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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Sep 12. 2024

이화동, 깊은 언덕 집 (창작소설)

5-1. 환영幻影

5-1. 환영幻影


  곧 날이 밝으면 추석이었다. 김 여사는 자신의 방에서 먼동이 트느라 희뿌연 빛이 감도는 미닫이문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자고 일어났지만, 머리가 맑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밤에 김 여사는 프라이팬으로 단비 등짝을 패기까지 하면서 싸웠다. 전날 김 여사는 당숙과 고개 아래 어른이 이번 명절에 안 오실 것 같다는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 불안한 감정은 단국이만이라도 꼭 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단국이가 오기로 되어 있었지만 왠지 불안해진 김 여사의 얼굴은 열로 홍조를 띠었다. 이로써 김 여사가 윤숙에게 전화는 이유는 충분해졌다. 

  지난 십 년 동안 한 번도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았음에도 김 여사는 명절이나 제사가 다가오면 매번 전화를 걸었다. 세상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였지만 김 여사에게는 매번 그럴듯한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유윤숙은 단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윤숙이 십 년 전에 이 집 대문을 넘어간 이후, 김 여사는 윤숙의 '후'하는 숨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김 여사는 십 년째 통화하겠다고 수백 번의 통화시도를 해왔다. 김 여사는 윤숙이 단 한 번도 전화를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만 기억 못 하는 부분 기억상실증 환자 같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김 여사에게 가장 무서웠던 것은 아들, 동찬이었다. 동찬은 정신과 병원에 상담 예약까지 해놓고선 김 여사 몰래 김 여사를 병원에 데리고 가려 하다가 들킨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동찬보다는 머리가 커졌다고 김 여사에게 대드는 단비가 더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전화만 걸어봐. 내가 와서 전화기 전기를 뽑아 놓을 테니까. 아니 부숴놓을 거야."     

  추석 전날, 단비는 온종일 집에 있으면서 김 여사가 전화기를 드는 낌새만 보여도 득달같이 달려와서 김 여사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어린 것의 눈치를 보느라 전화를 못 걸자 김 여사는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결국, 김 여사는 저녁에 마루에 나와 앉아 부침개를 부치다가 단비에게 한소리를 하고 말았다. 김 여사와 단비의 다툼은 단비가 지난번 명절에 윤숙의 아파트를 둘러보고 온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시작되었다. 윤숙이 김 여사와는 철저하게 단절을 했지만, 단비에게 만큼은 최소한의 친절을 베풀었다.      

  "지난번에 갔을 때도 집 여전히 깔끔했고?"

  "몇 번을 말해? 그 집 어지럽히는 사람은 아빠라고. 아빠가 지나간 자리만 지저분하다니까."

  "니 새엄마가 살림은 딱 차고 앉아하니까 믿고 그러는 거겠지."

  "청소 파출부가 하잖아."     

  김 여사는 윤숙과 동찬에게 티끌만큼이라도 불리한 말이 나오면 다른 말로 둘러대거나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단국이는 뭐 하고?"

  "뭐하긴. 학원 가고 시간 남으면 놀고 그러지. 그 여자가 단국이 방 새로 꾸며줬어. 혼자 잔대."

  "벌써 커서 그러는구나. 근데 넌 몇 번을 말해야 고치니? 단국이 에미도 니 에미야. 같이 살지도 모르는데." 

  "그게 말이 돼?"     

  덤덤한 말투로 시작한 대화는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김 여사나 단비나 서로가 듣기 싫어하는 말로 상대방의 마음을 할퀴고 꼬집는 데는 이골이 나 있었다. 거기다가 단비는 이제 컸다고 김 여사에 대해 쉽게 물러나 주지 않았다.


  "그래도 이치라는 게 있는 게야. 새엄마지만 니가 단국 에미한테 잘하면 집안 화목해져서 좋고, 그러면 니 애비 집안 신경 안 써서 좋고. 니가 단국 에미한테 투정을 해 쌓으니 아범이 얼마나 신경 쓰이겠니?” 

  “이 집에서 아빠랑 새엄마 사이에서 아빠 피 말리는 건 할머니라고 생각 안 해? 아빠 젤로 괴롭히는 사람이 누군데?”     

  익숙한 싸움을 하던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거기서 그만했어야 했는데 기어이 김 여사와 단비는 서로의 감정을 더욱 깊게 할퀴고 말았다.


  “세상에 애 본 공은 없다드니. 핏뎅이를 사람 멩글어 놨구만. 저래 뎀비는 걸 보면 딱 지 에미야. 암.”

  "할머니는 평생 그 년 목소리 못 들어. 그 년은 끝까지 할머니 인간 대접 안 할 꺼라고!"

