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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편 Mar 02. 2024

더 헌트, 마녀사냥

원더풀 라이프


너는 선을 보렴. 나는 앞을 볼 테니까.

선을 밟지 못하는 유치원생이 있다. 클라라는 선을 밟지 않기 위해 고개를 땅에 처박고 걷다가 길을 잃었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아이는 두려웠을 것이다.

그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아저씨는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자신의 유치원 선생님인 루카스이다. 아이는 선을 밟지 않기 위해 땅을 보며 루카스를 따라 안전하게 집에 당도한다.

부모님이 다투느라 클라라를 미처 유치원에 바래다주지 못하자 루카스가 데리고 가기도 한다.

과연 클라라에게 루카스가 어떤 존재로 다가왔을까?

아이는 레고로 하트를 만들어 포장지로 감싼 뒤 클라라는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서 선생님의 코트 주머니에 넣는다. 그렇게 러브레터가 당도한다.


루카스는 친구가 차가운 호수에 뛰어드는 내기를 했다가 몸에 쥐가 나자 누구보다 먼저 들어가서 친구를 구해주는 유형의 인물이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작은 시골마을이라 학교가 문을 닫자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다. 길을 잃은 클라라를 발견한 순간 그는 친구 테오의 딸을 집으로 바래다준다. 집에 있던 테오가 그를 맞이하고 그는 자신의 주방처럼 자연스레 싱크대에서 커피잔을 꺼내 커피를 마신다.

"전처하고 문제는 어떻게 됐어?"

"다 괜찮아."

루카스의 눈이 씰룩거린다. 테오는 단번에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들은 그런 관계이다. 같은 동네에서 자라면서 수십 년을 함께 뒹굴어온 불알친구.


"늙은 거시기, 큰 거시기 거시기 천국이다. 큰 막대기 같지?"

클라라의 오빠는 친구들과 장난스레 노트북을 들이대며 클라라에게 남자의 성기를 보여준다. 클라라의 뇌리에는 당혹스러움과 호기심이 혼재된 채 각인되었을 것이다.    


루카스가 아이들에 둘러싸여 죽은 시늉을 하자 놀라서 긴장하던 클라라는 다시 되살아난 루카스를 보며 환한 미소를 채 몸을 던져 루카스의 입술에 뽀뽀를 한다.

당황한 루카스는 몸에서 클라라를 떼어내고 레고 하트를 되돌려주며 타이른다.

"내가 넣은 거 아니에요."

"입술 뽀뽀는 엄마 아빠한테만 해."

클라라는 사랑하는 선생님이 자신을 미워한다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루카스 선생님 싫어요. 멍청한 데다 못생겼어요. 고추도 달렸어요. 선생님 고추는 앞으로 뻗어 있어요. 하트를 주셨는데 갖기 싫어요."

그것들은 상상과 오빠가 보여주었던 사실들이 뒤섞이며 그녀의 머릿속에서 재구성되어 내뱉어졌다. 클라라가 원장선생님에게 거짓을 말하는 동안 줄곧 코를 훌쩍이며 입술을 삐죽인다. 그러나 원장 선생님은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클라라의 얘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클라라의 상담이 이루어지고 상담사는 루카스가 고추를 보여준 다음의 퍼즐을 무리하게 꿰맞추려 하얀 액체까지 운운한다. 클라라의 머릿속에 없던 퍼즐조각 하나가 채워진다. 경찰이 개입해야 할 명분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작은 시골마을에 아동 성폭행범 하나가 탄생한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지방도시에서 명문으로 대접받다가 평준화가 되면서 이름만 각인된 여학교였다. 교장은 명문이던 시절 그 학교를 나온 전 세대의 노인이었다.

사건이 터진 것은 내가 입학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3학년 선배들 몇 명이 집단 임신한 사실이 발각되어 학교가 발칵 뒤집히고 만 것이다. 도서관에서 만난 남학생들과 반강제적 집단 강간을 당한 뒤 덜컥 임신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교장은 남자선생님들이 있는 교무실에서 임신한 여학생들의 상의를 추켜올리며 욕설까지 퍼붓더라는 말이 나돌았다.  

여기까지 얘기하자면 도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스토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토록 진부한 스토리를 내게 특별한 의미로 선사해 준 것은 교장이었다. 너무나도 열정적이었던 그녀는 그 사건을 자신의 치욕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임신한 여학생들을 퇴학시킨 뒤 노화로 불편해진 다리를 이끌고 몸소 반마다 돌아다니면서 훈육을 시작했다. 소위 그녀 나름의 성교육이었던 셈이다.

"여러분 제가 이렇게 나이가 들었지만 저는 길거리를 지나다닐 때도 항상 조신하게 주위를 살피며 다닙니다. 사내들이란 짐승과도 같아서 늙은이 젊은이를 가리지 않아요. 그러니 여자들이란 항상 몸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뭔가 불길한 조짐이 드는가 싶더니 마지막에 쐐기를 박았다.

