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황급히 그의 시신을 화장하려 당직 검사를 찾아간다. 당직을 서고 있던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 검사는 누가 봐도 빤한 죽음에 발을 담그는 것을 거부한 채 ‘시신 보존증명서’를 발부한다.
“시신에 손대는 순간 싹 다 공무집행방해 혐의를 걸어버리겠어.”
죽은 박종철에게 심폐소생술을 했던 담당 의사 오연상은 은연중 몸에 물기가 있었다는 말을 흘리다 입을 다물고, 수상쩍은 낌새를 알아차린 윤상삼 기자는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 의사와 접촉한다. 도착했을 때 바닥에 물이 흥건했고 폐에서는 수포음이 들렸다는 의사의 증언을 통해 물고문의 혐의가 드러난다.
가족의 울부짖음에도 아들의 시신조차 볼 수 없게 하는 정부에 분노한 최 검사는 결국 옷을 벗고 나가면서 윤 기자에게 슬쩍 그 서류를 흘려넘긴다.
“지옥이 뭔지 알갔어? 내 식구들이 죽어 나가는 판에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는 거, 소래기 하나 못 지르는 거, 고거이 바로 지옥이야.”
인민군에게 가족이 몰살당하고 북에서 월남한 대공수사처 박처원은 국가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달고 있지만 가족의 복수에 혈안이 된 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다.
“보따리 하나 터진 걸 가지고 소란 떨 거 있네? 밥들 먹으라우.”
“시신은 어떻게 할까요?”
“태우라우.”
그러나 사건은 박 처장의 의지대로 은폐되지 않은 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안기부장 장세동은 국민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박 처장의 부하 둘을 감옥에 집어넣는 것으로 꼬리를 자르고 사건을 수습하려 한다.
80년 5월 나는 광주에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등교한 지 오래지 않아 담임은 하교하라며 황급히 종례를 마쳤다. 우리는 어린 나이에도 서로를 두리번거리며 뭔가 불길한 조짐을 알아차렸다. 담임은 복도에 줄을 세우더니 직접 정문까지 인솔해 갔다.
운동장에서는 무장한 군인들이 우리를 바라보며 낄낄거렸다. 정기적으로 위문편지를 쓰며 내가 생각했던 씩씩한 국군 아저씨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그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장병들이 아니라 총구를 겨누며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다가왔다.
“절대 혼자서 가지 말고 여럿이 짝지어서 집으로 가야 한다.”
담임 선생님은 신신당부를 한 뒤 우리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에 돌아온 뒤 오래지 않아 아빠도 집에 들어오셨다. 정세에는 어둡고 성실만이 주특기였던 아빠는 피아노 학원에 가지 않은 나를 나무라셨다.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아빠의 불같은 성격을 아시는 엄마는 하는 수 없이 내 손을 잡고 피아노 학원으로 향했다. 놀란 피아노 선생님의 커다란 눈망울이 더 커져서 쏟아질 것만 같았다.
“어머, 이 판국에 여기를 오시다니요. 어머님 빨리 돌아가세요.”
우리는 다시 집으로 향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로변에 서서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 했다. 빡빡이 머리를 한 중학생 오빠들부터 중년의 아저씨들까지 연령은 다양했으나 비장한 표정으로 트럭의 난간을 붙잡고 있는 모습들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사진처럼 뇌리에 박히고 말았다. 도로에 날리는 뿌연 흙먼지가 5월에 내리쬐는 태양 빛에 반사된 채 거칠게 대기를 타고 떠돌았다.
그날 밤 모두가 숨죽여 고요해진 골목에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모두 대문 밖으로 몰려 나갔더니 청년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골목으로 뛰어 들어왔다. 동네 사람들은 학교 뒤 담장 쪽을 손으로 가리켰고, 그는 골목 끝 담장을 타고 올라 학교로 몸을 숨겼다. 이내 사내들이 몰려 와 그를 찾았으나 종적을 놓친 채 발길을 돌렸다. 우리 모두 그가 무사하기를 빌었다.
이후 광주의 모든 진입로가 봉쇄되었고, 집에 발이 묶인 동네 아저씨들은 우리 집 마루에 걸터앉아 엄마가 담가 놓으신 담금주를 비우며 시국에 관한 얘기를 나누셨다. 그렇게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리는 밀담에는 전두환이가 계엄군들한테 약을 먹여서 보냈을 거라는 소문도 섞여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멀쩡한 정신으로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가를 수 있냐고.
허나 돌이켜보건대 그것은 약의 힘을 빌어서가 아니라 광기에서 비롯되었다. 공권력이 자기 손에 무기와 함께 들려지는 순간 총구를 겨눠야 하는 공포는 폭력으로 산화되고, 잠재되어 있던 폭력성이 발산되면서 광기가 도시를 점령했다. 도로를 질주하는 승용차에는 시체들이 태극기에 덮인 채 어딘가로 실려 갔다.
