문예에서 등단한 뒤 서울로 상경을 했지만 선생님께 혹평을 들은 뒤라 내심 주눅이 들어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녀의 글에는 똘끼가 있었는데 그 점에서 가능성이 엿보였다. 문제의 혹평은 그 때문에 비롯되었을 것이다.      


는 공대를 다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수업을 듣던 친구였는데 공대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서울 예전에 들어가겠다는 바람에 뒷풀이에서 2차로 옮겨서까지 말리느라 의견이 분분했다. 나와 구는 학교는 마쳐야 한다는 쪽이었고, 조는 글을 쓰기 위해서라면 그런 용기가 필요하다며 부채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는 결국 자그마치 S대라는 간판을 포기하고 문창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문장은 늘 경직되어 있어서 쓰는 그도 읽는 우리도 감정을 태울 수가 없었다. 작품을 분석하는 능력은 탁월한데 자신의 글은 바른생활 사나이답게 창의력이 배제되어 있었다.

     

은 우리의 강의가 끝나갈 때쯤 뒤늦게 합류한 친구였다. 말을 아꼈고 그만큼 그녀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와는 온라인 수업과 철학 스터디를 함께 했지만 나와는 성향이 달라서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친구였다.     



하구미의 그림을 본 교수는 오슬로 국제 비엔날레에 출품해 보라고 권하면서 단, 추상은 안 된다고 못을 박는다. 하구미의 삼촌 하마모토 교수는 상을 타지 않아도 좋으니 원하는 것을 그리라며 하구미를 응원한다.

헤드폰 속에서 흘러나오는 카탈리니Alfredo Catalani의 <라 왈리La Wally> 중 왈리의 아리아 ‘먼 곳으로 떠나가리Ebben Ne Andro Lontana’를 들으며 붓질을 시작하는 하구미.


전시회를 열려고 돌아온 모리타도 하구미의 그림을 보며 자극을 받아 톱으로 나무를 깎고 다듬어 간다. 간간이 서로의 작품을 엿보며 작품을 완성해 나가던 그들이 어느 날 마주친다.

“그림 좋더라.”
 “그 조각, 일주일 전이 좋았어요.”

“들켰네. 역시 실패군. 처음부터 다시야.”

모리타는 옆에 놓여 있던 빈 캔버스 판넬로 다가가 붓질을 시작하고 그에 화답하듯 하구미도 붓을 들고 물감을 흩뿌리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판넬이 매워지고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두 천재의 다가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동경과 함께 박수를 보낸다.      



신춘문예에 조가 당선된 데 힘입어 우리는 수강을 끝낸 뒤에도 모임을 갖기로 하고 <느림>이라는 이름을 짓고 품평회를 시작했다. 그 즈음 발간된 쿤데라의 작품 제목이기도 했고 서두르지 않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었다.

뛰어난 분석력을 가지고 있던 이가 날카로운 지적을 할 때면 작가의 길보다는 평론가로 전향하는 게 낫겠다는 의견들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소설을 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서울 예전에 다니며 편집부 일을 하던 그는 모임에 참석하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그가 없는 품평회는 중심을 잃은 조의 독단적인 시선으로 분석이 흐려지기 마련이었다. 내 글에는 유독 지엽말단적인 부분을 지적하며 말도 안 되는 잣대를 들이대곤 했다. 명색이 등단한 작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던 그에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덧 신춘문예 시즌이 다가오고 뒤풀이가 끝난 뒤 나와 구, 김, 셋이 마주하게 되었다. 모두 어느 곳인가 원고를 투고하고 연락을 기다리고 있어서 초조한 마음들이라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얼굴을 대면하고 있으려니 헛웃음만 나오던 기억이 새롭다.

다음 날 구의 당선 소식이 들려왔고, 사흘 뒤 김의 당선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내게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갤러리의 오너 게이 브라더스는 작품을 비즈니스로 판단하고 예술성을 따지기보다 상품성을 강조한다.

