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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Sep 12. 2024

이화동, 깊은 언덕 집 (창작소설)

4-2. 이런 명절

4-2. 이런 명절


  아마 지금이라면 동찬은 참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동찬은 더 늦기 전에 회사를 나와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동찬은 친족들의 입김이 회사 결정에 개입하는 회사에 대해 참기에는 너무 젊었다. 더구나 동찬은 그들이 거론한 '사생활'로 정신없이 바빴다. 사람을 쓴다고 해도 엄마가 양육을 내팽개친 딸을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동찬은 옮겨갈 회사를 미리 알아보고 나오려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얄궂게도 이직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이 틀어져 버렸다. 동찬은 회사를 나온 후에  다시 회사를 알아보러 다녀야 했다. 한편 정재식은 이미 동찬보다 일 년 정도 앞서서 자신의 사업을 하겠다고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고, '주간 현대섬유'라는 전문지를 펴내는 사무실을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재식은 회사에서 눈여겨 봐뒀던 후배였던 동찬이 회사에서 나왔다는 소리를 듣자 자신의 사무실로 와보라고 연락해 왔다. 재식은 동찬에게 일단 들러 보라고만 말을 던졌다. 

  '주간 현대섬유' 사무실은 동찬의 예상과 달리 여의도에 있었고 사무실도 꽤 크고 좋았다. 재식은 동찬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기자증과 편집위원 신분증부터 주었다. 그때 동찬은 재식이 안겨준 코팅된 종이 카드가 새로운 세계로의 입장권이 될 줄을 꿈에도 몰랐었다.      

  "선배님, 출판업 시작하셨어요? 아니 언론업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 내가 회사나 공장을 돌아다닐 때, 넌 따라만 다니면 돼. 그러면 거기 대표나 홍보실 직원이 글이나 광고 만들어 놓은 것을 알아서 줘요. 넌 그걸 모아다가 인쇄소에 맡기기만 하면 되고. 실제 제작은 인쇄소에서 알아서 하니까 너는 감독을 하는 거야."

  "그럼 출판 아닌가요?"

  "말하자면 출판보다는 언론업이야. 광고가 돈 구멍이고. 돌아다니면서 가는 김에 우리 사업계획도 설명하고, 그러다가 투자도 받아서 무역하자 이거지." 

  "선배님. 저 아직 면접 진행 중인 회사도 있고요."

  "알았어. 당장 내일 가더라도 오늘까진 여기서 일해. 그리고 그 인상부터 펴."     

   동찬은 다른 갈만한 회사 정보를 알아보면서 재식의 사무실에 합류했다. 재식의 사무실에 다니기 시작하고 몇 개월 지났을 때였다. 재식이 동찬을 '나한'이라는 회사에 데려갔다. 나한은 건축을 주축으로 온갖 업종을 다 했고, 사세가 확장 중이었다. 임원 사무실에 잠시 앉아 잡담을 나누었고, 일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동찬은 직원이 내온 커피를 마시면서 사무실 창밖을 내다본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나한의 임원과는 한 차례 더 만났는데, 식사를 겸한 술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재식은 '나한'의 상무에게 사업 계획서를 내밀었다. 그날 다른 곳에 비해 좀 더 깊이 있는 대화를 했고 동찬도 재식의 말에 덧붙여 설명했다. 동찬은 나한 상무가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의 설명을 듣는 것을 보고 사업 계획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동찬은 그와 그렇게 두세 차례 술을 마셨었다. 그러나 나한 상무와 만나는 사이 동찬 인생은 의도하지 않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술 마신 다음 날이었다. 오전 느지막이 사무실에 나온 재식이 느끼한 웃음을 띠며 동찬에게 말했다. '나한'의 상무님이 동찬을 괜찮게 봐서 사무실의 여직원을 소개해주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동찬으로서는 난데없는 제안이어서 거절하고 싶었지만, 투자를 부탁하러 다니는 마당에 잠재적 투자자의 청을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만나게 된 것이 유윤숙이었다. 동찬은 약속을 잡은 다음에야 유윤숙이 ‘나한’ 소유주와 친척 관계라는 것을 알았다. 정재식 말에 의하면 처음 나한 상무실에 방문한 날, 유윤숙이 사무실에서 동찬을 봤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커피를 내왔던 여직원이 어딘지 모르게 당당한 분위기를 풍겼다고 느꼈던 기억이 떠올랐다. 동찬은 그냥 대기업이라서 그러려니 넘겨버렸었다. 

