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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Sep 12. 2024

이화동, 깊은 언덕 집 (창작소설)

6. 애처로운 짐승

6. 애처로운 짐승     


  이른 아침에 닦아서 마루에 둔 제기祭器들은 마른 수건으로 닦지 않았어도 바람에 말라 있었다. 해가 중천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동찬도 집안 어른도, 누구도 대문을 넘어 오지 않았다. 김 여사는 제기를 닦고 음식을 마루에 내놓은 후에 자신의 방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단비만 부엌을 들락거리면서 떡이니 과일 같은 것들을 야금야금 집어 먹었다. 긴 아침이었다. 기다리다가 지친 단비가 마당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무슨 소리가 들려 대문을 열고 내려다보니, 골목 아래에서 올라오는 동찬과 단국이 보였다. 단비는 안 올까 봐 걱정하고 있던 단국이 보이자 마음이 놓였다. 그때 약속이라도 한 듯 거실 전화기가 울렸다. 고개 너머 어른댁에서 못 가서 미안하다는 전화였다. 그렇게 그해 추석은 친척들 없이 가족끼리만 모여 차례를 지냈다. 차례를 마치고 그날 첫 식사할 땐 일반적인 점심시간을 넘겨서였다. 

  단국이는 할머니, 김 여사와 충분히 시간을 갖고 놀았고, 동찬은 김 여사 방 한구석에서 이불을 덮고 낮잠을 자면서 명절 오후를 보냈다. 서쪽 하늘로 유난히 붉은 석양이 비칠 무렵, 단비는 안방에서 김 여사와 마주 앉아 이야기했다. 단국이와 동찬은 마당에 있었다. 단비는 김 여사와 싸우고 나서 이사 나갈 결심한 모양새가 되어 안타까웠지만, 김 여사에게 자신의 결심을 알렸다.      

  "할머니, 나 아빠 집으로 들어가 보려고." 

  "그래야지. 애비가 기다리고 있다는데."      

  단비는 김 여사의 목소리를 듣다가 깜짝 놀랐다. 하룻밤 사이에 김 여사의 목소리는 특유의 윤기가 사라지고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완전한 노인네의 목소리였다.      

  "명절 땐 하루나 이틀 미리 올게. 장은 내가 봐야지."

  "그래. 여튼 젊은 애비, 에미 밑에 있어야지. 그래야 니 앞가림이라도 할 거고."     

  전날 윤숙을 새엄마라고 부르라는 억지를 부리던 김 여사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김 여사는 의젓한 집안 어른의 모습으로 단비 앞에 앉아 있었다. 똑같은 바다라지만 밀물과 썰물 때에 따라 다르듯이 김 여사는 수도하듯이 단순한 생활을 하다가도 명절 때만 되면 다른 모습을 보였다.     

  "저녁밥은 먹고 가라."     

  늦은 오후, 네 식구가 김 여사 방에서 밥을 먹었다. 김 여사가 차린 밥상은 생선구이와 국, 김치, 그리고 나물 반찬이 있는 밥상이었다. 단비는 수저로 국물을 떠서 목을 적셔가며 천천히 밥을 먹었다. 그동안 김 여사 옆에서 먹어왔던 밥들이 머리를 스쳐 갔다. 단비는 카레라는 음식을 며칠 전에 친구네 집에서 처음 먹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맛을 느끼는 순간 단비는 자신이 할머니와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라면이나 국수는 가끔 먹었지만, 단비는 카레나 수프, 소시지, 삼겹살을 집에서 먹은 적이 없었다. 바깥출입이 없는 김 여사가 그런 음식을 먹을 줄 모르니, 만들어 먹지도 않았다. 또 단비는 김 여사 옆에서 잠을 자던 조무래기 시절의 밤이 생각났다. 그때는 마당 밖 화장실에 밤에 가는 것이 무섭다고 요강을 방에 두었고, 단비는 요강에 앉아서 김 여사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잠이 든 적도 있었다. 그때는 할머니와 영원히 살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밥을 먹던 단비는 목이 메어왔다.      

  미지근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초가을 저녁, 동찬은 단국이와 골목길을 내려갔다. 뒤따라 여행용 가방을 끌고 단비도 김 여사의 집에서 나왔다. 단비는 '동찬의 아파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라고 마음속에서 자신에게 말을 했다. 단비는 골목길을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옅은 어둠 속에서 김 여사의 집은 억세게 자란 능소화 넝쿨에 휘감겨있었고, 그물에 갇힌 작은 동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집 위로 알듯말듯한 얼굴이 겹쳐 보였다. 배순분 같기도 하고 동네 아줌마 같기도 한 그 얼굴은 엄마, 황주미의 얼굴이었다. 단비는 김 여사가 분명 자신의 엄마, 황주미를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만으로 내쫓았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믿는 근거는 유윤숙에 대한 김 여사의 비굴한 집착이었다. 김 여사는 아무 이유 없이 황주미를 미워했기에 유윤숙에게 이유 없이 집착하는 것이라고 단비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집착의 끝은 오히려 윤숙의 김 여사에 대한 철저한 무시일 뿐이었다. 단비는 김 여사의 뒤틀린 집착에서 뻗어 나온 감정이 저 능소화 줄기보다 더 강하게 김 여사를 옭아매고 있다고 생각했다. 속세를 떠난 수도승이나 수도원의 수녀처럼 사는 김 여사였지만 실은 가장 질긴 집착에 칭칭 감겨 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김 여사의 집은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애처로운 짐승 같았다. 단비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골목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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