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환영幻影
5-2. 환영幻影
결혼 후, 김 여사는 그래도 자신이 살던 안방을 내주고 구석방에서 지냈고, 동찬은 문 옆에 있던 광을 손수 고치고 치워서 황주미의 그림 작업을 위한 공간으로 꾸며 주었다. 그러나 연탄 냄새나 나야할 광에서 나오는 물감 냄새는 산동네 골목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황주미는 결혼 초기에는 김 여사와 잘 지내려고 애를 쓰는 거 같았다. 그러나 불안하게 시작한 황주미와 동찬의 결혼생활은 김 여사의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김 여사는 황주미가 마음에 안 들어서 기어코 이 눈치 저 눈치를 줘서 마당 구석의 작업실에 못 들어가게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황주미는 쫓기는 사람처럼 그림에 더 집착하려 들었다.
결국, 낮이면 회사에 나가 집에 없는 동찬도 그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알게 되었다. 그래도 뱃속의 아이가 태어나면 좀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단비가 태어난 이후에도 황주미와 김 여사의 긴장 관계는 나아지지 않았다. 단비가 갓난쟁이 시절에, 동찬의 결단으로 동찬 부부는 김 여사 집 근처에 전세방을 얻어서 따로 나가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동찬 부부와 김 여사는 잠시 동안이라도 타협점을 찾는 듯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낮에 김 여사가 황주미와 동찬이 사는 집에 잠시 들른 일이 있었다. 당시 집엔 아무도 없어서 그냥 돌아오려던 차에, 옆집 여자가 아직 어린 아이인 단비를 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옆집 여자에게 물으니, 아이 엄마가 아이를 두고 매일 어딘가로 가서 아이 아빠가 할 수 없이 돈을 주고 아이를 봐달라고 맡겼다고 했다. 아이 엄마가 매일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대답했다. 아이를 맡은 여자는 아장아장 정신없이 걷는 아이를 포대기 끈에 묶어서 멀리 못 가게 두었다. 남의 집 툇마루 문고리에 포대기 끈에 묶여 있는 어린 손녀를 본 순간 김 여사의 인내심은 바닥을 보이고 말았다. 김 여사는 아이 엄마, 황주미가 저녁이 다 되도록 안 돌아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단비를 아예 집으로 데려와 버렸다. 당시 김 여사는 황주미가 아이를 찾으러 오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아이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갔는데, 그날 저녁 동찬이 아이를 데리러 왔다. 그렇게 아들이 손녀를 데리고 간지 두 어 달이 지났을 무렵 동찬이 어느 날 단비를 데리고 다시 김 여사 집 대문을 넘었다. 그리고 동찬은 이혼 이야기를 꺼냈다. 결혼할 때 황주미에 홀딱 빠져 있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결말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온 셈이었다. 황주미는 김 여사네 집에 들어와 사 년을 못 채운 채, 어린 딸은 남겨 놓고 몸만 쏙 김 여사 집에서 빠져나갔다. 참으로 황망한 결말이었다. 얼마 안 있어 아들, 동찬은 멀쩡히 다니던 회사에서 퇴사까지했다. 그리고 뭘 하는지 시내를 헤메고 다니는 것 같았다. 개인적인 불행을 딛고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아들을 위해 김 여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어린 것을 거두는 것이었다. 그렇게 졸지에 김 여사는 단비를 떠맡게 되었다.아들이 단비를 혼자서 데리고 온 날, 김 여사는 이상하게 생긴 년이 들어와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나갔다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흐느꼈다. 그런데 의외로 김 여사가 속 태우는 시간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동찬이 이혼한지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동찬이 김 여사를 밖으로 불러냈다. 손아래 동서와 함께 간 호텔 커피숍에서 김 여사는 유윤숙을 처음 보았다.
윤숙은 상견례에 온 여자답게 맞춤 원피스를 입고 공손히 앉아 있었다. 둥근 얼굴과 통통한 볼살, 동그란 눈매, 거기에 안색까지 밝아서 후덕한 인상이었다. 대신 자신의 나이에 비해 서너 살은 위로 보였다. 한 마디로 그렇게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쁜 얼굴이 아니라 어른들이 좋아하는 맏며느리 상이었다. 손아래 동서가 김 여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걔랑은 딴판이네요."