그런데도 텔레비전 뉴스에는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분노한 시민들은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MBC 방송국에 몰려가 불을 질렀다. 아이들이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그러나 아이들 모두가 알고 있는 어른들의 세계는 공포로 술렁였다.
전두환이 물러가라 쿵짜라잔짜~~ 안 나가면 쳐들어간다 쿵짜라잔짜!!!
골목에서는 아이들의 입을 타고 노래가 흘러 다녔다.
멀리 도로변에서 총소리가 들려오는가 하면 비행기나 헬리콥터가 요란스레 날아다녔다.
“우리도 이렇게 손 놓고 있으면 안 되지. 목숨 걸고 싸우는 내 새끼들 배라도 채워줘야 하는 거 아녀?”
아주머니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고무대야에 차곡히 쌓더니 머리에 이고 도로변으로 나가셨다. 그러고는 빈손으로 돌아오시는데도 환한 표정들이었다. 어린 내게는 뭔가 축제라도 벌어지는 것처럼 주변을 타고 떠도는 분위기가 사뭇 들떠 보였다. 동네 구멍가게는 물건이 바닥나고, 집집마다 쌀통이 비어가고 있는데 아무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게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비장함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철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장송곡이 울려 퍼지는 전쟁터와 같은 나날이 지나던 어느 날 밤 젊은 여성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졌다.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울먹이는 그 언니의 목소리를 따라 울었다. 어른들도 눈시울이 시뻘게졌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울먹이던 목소리가 그치고 밤새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오던 총소리가 멎었다.
장렬히 항거하던 시민군의 씨를 말리고서야 계엄군이 물러난 거리는 오랜만에 조금씩 활기를 찾아가는 듯 여겨졌다.
하지만 그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첫 미팅에 나섰던 연희는 시위대를 진압하던 경찰에 붙잡힐 뻔하다 누군가의 손목에 이끌려 골목으로 달아난다. 신발 가게 주인은 위험에 처한 이들을 가게로 끌어들이고 셔터를내린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수건을 벗은 이한열은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채였고, 연희는 그를 위해 신발값을 대신 내준다.
이후 대학 교정에서 만화 동아리 홍보를 하러 나온 이한열의 모습을 본 연희는 동아리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보러 간다. 그러나 너무 잔인한 장면들을 끝까지 보지 못한 채 울면서 뛰쳐나가고 따라나온 이한열이 연희를 위로한다.
"만화 동아리에서 저런 걸 왜 보여줘요? 뭘 어쩌자는 건데요? 총 든 군인들하고 싸울 거예요? 어떻게 싸울 건데? 그러다 또 사람 죽으면 누가 책임지냐구요."
그 무렵 암암리에 상영되던 5ㆍ18 다큐멘터리는 그렇게 대학가를 통해 광주항쟁의 진실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광주는 축제가 벌어졌다. 도청이나 대학교 앞에서는 최루탄을 쏘아대는 전경과 화염병을 든 학생들이 팽팽하게 맞선 채 시위가 계속됐다. 조선대학교 옆에 자리한 우리 중학교는 더 이상 수업을 할 수 없어 일찌감치 하교하고는 했다.
버스는 끊기고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최루탄의 냄새로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 된 채 집에 도착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보도블록을 깨서 던지는 학생들의 시위 탓에 바닥은 패어서 발이 빠지고 쏘아대는 최루탄의 파편이 옷에 들러붙어 황급히 불을 꺼야 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자들을 대신해서 싸워야 했고, 그것을 탓하는 이들과 다시 충돌하기 일쑤였다. 정의는 폭도라 불리었고, 불의의 침묵이 평화로 둔갑하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신설 학교라 대학을 졸업한 지 오래지 않았던 선생님들의 열기는 대단했다. 사회 선생님은 마르크스 이론을 칠판에 빼곡히 적은 뒤 그 오류를 열거했다. 그러고는 그 이론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우리의 몫으로 남겨두셨다. 지금에서야 1991년 소련이 패망하고 사회주의가 몰락했지만, 그때까지는 마르크스 이념이야말로 논란의 중심에 있던 고뇌하는 지식인의 척도였다.
교도관 한병용은 구속된 형사들의 면회 현장에서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고 조카인 연희를 통해 재야인사 김정남에게 '박종철 물고문 사건'의 전말을 알린다. 김대중 김영삼 8ㆍ15 공동선언문, 인혁당 사건 성명서, 보도지침을 폭로한 인물로 수배 중이던 김정남은 숨어있던 사찰에서 동아일보 해직기자인 이부영의 옥중서신을 받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넘긴다.
"김대증이 김영삼이 빨갱이 만들어서 박종철 덮어버리세요.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민심이 요동을 치자 안기부장은 박 처장을 다그친다.
"내래 북에서는 암캐들 다 풀어서 산보다녔어. 기카믄 발정난 수캐들이 개구멍에서 침 질질 흘리면서 기어나와. 암캐들 다 풀어가지고 몰고 다니라우."
김정남을 만나러 절에 들렀다 감시하던 경찰에 의해 한 교도관의 신분이 발각되면서 끌려가 고문을 받는다.