모리타의 전시회가 열리고 ‘구멍이 넘치는 나무’라는 이름으로 나온 조각을 보는 순간 하구미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다시 만들 거라던 말과 달리 그대로 출품이 된 것이다. 다시 만들 시간이 없었다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모리타를 보며 하구미는 납득이 안 가는 표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5백만 엔이라는 거금에 작품이 팔리고 평론가는 크기만 크다는 혹평을 쏟아낸다. 이를 참지 못하고 덤비던 하구미를 말리려 모리타가 주먹을 날리고 갤러리를 빠져나온다. 놀라서 쫓아 나온 친구들은 어이없는 상황에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그들은 마야마가 1년에 걸쳐 고친 고물 자동차를 타고 바다를 보러 떠난다.

나는 최고다.” 바다를 향한 모리타의 외침에 “청춘이 최고다”로 맞서는 다케모토. 그들은 그렇게 먼 훗날 돌이키고픈 청춘의 한 컷을 남긴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놈의 고물 자동차가 액셀을 너무 밟아서 멈춰 서버리기 전까지는.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온천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모리타는 벽에 걸려 있던 조악한 그림을 떼어내고 달력을 찢은 뒷면에 간장을 찍어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흡족해하며 보고 있는 하구미, 그걸 지켜보며 불안해 하는 다케모토의 표정이 엇갈린다.      

아침 바다 앞에 선 모리타와 하구미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들떠 있다.

“어릴 적부터 쭉 생각했어. 사람은 왜 그림을 그릴까?”

“그리고 싶으니까요.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니까. 그건 사람이 왜 사느냐고 묻는 것과 같아요.”

“솔직하고 흔들림이 없구나. 부럽다. 아마도 네 그림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

모리타는 하구미의 입에 입술을 포갠다.

그걸 지켜보던 다케모토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하구미는 뜻밖의 상황에 놀라 달아난다.     



돌이켜 보면 문창과도 아닌 사설학원 열명 남짓의 수강반에서 세 명의 당선자가 나온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전국 몇천 명의 응모자를 뚫고 당선이 되려면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문운도 따라야만 그 짧은 시간에 훑어보는 원고에서 선택받을 수 있는 것인데 그걸 통과한 사람이 자그만치 셋이나 된 것이다. 모두 그 어마어마한 기적에 들떠 있었지만 내 기분으로 말하자면 바닥으로 가라앉아 존재가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들 내 눈치만 살피고 있어서 짐짓 목소리를 높여 축하의 멘트를 날려야 했다.

구는 뭐가 그리 미안한지 미안하다는 말의 연속이었다. 그 말이 차라리 나를 더 아프게 했다.


당선된 기쁨과 달리 우리의 품평회는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조는 내 글에 대한 악담이 갈수록 심해졌고, 오랜만에 참석한 이는 의아한 듯 그 자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물컵이라도 날릴 줄 알았는데.”

험악한 분위기가 이미 오래 지속된 상황임을 알 리 없는 이는 조의 날 선 말에 놀라워했다. 그리곤 위로의 의미였는지 내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이에게 나는 상처를 주고 말았다.

“무색 무미 무취.”

결코 상처를 주기 위한 말이 아니라 그를 아끼는 마음이었지만 결국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이후 그는 바쁘다는 이유로 모임에 나오지 않았고 나는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좀 망가져서 문장에 리듬을 넣고 감정을 실어보라는 말이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모리타의 기습으로 정신적 충격에 휩싸인 하구미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진다.

“내 말만 들으면 오슬로 국제전에 입상할 수 있어. 분방하게 자기 개성을 소중히 하다가 사라져간 재능을 수도 없이 봐왔어요. 이대로 뒀다가는 자기 재능의 무게에 짓눌리고 말 거예요.”

교수는 자신의 충고와 달리 추상을 밀어붙인 하구미의 작품을 보면서 낙담한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만 가끔은 그들에게 꿈꾸게 하고 싶거든요.”

삼촌인 하마모토 교수는 하구미의 입장을 대변한다.      


“하구미를 도와줄 사람은 선배밖에 없어요.”

슬럼프에 빠진 하구미를 모리타에게 부탁하고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 시작한 다케모토는 어제까지의 모든 걸 뒤로 한 채 마치 굴러떨어지듯이 도망친다.