"재수 없게 걔 얘기는 왜 꺼내.“
”형님 눈매가 저렇게 똥그란 애는 보통이....“
”시끄러.“
김 여사가 눈치를 주자 동서가 입을 닫았다. 김 여사는 두 번째 며느릿감에 대한 흡족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김 여사는 윤숙이 부잣집 출신이라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집안에 사업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수나 공무원도 있었으니 흠잡을 데 없는 명문가였다. 그런 집안이 왜 자신의 집과 연을 맺으려 하는지 따져 볼 만도 했지만 이미 뜻하지 않은 행운에 감격한 김 여사의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떠오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 동찬이 곧 방송국에 경력직 기자로 입사한다는 소리를 듣고 나니 김 여사는 세상 근심이 다 날아간 것 같았다. 눈앞에 앉은 유윤숙은 며느리가 아니라 은인이었다.
그러나 유윤숙을 며느리가 아닌 사람으로서 본 동서의 눈에 유윤숙은 인상이 범상치 않았다. 황주미의 얼굴은 길쭉하고 마른 얼굴에 각진 광대뼈와 턱선이 드러나 있었고, 콧날도 날카로웠다. 반면 눈을 내리깔고 앉은 윤숙의 얼굴엔 각진 선이란 없었다. 얼굴은 보름달 같았고 눈과 입은 알사탕처럼 동그랬다. 코와 볼에도 살집이 적당히 있어서 낮은 언덕처럼 푸근해 보였다. 언뜻 보면 날카로운 각이 없는 얼굴처럼 마음도 둥글둥글할 것처럼 보였으나 장사를 하면서 사람을 많이 봐온 동서는 윤숙의 눈매가 마음에 걸렸다. 윤숙의 동그란 눈은 길게 찢어진 뱀눈보다 더 싸늘한 기운을 내뿜었다. 동서는 그런 눈은 흔치 않다고 생각했지만 김 여사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남의 집 잔칫상에 재를 뿌릴 수는 없었다.
대개 사람들은 윤숙의 평범해 보이는 얼굴만 보고 윤숙에 대해 긴장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막연히 여유 있는 집안 출신이라고 생각 할 뿐이었다. 그러나 윤숙은 자신과 비슷한 계층이거나 마음에 드는 사람한테는 그런대로 잘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상종을 안 했다. 또 사람을 처음 보면 상대방을 어떻게 이용할지 궁리부터 하는 성격이기도 했다. 동찬과 김 여사는 윤숙의 그런 면을 거의 감지하지 못한 채 결혼만 서둘렀다. 동찬이 윤숙과 결혼을 하던 날, 김 여사는 그날을 자신 인생의 최고 순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김 여사가 환상에서 깨어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김 여사와 친척들이 윤숙의 진면목을 본 것은 두 사람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며칠 후에 있었던 첫 명절, 추석 때였다. 윤숙은 동찬과 함께 김 여사의 집의 문턱을 넘었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다. 그날 윤숙이 딱히 무슨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시집 식구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본 것이 다였다. 그것뿐이었는데도 윤숙 앞에서 수십 명의 오 씨 일가 사람들은 쩔쩔맸다. 윤숙은 혼자였음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마음껏 오 씨 집안사람들을 경멸의 시선으로 보았다. 동찬과 김 여사는 얼이 빠져서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었다. 오 씨 일가 사람들은 윤숙에게 감히 저항할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슬금슬금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 당시만 해도 김 여사와 일가친척 중에 김 여사가 평생 새 며느리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오 씨 일가 사람들과 김 여사는 김 여사의 집이든 어디에서든 유윤숙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윤숙이 김 여사에게 단 한 차례도 전화 건 적도 없었다. 김 여사와 오 씨 집안 사람들이 아무리 전화를 해도 통화가 되질 않았다. 믿거나 말거나 김 여사는 '여보세요'의 '여'자 조차 윤숙이 말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윤숙은 얼마 안 있어서 아이를 가졌고 아들, 단국이를 낳았다. 평생 그렇게 전화조차 안 받을까 싶어 일단 기다렸는데 그사이 몇 년이라는 시간만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다.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 만큼 한가하지 않았음에도 김 여사의 사정이 하도 딱해서 친척들은 흥신소 직원처럼 동찬의 아파트 앞에서 진을 치고 윤숙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었다. 그러나 상황 파악이 빠르고 용의주도한 윤숙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스스로 구차스럽게 느낀 오 씨 사람들은 계획을 포기한 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윤숙을 잡기 위해 나섰던 일가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이 지켜왔던 과거의 명절 분위기는 다시는 있을 수 없는 것이 되었음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다.