  동찬은 상대가 부담스러워서, 첫 만남에서 자신이 애까지 딸린 이혼남이라고 까칠하게 말해버렸다. 그랬더니 여자 쪽에서도 나이도 동찬보다 두 살 위이고 이혼한 경력이 있다고 털어놨다. 장안에서 누구나 알만한 부잣집에 시집갔는데 남편과 집안이 하도 이상해서 도망치듯 이혼하고 나왔다고 이야기했다. 동찬이 포기하듯 솔직히 말한 것이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편하게 만든 요인이 되어버렸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기하게도 대화를 했다. 첫 만남에서는 데면데면하게 말을 하다가 헤어졌지만 두 사람은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윤숙은 자신이 혼자 쓰는 전화라고까지 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윤숙의 시선은 동찬의 어깨를 지나 그의 두툼한 몸통을 훑었다. 동찬은 윤숙의 시선이 도발적이라고 느꼈지만 싫지 않았다. 동찬은 자신의 의도이든 아니든 어떤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갑자기 마음속에서 뭔가 이전까지와는 다른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앞에 앉은 여자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단순한 욕망만은 아니었다. 동찬은 윤숙이라는 여자를 향해 승부수를 던져보고 싶어져서 윤숙에게 연락하지 않고 기다려 보았다. 그랬더니 윤숙이 먼저 연락을 취해왔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홀리듯 만남을 이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윤숙이 먼저 동찬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동찬이 윤숙의 삼촌인 유원국을 만나게 된 때는, 아직 양쪽 집안에 정식으로 인사하러 가기 전이었다. 윤숙이 동찬에게 자신의 삼촌을 만나봐 달라고 제안했다. 삼촌, 유원국은 ** 방송국 이사였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가는 오후에 방송국의 유원국 사무실에 들른 동찬은 인사만 하고 가려했다. 그런데 유원국이 난데없이 영어 사전과 함께 한국 경제에 관한 미국 신문기사를 던져주면서 요약을 해보라고 했다. 동찬이 유원국에게 대충 내용을 요약해 주자, 경제와 무역에 관한 질문을 해왔다. 전문적인 것은 아니었고 방금 읽은 기사를 요약해서 말해보라는 의도였다. 동찬의 입장에선 예고 없이 면접을 본 셈이었다. 다음 날, 윤숙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방송국에 경력직 모집이 있으니 지원해보자고 했다. 동찬은 자신은 자격이 안 된다고 말하려 했으나 윤숙은 동찬의 목에 걸려 있는 기자증을 잡아당겼다. 정재식이 안겨주었던 알량한 편집인증과 기자증은 이력서에서 진짜 경력으로 둔갑해버렸다.      

  방송국 입사와 일의 방향이 정해지자 결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동찬이라고 그저 흥만 나는 것은 아니었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방향으로 인생이 굴러가게 되자 당황스러웠다. 동찬은 자신을 처가 덕을 입을 만큼 능력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또 여자의 도움으로 뭔가를 해볼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동찬은 이혼 서류에 적힌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새 결혼을 결정한 자신에 대해서 약간의 혐오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혐오감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상념일 뿐이었다. 동찬은 롤러코스터 위에서 안전벨트만 꽉 쥐고 즐기면 되었다. 동찬의 인생의 레일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동찬은 윤숙과 결혼을 했고, 윤숙이 혼수로 들고 온 아파트에 살면서 방송국에 나갔다. 속된 말로 동찬은 신수가 훤해졌다. 팔자를 고친 셈이었다. 동찬과 재식은 가끔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주간 현대섬유’는 동찬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적자 상태를 면치 못 했으나, 정재식이 다른 사업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그럭저럭 유지해 나갔다.     