“이거 도리 맞죠? 무로마치 시대의.”

평소에도 고건축에 관심이 많던 다케모토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던 사찰에서 도리를 다듬고 있던 목공에게 말을 건넨다. 이후 다시 만나게 된 목공은 다케모토에게 목공소의 연락처를 주고 떠난다.

다케모토는 지난번 친구들과 갔던 바다에 서서 그때를 떠올린다. 그날의 바다는 그토록 눈부셨는데 도망칠 때가 아니었다. 지금 도망치면 모든 게 무로 돌아간다. 하구미를 만난 것마저도.     


하구미는 출전할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 채 온통 검은 구멍으로 캔버스를 메우기 시작한다.

모리타는 차를 빌려 하구미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한다. 갤러리의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5백만 엔짜리 조각에 기름을 붓고 라이터에 불을 붙여 던진다.

“자기 작품을 태우면 이런 기분이야. 돈다발을 태우는 기분. 안심해. 지금 태우는 건 돈이야. 작품이 아니야. 어느 시점부턴가 더는 작품이 아니었어.”

그는 하구미에게 모두들 걱정하니 멋대로 외톨이짓 하지 말라며 외국으로 떠날 것을 고한다.      



유독 나만 미끄러지는 게 신경이 쓰이셨던지 어느 날 선생님의 전화가 걸려 와 원고를 가져와보라 하셨다. 처음부터 절대 사적으로 우리를 챙겨주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 못을 박아놓기도 하신 터라 의외이기는 했으나 이런 기회가 또 있으랴 싶어 써놓은 단편 두 편을 들고 선생님 댁 근처 단골 술집에서 찾아뵀다.

하지만 2주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고, 하는 수 없이 내 쪽에서 전화를 드렸다. 다시 그곳 술집에서 마주한 선생님의 입만 쳐다보고 있으려니 가뜩이나 말씀이 짧으신 분이 무겁게 입을 여셨다.

“요즘 누가 공단 얘기를 써?”

공단 얘기는 아니었다. 유해한 물질을 다루는 공단의 화학 약품 환각성에 대한 소재였는데 한물 지난 공단 얘기라 여기신 것이다. 삼성의 발암물질 사건이 있기도 전이라 품평회를 할 때도 억측으로 여기던 소재였다.

관음이 우스꽝스럽게 페미니즘으로 포장되던 시절이었다. 그런 글은 쓸 생각조차 없었다. 더 이상 글을 쓰는 일이 위안이 되지 못한 채 상처로 남았다.

이후 몇 해 더 고배를 마시고 구가 투고한 신춘문예 예심을 맡게 됐다는 것을 알고 나자 더 이상 신춘문예에 응모하지 않았다. 싱글맘의 사투가 시작되었고 글을 쓸 시간조차 없게 되었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이가 스무 살이 되던 지난해였다. 물론 소설은 아니지만 무언가 시작해 볼 생각을 하고 조금씩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하고 있다.

‘초원을 만들려면 꿀과 클로버가 필요하다.’

<허니와 클로버> 영화가 시작되면서 뜨던 자막이다. 내 앞에 펼쳐질 초원을 꿈꾸며 클로버로 빈 공간을 가득 메울 생각이다. 꿈꾸던 장편소설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지는 내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미지수이다.


느림 멤버 중 소설로 밥을 먹고 사는 것은 구뿐이다.    

"나는 자네들이 전부 소설을 쓰리라고는 생각 안하네. 하지만 어디서 뭘 하든 문장만은 제대로 쓰기 바라네."

선생님의 바람처럼 그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글빨로 두각을 드러내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하구미 나는 네가 좋아.”

다케모토는 결국 하구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아리가또.

환하게 웃으며 화답하는 하구미.     

다케모토는 공방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모리타는 뉴욕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평판이 별로여서 덕분에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다. 마야마는 하라다 디자인에 정식 채용돼서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야마다는 당분간 조용히 지낼 생각이다.

하구미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코발트빛 블루, 그들이 갔던 바로 그 바다를 완성한다.

청춘의 찬란함이 모래톱에 발자국을 남기며 지나가던 시절의 한 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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