이후 명절에도 오 씨 일가 사람들은 이전처럼 김 여사 집에 모였으나 그 끝은 훈훈하지는 못했다. 김 여사나 동찬이 잠시 자리를 비우면 너덧 명이 중구난방으로 윤숙 욕을 하는 것이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버렸다. 그 자리에서 윤숙을 만나러 가기까지 했던 가까운 친척들은 '단국이 엄마'라든가 '동찬이 처' 같은 통상적인 호칭을 쓰지 않고, '그년'이라든가 'X년'같은 험한 욕으로만 윤숙을 칭했다. 단비가 기억하는 어렸을 때의 명절이란 친척 어른들이 쏟아 내던 유윤숙과 황주미에 대한 험담을 듣는 날이었다. 먹을 거 하나 들고 방구석에 콕 박혀 누워 있으면, 친척 어른들은 모두 어린 단비의 존재를 깜박 잊어주었다. 친척들의 대화 속엔 '데릴사위'니 '재취', '첩', '양놈' 등등의 단어들이 자주 튀어 나왔다. 단비가 아는 친엄마나 윤숙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그렇게 주워들은 것들이었다. 어린 단비는 그렇게 자극적인 단어들과 함께 나온 이야기들을 하나도 흘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속에 새겨두었다. 특히 친척들이 윤숙을 부를 때 쌍욕으로 부르는 것이 단비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단비도 마음속에서 윤숙을 칭할 때 꼭 쌍욕으로 따라 불러주었다.
"종부가 벌 받은 거야. 암."
"동찬 에미가 뭔 잘못이라는 게야?"
"누가 잘못 했대나. 말년 복이 없다는 소리지."
"잘 못 한 게 왜 없어? 첫 번째, 그 애를 좀 미워했어?"
"걔가 좀 이상했어? 달밤에 널 뛸 년이지."
"그럼 그 X 년은 며느리이고? 근데 그 X 년은 첫 번째 시집간 집에서는 왜 기어나왔데. 지네 친정보다 더 큰 부잣집으로 가놓고."
"나는 알지. 그년 집구석이 얼마나 잘난 집이길래 그러는가 싶어서 알아봤거든. 그 X 년이 시집갔었던 데가 '봉황' 그룹 집안인데, 아들이 유전병이 있었다더만. 나이 들면 더 심해지는 불치병인데, 그걸 속였다잖아."
"아니, 그 X 년 집도 돈으로 보나 성질로 보나 보통 집이 아닌데 어째 속았데?"
"모르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었나?
"다들 그만 합시다. 장손이 좋은 집에 살면 됐지. 지지리 궁상인 집과 결혼시키려는 에미 있어?"
"일가에서 동찬이 만큼 사는 애도 없구만."
"요즘엔 갈라선다 소리 없으면 된 거야."
누가 들으면 뒤에서 모여 앉아 상스런 욕이나 해대는 거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윤숙으로부터 무시당했지만 백 분의 일도 앙갚음할 통로가 없었던 오 씨 집안사람들은 그렇게라도 해서 분풀이를 하려는 것뿐이었다. 늦은 오후, 친척들이 돌아가고 나면 김 여사와 동찬은 등을 맞대고 돌아앉아 각자 다른 곳을 보았다. 그럴 때 단비의 눈에 두 사람은 서로의 슬픔을 들키지 않으려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친척들처럼 욕도 못하고 참으며 보낸 명절은 동찬과 김 여사의 가슴에 옹이처럼 뭉쳐 아픈 마디가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 단비에게 명절의 오후란 할머니와 둘이 종일 보낸 평일보다 더 쓸쓸했다. 단비의 눈에 점점 흩어져 가는 집 안 사람들을 바라보는 김 여사는 망해 가는 왕조의 마지막을 지키는 상궁처럼 처연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런 슬픔이 뼈에 사무칠수록 김 여사의 미움은 한 곳으로만 향했다.
"그 년이 우리 집을 망가뜨려 놨어!"
김 여사는 자신의 방에 혼자 앉아 허공을 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