  동찬은 퇴근 시간 후에 회사 주차장 입구 쪽에서 재식을 만났다. 중형차에서 내려서 걸어오는 재식을 보니 안 보는 사이 배가 더 불룩하게 나왔고, 볼살마저 불어서 교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인상이 더 강조되어 보였다. 동찬은 재식이 사 년 전부터 사업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찬과 재식이 마지막으로 만난 이후부터 운이 트이기 시작한 거 같았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동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님. 사장님 티가 확 나십니다."

  "넌 얄밉게 살이 하나도 안 붙었구나."

  "그럴 리가요. 요즘 잘 나가신다는 소리가 들리던데요."


  만나자고 한 사람은 동찬이었으나 재식이 아는 일식집에서 두 사람은 밥을 먹고, 음식점 옆 건물의 이 층에 있는 술집에 갔다. 그곳은 삼 십 대로 보이는 여자가 마담이었고 재식은 단골 같았다. 술이 나오자 재식은 동찬과 학창시절 선후배처럼 편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여자는 백마지. 해외에 다니는 김에 겸사겸사 다니면 좋지. 그 맛에 일하는 거고."

  "선배님은 중동에 주로 다니시잖아요. 중동에 그런 데도 있나요?"

  "중동은 뭐 사람 사는데 아니냐? 그리고 거기까지 한 번에 가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걸치면서 가잖냐.“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재식의 대화엔 여자와의 유흥이 꼭 등장했다. 재식이 사업을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의 인생의 목표는 돈이었지만, 또 다른 목표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바람피우는 것이었다. 그는 애초에 미혼으로 연애하는 것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기혼자로서 바깥 여자와의 연애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만 그런지는 몰라도 중동 별로야.“   
   ”그럼 어디가 뜨나요?“

  "차라리 동유럽이라면 모를까."

  "그렇게 전 세계를 상대로 일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돈 구멍 쫓아다니는 거지."

  ”물건은 섬유나 의류 쪽인가요?“

  ”아냐. 안 하는 거 없이 다 해.“     

  동찬은 정재식이 막연히 섬유사업을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듣고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도대체 어떤 업종으로 무슨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요즘은 그래도 섬유 쪽으로 다시 집중하려 한다."

  "한국은 이제 섬유보다는 전자 아닌가요?"

  "그래서 일반 섬유가 아니라 고강도 섬유를 취급하려고. 요즘 내가 관심 있는 건, 특수 섬유 중에 칼이나 총이 뚫고 지나지 못하는 것이 있어. 내열 기능이 있는 것도 있고." 

  "쓰임새가 다양하겠는데요."

  "군납 쪽 뚫을 거다. 방산업체 쪽으로 한 번 성사 되면 크잖냐. 그래서 내가 요즘 별들이랑 골프 좀 치고 다닌다."      

  ‘방위업체’, ‘별들’이란 단어가 동찬의 신경을 거슬렸다. 왜 저 나이가 돼서도 저렇게 모든 것을 만만하게 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재식이 말하는 것이 허황하게 들렸다. 하지만 재식은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늘 일관성이 있는 인간이었다. 재식이 화장실에 가느라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동찬은 크리스털 잔을 들어서 얼음물을 마셨다. 정재식이 아직 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늘 의심스러웠지만 그는 망하지 않았고 심지어 조금씩 성장을 만들어왔다. 재식이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리에 앉았을 때 동찬이 자신의 마음속에 오래 있던 질문을 던졌다.      

  "선배님, 옛날에 나한 상무님이 저를 윤숙이한테 소개해주고 싶어 했단 말, 정말이었나요?

  "아, 그 양반?"