몸을 버린 여자는 스스로 목숨이라도 끊어야 하는 거예요.


물론 코미디다. 전문용어로 웃기고 자빠졌다. 하지만 돌이켜볼 때 그렇다는 얘기다.

그때까지 학교 선생님들의 말씀이란 내게 진리 같은 것이었다. 더군다나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모범생이었던 내게는 비수가 되어 꽂혔다.

전편에서 언급했던 대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린 나이에 무방비로 당한 폭행이라도 교장의 기준에 의하면 나는 몸을 버린 여성성의 대상인 것이다. 혼란스러웠고 성폭행을 당했던 때로 돌아가 다시 공포가 자리 잡았다. 몸을 버렸으니 그녀의 말대로 목숨을 끊어야 하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불안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마음의 빗장을 열고 들어가 조용히 문을 잠갔다.


"아이들을 상대로 외설적인 행동이 행해진 것 같습니다."

마을에는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확증편향의 오류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법이다.

"정말 내 딸을 건드린 거면 머리에 총알을 박아주지."

친구 테오조차 그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아저씨는 잘못 없어. 내가 바보 같은 말을 했는데 이제는 애들까지 이상한 말을 하고 있어."

"이해하기 힘들 테지만 아마 이런 걸 거야.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을 네 무의식이 차단한 거지. 하지만 실제로 일어났어."

엄마는 클라라를 품에 안은 채 자신의 딸이 폭행을 당한 것이라 단정 지어 버린다.

이혼한 엄마와 살던 루카스의 아들이 아빠가 걱정돼서 집으로 찾아오고 아들이 보는 앞에서 루카스는 경찰에 체포된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모든 원생들이 똑같이 루카스의 집 지하실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루카스의 집에는 지하실이 없다. 증거를 찾지 못한 경찰은 하는 수 없이 그를 풀어준다.  

아들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던 루카스의 집 유리창으로 커다란 돌덩이가 날아들어오고 키우던 개는 사체로 집 앞에 버려져 있다. 위험을 감지한 루카스는 아들 마쿠스를 전처에게 돌려보낸 뒤 다시 혼자 남는다.


오직 혼자뿐이었던 내게 위안이 되어주는 것은 책뿐이었지만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훌쩍 자라 버린 아이에게 동화책 따위는 시시하기만 했다. 하지만 더 이상 계몽사 아저씨는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부모님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로 인해 파멸해가고 있었고, 집안형편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더 이상 새 전집 따위는 내 손에 쥐어질 리가 없었다. 서재가 있던 친구의 집에서 책을 빌려보기 시작했다. 원목으로 짜인 거대한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전집들은 한 번도 들춰보지 않은 새 책들이었다. <전원교향악> <폭풍의 언덕> <주홍글씨> <제인에어> <오만과 편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데미안 > <지와 사랑> 따위를 닥치는 대로 머릿속에 쑤셔 박았다. 수업시간에도 책상 밑에 숨겨놓고 책을 읽다 들키자 압수를 당했다. 가까스로 돌려받기는 했지만 다시는 그 친구에게서 책을 빌릴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이브, 루카스는 수트를 차려입고 교회로 향한다. 마을사람들은 경계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자리에 앉은 루카스는 뒤돌아서 테오를 노려본다. 루카스의 눈을 바라보던 테오는 그가 눈을 씰룩거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었어요."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지만 힘을 합치면 물리칠 수 있어. 루카스 아저씨는 아빠랑 제일 친한 친구잖니. 우린 사과 서리도 같이 했어."

내가 바보 같은 말을 했어. 아저씨는 잘못 없어.

테오는 음식을 싸들고 루카스 집으로 향한다. 오해가 풀리고 둘은 화해한다.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어진 나는 사람들을 읽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표정을 읽고, 행동을 읽고, 심지어 그들의 생각까지 읽을 기세였다. 도시의 한복판에 있던 학교로 가는 버스는 늘 만원이었고, 승객들은 서로 포개진 채 실려 다녔다. 그 버스에서 딱 한 번 누군가의 손이 내 엉덩이를 감싼 채 놓지 않으려는 성추행을 당한 나는 이내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버스에 오르면 재빨리 뚫고 들어가 문이 열리는 뒷문 난간에 기대 서서 계단에 올라타는 사람들을 읽고는 귀신처럼 그들을 골라내곤 했다. 눈이 게슴츠레하게 흐려진 사내들은 어김이 없었고, 멀끔한 바바리를 걸치고 앙상한 손가락으로 여자들의 치마를 걷어올리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차림새나 몰골은 각색이었지만 욕망에 찌든 그들을 골라낼 수 있는 내 능력은 가히 탁월해서 어김이 없었다.


어느 날 만원 버스에 실려 교실에 들어선 짝꿍의 치마에 하얗고 끈적이는 액체가 묻어 있었다. 짝꿍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고, 반 아이들은 모두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액이라는 단어는 그 누구도 입에 올리지 못했다. 마치 갓 세상에 던져진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순진무구한 척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이어야만 했다.