"김정남이가 김일성이한테 공작금 타서 야당 것들하고 나눠썼다는데 기래?"
"모릅니다."
그들은 언제나 범죄를 조작날조하고 사실화시킨다. 그러나 함세웅 신부의 폭로로 진실이 밝혀지면서 박 처장을 비롯한 고문에 가담했던 부하들은 구속된다.
호언철폐 독자타도
연일 이어지던 시위의 앞줄에 서 있던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고 결국 사망하게 되자 장례식 노제에 100만여 명이 운집한다.
결국 6월 항쟁의 거센 물꼬가 트이고 독재자 전두환은 6ㆍ29선언을 통해 거대한 물결을 거스를 수 없다는 대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처럼 보였다. 대통령 직선제를 선언한 것이다.
김대중 선생.
오랜 동안 분노가 들끓고 구심점이 필요했던 광주시민들에게 무언가 가르침을 줄 것 같은 존재, 그는 ‘선생’으로 불렸다. 광주의 정신적 지주 김대중 선생이 5ㆍ18시기를 감옥에서 보내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주동으로 몰려서 사형선고를 받고, 재외교포들을 중심으로 한 구명운동 끝에 무기징역에 이어 해외로 망명했다가 귀국하자 광주는 그를 맞이할 채비에 들어갔다.
마르크스 이념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각자의 몫이었으나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분명했다. 민주화의 바람이 불어왔고, 바람을 타고 대통령 직선제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젊은 선생님들은 직선제의 열기에 달떠 계셨고, 투표권이 없는 우리도 덩달아 세상이 바뀔 것만 같은 분위기에 휩싸여 대선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았다. 반드시 투표함을 지켜야 한다는 결기로 투표함 사수대를 자처하신 선생님도 계셨다.
87년 대선을 치른 그날 밤, 나는 기말고사를 앞두고 친구와 독서실에 있었다. 버스는 이미 오래전에 끊겼고, 집에 전화를 걸자 아무도 받지 않았다.
친구와 나는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상공회의소 앞으로 갔다. 늘 그렇듯이 전경과 시민들이 대치한 채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어린 전경들은 방패를 두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 앞에 서 계시던 젊은 아저씨가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전경을 향해 연기를 내뿜었다. 희부윰한 연기가 어둠을 뚫고 대기중으로 피어올랐다.
“너 이 새끼, 니들은 노태우 찍었지?”
담배 연기를 내뿜던 아저씨가 전경을 향해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전경이 미동도 하지 않자 아저씨는 계속해서 담배 연기를 내뿜어 댔다. 사람들이 낄낄거리는가 하면 그만두기를 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분위기는 삼엄하게 달아올랐고, 팽팽한 긴장으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연기를 고스란히 맡고 있던 전경의 고성이 밤공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씨팔, 우리도 사람입니다.
갑자기 모든 사람이 무장해제에 들어간 것처럼 긴장이 풀렸다.
“그려, 저 어린 전경 놈들이 뭔 죄가 있겄어. 전두환이를 잡아 족쳐야지.”
그래 전경도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 돌이켜보자니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이었을지가 궁금해졌다. 나도 사람이니 사람답게 대접해 달라는 의미였을까? 아니면 나도 사람인데 설마 노태우를 찍었겠느냐는 의미였을까?
아직도 세상 사람들은 광주라 하면 폭도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하고, 심지어 빨갱이 운운하기도 한다. 그 시시비비를 가리려 해도 확증편향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것을 입증하는 일이란 때로 무모해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진실은 박종철 열사가 있었기에, 이한열 열사가 있었기에, '화장동의서' 사인 대신 '시신 보존 증명서'를 발부하던 공안부장 최환이 있었기에, 진실을 전달하려던 교도관 한병용이 있었기에, 팩트를 폭로한 윤상삼 기자가 있었기에, 의사 오연상이 있었기에, 불의 앞에 숭고하게 맞서던 함세웅 신부를 비롯한 성직자들이 있었기에, 계엄군에 맞서 총을 들고 광주를 민주주의를 지키려던 시민군이 있었기에,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고 마이크를 부여 잡고 흐느끼던 대학생 언니가 있었기에, 고무 대야에 주먹밥을 담아 나르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민주주의의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특별히 정의로운 것이라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할 일을 했을 뿐인 그들이 모여서 이루어 낸 정의,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우리가 잃어버린 정의이다.
159명의 젊은이들이 길거리에 서서 압사 당해 죽어도 이름조차 불러보지 못하고, 건장한 대한민국의 해병이 물에 휩쓸려 가도 진상조사조차 하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는 이제 다시 총선을 맞이했다.
함부로 누군가에게 죄명을 씌우고 자신들은 온갖 범죄를 저질러도 감싸주는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기자들은 독재자의 죄를 함구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무기로 삼아야 할 것인가. 더 이상 화염병을 들고 나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그저 국민으로서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기자였던 알베르 카뮈의 입을 빌리자면,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다. 민주공화국은 관용으로만 건설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