  "진짜 나한 상무님이 저를 한두 번 보고 그런 말씀하셨냐고요? 그날 그 사무실에 윤숙이도 비서랍시고 있었잖아요."

  "야, 십 년 전 일이 기억 나냐?"

  "처음부터 선배님이 나를 연결해주신 거 아니에요?"

  "지금 그게 뭔 소용이야?"

  "아니면…….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제가 회사에서 나와 놀고 있을 때, 왜 선배님 사무실에 불러주신 거예요? 선배님이랑 제가 학교 선후배 관계도 아니었고, 제가 특별한 놈도 아니었잖습니까?"

  "아냐. 그 회사에 있었던 놈들 다들 무식했어. 너는 그래도 안목이라도 좀 있었잖냐. 그리고 세숫대야 훤하고, 어깨 두껍고. 그래서 널 불렀지. 하하."     

  재식은 그러면서 옆을 지나가던 마담의 손목을 잡아 옆에 끌어 앉혔다. 이런 식이었다. 재식이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동찬은 재식과 술을 몇 잔 더 마시다가 기분 좋게 헤어졌다.     

  택시는 아파트 단지 앞에서 동찬을 내려놓고 떠났다. 적당히 차가운 구월의 밤공기가 동찬의 볼을 스쳤고, 아직 남아 있는 술기운 때문인지 볼이 후끈거렸다. 동찬은 집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직진하지 않고 혼자서 단지 주위를 천천히 걸었다. 동찬의 머릿속은 아직 술집에서 하던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정재식이 성공한 사업가로 자신 앞에 나타나자, 동찬은 십 년 전, 자신이 일했던 화학 회사에서 쭉 있었거나, 그도 아니면 자신만의 사업을 개척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주식으로 비유를 하자면 당시엔 화학회사는 가망 없는 주식으로 보였고 방송국 기자 자리는 상종가는 아니더라도 꾸준히 가치가 상승할 우량주처럼 보였었다. 하지만 십 년이 지난 지금 자리의 주가는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반면에 화학 회사 직원이라는 주식의 주가는 많이 올라있었다. 미래 가치를 예상한다고 해도 회사가 훨씬 좋아 보였다. 동찬은 낯선 위치에 적응하느라 애썼던 순간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처음 방송국에 입사했을 때 동찬은 한 달만 버텨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바보가 되기도 하고 경주마가 되기도 했었다. 그렇게 버틴 세월이 일 년이 되었고, 삼 년이 되었고, 십 년도 되었다. 현재의 직장, 인간관계, 재산에 동찬의 땀이 배어들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하지만 동찬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엔 윤숙의 지분이 섞여 있기도 했다. 그것은 함께 살아온 부부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동찬은 자신의 인생에 드리워진 윤숙의 그림자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순간이 있었다. 십 년 전, 방송국이라는 조직 대신 동찬 마음속에 있던 사업 계획대로 밀고 나갔다면 처가의 그림자 따위와는 상관없이 오롯이 오동찬의 성과만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엔 좀 힘들었을지라도 지금쯤 한 몫 손에 쥐고 있을 거 같았다. 동찬은 '재식 선배도 했는데 나라고 못 했을까'라는 말을 속으로 했다. 동찬은 못 가본 길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가슴이 쓰렸다. 이런 막연한 생각은 그야말로 잡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찬은 허황한 상상 속에 있었다. 그러다가 흐릿한 별빛 아래에서 불쑥 동찬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잡놈이네."


  재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한 말이었다. 십 년 전 동찬은 재식을 내심 얕잡아 보았었는데, 그런 재식이 돈 좀 벌었다고 하니 그날 저녁 그가 좀 다르게 보였다. 동찬은 '포기했던 길을 선택했으면 어땠을까'라고 후회하는 자신의 모습에 쓴 웃음을 흘렸다. 