  "그 년이라니! 이 년이 어디 어른한테."


  김 여사는 단비의 버르장머리 없음에 참을 수가 없어서 충동적으로 옆에 두었던 여분의 프라이팬으로 단비의 등짝을 때려주고 말았다. 화가 난 단비가 휴지를 집어 던졌고 김 여사는 단비 팔뚝을 몇 대 더 패주었다. 결국, 싸움은 단비가 제 방으로 줄행랑을 치듯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끝이 났다. 


  그런 난리를 치다가 잠자리에 들다 보니 꿈자리가 영 뒤숭숭했다. 꿈속에서 김 여사는 이미 돌아가신 시어른 세 분을 뵈었다. 남자나 여자나 두루마기 차림으로 미닫이문을 열고 문지방을 넘어서서 김 여사를 조용히 보다가 사라졌다. 아주 가깝거나 각별했던 분들은 아니었지만, 가끔 들러서 종부宗婦 노릇을 하는 김 여사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가던 분들이었다. 김 여사는 지난밤에 어린 것이랑 대거리를 한 일과 기묘한 꿈을 떠올리다가 서글퍼져서 눈물을 훔쳤다. 꿈속에 나타난 시집 어른들도 귀한 어른들이었지만, 그래도 김 여사는 이북 고향에 두고 온 형제와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꿈에서조차 나타나지 않는 그 얼굴들.      

  날은 밝았지만, 서쪽으로 미닫이문이 있는 김 여사의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동찬과 단국이, 김 여사 그리고 단비, 이렇게 가족만 달랑 모여 명절 차례를 지내는 날이 왔다. 이것은 김 여사네 집만의 일은 아니었다. 섭섭할 수는 있으나 딱히 불행한 일은 아니었다. 김 여사도 이제는 손님들이 안 오면 번잡스럽지 않아서 좋았다. 그른데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 그 순간에도, 김 여사는 자신의 말년 인생에서 겪은 모든 불행과 고난이 한 사람 탓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김 여사의 눈앞엔 대략 십 육 년 전, 저 문지방을 넘어오던 젊은 여자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김 여사의 눈빛은 두려움과 미움이 섞여 흔들거렸다. 평소에는 집안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가 명절이면 등장하는 그 형상은 불길하고 기분 나쁜 황주미의 얼굴이었다. 

  동찬과 함께 첫 번째 며느리 황주미가 처음 인사를 왔을 때, 김 여사는 보자마자 인상이 찌푸려졌다. 황주미는 젓가락처럼 삐적 마른 몸에 얼굴은 마른 고구마처럼 길쭉했고 광대뼈가 나와 있었다. 악한 인상은 아니었지만 박복해 보였다. 인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살아온 이야기를 대충 들어 봐도 그랬다. 어려운 환경에서 직장생활을 해가며 돈을 모아 독학과 개인 지도만으로 미술을 공부하여 대회에서 상도 받았다고 했다. 동찬은 그런 면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이야기했는데, 김 여사는 황주미의 그런 고집 센 성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는 고집이 세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고집을 부린 대상이 마음에 안 들었다. 장사해서 돈을 번다거나 약사 같은 전문직에 도전하면서 그런 집념을 보였다면 몰라도, 그림 그리는데 집념을 가졌다는 것이 영 반갑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동네 미술학원이라도 차려서 학생들 상대를 해나갈 주변머리도 있어 보이질 않았다. 황주미의 얼굴에서 어떤 외골수 기질을 읽은 김 여사의 기분은 고약스러웠다. 분명 시집을 오면 오 씨 집안을 생각하기 보다는 지 고집대로만 하려 들것 같았다. 그림 생각에 빠져서 한 푼이라도 모을 생각은 안 하고 물감 살 궁리나 할 것 같았다. 겨우 한두 번 본 인상으로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생각일 수 있었다. 어쩌면 그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긴 피해의식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김 여사는 황주미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직감을 삶의 연륜에서 나온 지혜로 믿었다.      

  "집안에 그림 그리는 사람 하나 쯤 있어도 좋잖아요. 너무 많은 걸 바라시지 마시고요."

  "너, 말 잘했다. 너는 회사 다니며 간, 쓸개 다 빼주고 다니는데, 내가 걔한테 좀 바라면 안 되냐?"

  "제가 뭘 다 빼준다고 그러세요?"     

  김 여사는 황주미의 얼굴을 들여다볼수록 약지 못한 아들, 동찬이 원망스러워졌다. 내조를 제대로 받아도 시원찮은 마당에 자신이 뒷수발을 들어야 할 여자를 골랐으니 미련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완고한 김 여사도 동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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