그토록 정숙함을 강요받은 학생들임에도 학기 초가 되면 어김없이 임신을 한 학생이 발각되고 어김없이 퇴학을 당했다. 신기하게도 매번 생겨나는 동정녀들이 학교를 떠나갔다. 그녀들은 어딘가에서 아이를 낳고 살아갈 것이다. 미혼모의 아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방비상태로 세상에 던져질 것이다. 버려졌다는 말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로서.


그렇듯 우리는 각자 어딘가로 던져진 존재들이다.

누군가는 가버나움의 땅에서 자신을 증거 할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로, 누군가는 덴마크의 평화로운 시골마을에서 부모님의 애정을 받으면서 자라나는 존재로, 누군가는 대한민국의 도시에서 부모의 저주를 받은 존재로 던져진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어딘가로 던져졌을 뿐이다. 심지어 케첩병도 자신이 생겨난 존재이유가 있건만 우리는 우리가 존재해야 할 이유도 없이 던져졌다. 케첩병은 케첩을 담을 목적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무언가를 반드시 해야 할 소명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 무엇을 하지 않든 자유이다.


자인의 아버지처럼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내 아빠처럼 자신보다 나이 든 부모 형제들을 돌보려 자신을 헌신하거나,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마약을 팔거나, 해방감을 맛보기 위해 불륜을 저지르거나, 유치원생을 보호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 취급하거나, 자신의 자존감을 위해 학생들을 퇴학시키거나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시간을 통과하며 나아간다. 사고나 행동이 정체되어 있거나 주변을 너무 심려한 나머지 억지로 밀고 나아가기도 한다. 무기력하든 헌신적이든 그들을 제약하는 것은 없다.


단, 그 선택들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무기력한 부모나 헌신적인 부모로 인해 피해자나 가해자가 되는 자식들이나, 사명감으로 선택한 고려가 누군가를 범죄자로 만들거나, 어린 미혼모가 되어 세상을 떠돌게 하거나, 상처받은 영혼이 되어 세상을 등지게 하거나, 던져진 존재들의 관계 맺기로 인해 파생되는 결과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하이데거는 그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심려니 고려니 배려니 하는 데서 파생된 온갖 단어들로 행위들을 규정지으려 했다. 하지만 그 역시 무수한 사망자를 낸 나치에 부역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한낱 던져진 존재에 불과하지 않던가.

그가 좋아하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용어를 붙이자면 지랄을 하고 자빠진 것이다.


1년 후.

루카스 아들 마쿠스의 성년의 날, 오랜 관습에 따라 마쿠스의 주도로 마을 남자들은 사냥에 나선다. 단풍으로 물든 시골의 숲속은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사슴서식지의 사슴들은 평화롭게 숲속을 거닌다. 루카스는 다시 평온을 되찾은 듯하다. 그 고요 속에서 한 방의 총탄이 그를 향해 날아든다. 햇볕에 노출되어 그를 겨냥한 상대의 정체는 알 수가 없다.

여전히 누군가는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 채 영원히 이마에 주홍글씨를 새겨놓았다. 이제 더 이상 루카스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1년 전의 루카스로는 되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사회적 약자인 여자 성별의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피해자의 입장에 세워진 클라라로 인해 단지 그가 남자라는 성별의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가해자가 되어 버린 피해자 루카스.

세상은 사람들이 그어놓은 규범이나 법만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티테일이 너무 많이 숨겨져 있다. 감히 하이데거가 무수한 용어들을 대입시킨다고 해서 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며칠 전 엄마가 집에 오셔서 주무시고 가셨다. 새벽에 꿈을 꾸셨는데 이상한 꿈을 꾸었노라 꿈 얘기를 들려주셨다.

사람들이 더럽다며 엄마의 빨간 신발을 계속 밟아대서 너무 더러워진 나머지 물에 던져버리셨는데, 신발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다시 그 신발을 찾아 나섰지만 찾을 수가 없더라는 꿈이었다.

부모님은 이미 오래전 파경에 이르셨고, 나와 동생은 절대 지난날의 얘기를 입밖에 꺼내지 않는다. 그게 서로의 얼굴을 보며 가족이라는 관계를 유지하는 생존방식이다.

하지만 장본인인 엄마는 죄의식을 안고 사셨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하필 왜 내가 엄마의 과거를 끄집어낸 이 즈음에 엄마의 무의식이 꿈으로 발현된 것일까. 엄마는 내게서 무엇을 감지해 낸 것일까. 어쩌면 엄마도 내가 사람들을 읽고 있듯 나를 읽고 계셨는지 모르겠다.

그렇듯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읽으며 지난날을 거쳐 여기에 와 있다. 과거에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다니는 현재가 뒤얽혀 되돌리려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채로.

나를 태어나게  한 제 부모를 고소하고 싶어요.
루카스 선생님 싫어요. 선생님 고추는 앞으로 뻗어 있어요.

주사위는 던져졌다. 과연 당신은 어느 지점에 던져져 있는가. 그곳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뚫고 이제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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