  계속 걷다 보니 동찬의 오른편으로 커다란 어둠의 덩어리가 느껴졌다. 숙직실 외엔 불이 꺼져 있는 P 고등학교였다. 수개월이 지나도록 단비는 김 여사의 집에서 이사 나오지 않고 있었다. 동찬은 다음 날 어머니의 집에 가서 싫다는 단비를 어떻게든 자신이 집으로 끌고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단국이를 김 여사 집에 데리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뒷목이 뻣뻣하게 당겨왔다. 동찬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집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 가장 웃긴 일은 단국이를 두고 벌이는 부부의 대결이었다. 단국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몇 년 전에 동찬은 명절 하루라도 단국이를 할머니 집에 데려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윤숙이 반대하고 나섰다. 윤숙이 김 여사와 연을 끊고 사는 것에 대해서는 동찬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지만, 어린 손자마저 연을 끊게 만드는 것은 동찬도 참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 김 여사는 단국이가 태어났을 때 잠깐 그것도 윤숙 몰래 손자의 얼굴을 본 것이 다였다. 김 여사는 그 갓난아이가 세 살이 되어 뛰어다니도록 아이 얼굴을 못 보고 지냈었다. 동찬은 단국이가 세 살 되던 해에 수개월을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기세로 윤숙과 싸웠다. 그래서 단국이가 명절에 김 여사 집에 갈 수 있게 되긴 하였다. 하지만 유윤숙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뜻을 양보하지는 않았다. 윤숙은 '반반 논리'라는 것을 내세웠는데, 아이의 반은 엄마로부터 온 것이고 나머지 반은 아빠로부터 온 것이니, 공평하게 홀수 연도 명절엔 김 여사 집에 보내고, 짝수 연도엔 단국이를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협정을 맺으면서 윤숙은 동찬에게 무슨 은혜를 베푸는 듯 유세를 했고 동찬은 '이거라도 어디냐'하는 심정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해서 단국이는 할머니, 김 여사의 집에 격년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윤숙이 며칠 전부터 단국이가 감기 기운이 있다는 말을 식탁에서 흘렸다. 그해는 분명 단국이가 김 여사 집을 방문할 수 있는 해였고 이미 설에도 갔었다. 동찬은 윤숙의 말에서 단국이를 김 여사 집에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의도를 읽었다. 안 그래도 추석에 고정적으로 오시던 어른들이 안 오신다는 소식에 우울해할 김 여사의 모습이 동찬의 눈에 선했다. 그런데 손주까지 안 온다고 하면 김 여사가 더욱 낙담할 것이 뻔했다. 동찬은 윤숙이 내놓은 '반반 논리'를 생각하면서 창피한 나머지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한 가족 안에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주장은 아이를 격년으로 할머니와 만나게 하는 우스꽝스러운 약속이나 만들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찬이 생각하기에 남녀평등이란 가정 안에서 행복할 자격이 있음에도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는 여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말할 수 있는 논리였다. 그런데 윤숙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편리에 따라서 그런 논리를 잘도 갖다 붙였다. 새삼 동찬은 윤숙에 대해서 치를 떨었다. 

  어느새 동찬은 자신의 아파트 문 앞에 서 있었지만, 선뜻 집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동찬은 유윤숙을 미워했지만, 동찬에게 배우자에 대한 미움의 감정은 가정을 깨야 할 만큼 절대적이지 않았다. 동찬은 한밤중에 어두운 복도에서 모자란 사람처럼 혼자 키득키득 웃어댔다. 복잡할 것은 없었다. 십 년 전, 돈과 가정, 직장을 한 방에 해결해 주는 종합 선물 세트가 눈앞에 펼쳐졌을 때 그것에 선뜻 손을 내민 것은 동찬이었다. 윤숙은 이혼 법정에 서는 세상의 수많은 여자들과 비교했을 때 그렇게 악처는 아니었다. 윤숙은 가정을 이끌어가는 최고의 파트너는 아닐지라도 최악은 아니었다. 동찬은 자신의 아파트 출입문 문고리를 잡고, 이번 명절엔 꼭 단국이를 김 여사 집에 데려갈 것이고 단비를 데려오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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