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이런 명절
4-1. 이런 명절
구 월 말이었지만 날씨는 여전히 후덥지근했다. 추석 휴가가 앞에 있는 데다가 큰 사건이 없다 보니 사무실엔 나른한 기운이 감돌았다. 몇 시간 전부터 동찬의 손가락은 전화기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명절 앞, 동찬은 하기 싫은 숙제를 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동찬 앞에 놓인 숙제란 친척들에게 전화 대 여섯 통화를 돌리고 다음 날 오전 중에 아들, 단국이를 데리고 김 여사 집에 가는 것이었다. 명절이라고 벌초를 하러 산에 가거나 제사상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사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동찬에게는 명절마다 귀찮고 성가신 일에 시달린다고 생각했다. 동찬은 심호흡을 하고 쉬운 일부터 시작해 나갔다.
"심부름 센터 사람이 면세점에서 산 양주 한 병을 들고 댁에 갈 겁니다."
"뭘 그런 걸"
"명절이잖습니까. 우리 애 잘 부탁드립니다."
"알았습니다."
"연말에 다시 뵙겠습니다."
동찬이 통화한 사람은 아내, 윤숙이 아는 동네 사람으로 구청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그는 단비가 원하는 학교에 배정받을 확률은 오십 퍼센트라고 말했었다. 그러면서 혹시 아이가 'P 고등학교'로 배정을 못 받는다고 해도 실망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P 학교로 전학을 꼭 성사시킬 수 있다고 했다. 동찬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아이가 학교생활 중간에 전학 다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P 고등학교에서 학교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동찬은 자신이 그랬듯 단비 역시 운이 좋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동찬은 그 통화를 끝낸 난 다음 멍한 상태가 되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전화가 스스로 신호음을 냈다.
"형님. 이번 명절엔 아버님이 못 가실 거 같아요. 엊그제 병원에서 폐렴 진단 받으셔서요. 그리고 고개 너머 어른 댁에서 조금 전에 연락이 왔는데요. 내일 못 가실 거 같다고 합니다. 그 집 어른도 몸이 불편하신 거 같더라고요."
"알아들었고.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하지? 내일은 힘들고, 모레 저녁에 내가 당숙 어른 찾아뵙는다고 말씀드려라."
"형, 바쁜 데 일부러 발걸음 하지 마셔요."
"아냐. 오후이든 저녁이든 짬을 만들어 보마."
"그리고 큰어머니한테는 형이 잘 좀 전해주세요."
"그래."
동찬의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이제 이 소식을 김 여사에게 전해야 했다. 동찬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당숙 어른과 고개 너머 삼촌은 종형(從兄)이자 장손이었던 동찬의 아버지와 김 여사 주위를 평생 맴돌면서 종갓집을 지켜주었던 어른들이었다. 동찬은 그들이 팔팔하던 사 오 십 대를 기억했다. 당시 당숙은 버스 운전을 했고, 고개 너머 삼촌은 동네에서 구멍가게를 했다. 명절에 윷놀이나 화투 같은 것을 할 때는 참 재미있는 참가자였고, 싱거운 농담으로 집안 여자들을 웃겨 주는 것도 잘했다. 그리고 동찬을 귀여워해 주었다. 동찬이 고등학교 일학년 때 설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이미 거동을 못 했고 삼 년째 누워있었다. 그 해가 아버지가 살아있었던 마지막 해였다. 그때만 해도 그 작은 산동네 집에 이 십여 명쯤 되는 일가 사람들이 아침부터 몰려 왔었고, 집 안이 협소하다 보니 아이들은 방 안에 있지도 못했다. 아이들은 엄동설한 날씨에도 자기들끼리 마당에서 놀거나 골목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시간을 보냈었다. 그날 동찬이 마당 구석에서 집안 아이들과 놀고 있었는데, 당숙 어른이 방에서 있다가 마루로 나왔다. 당숙은 물끄러미 동찬을 지켜보다가 다가와서 어깨를 신통하다는 듯 잡아보면서 말했다.
"형님과 다르게 어깨도 다부지구나. 인물도 크면 클수록 잘나지고. 이제 이 집은 니가 희망이다."
동찬은 그날 당숙 어른의 목소리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동찬은 왠지 다음 명절부터는 그 어른들을 뵙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잠시 우울해졌다. 그분들이 그렇게 나이 들었다는 것은 동찬 역시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동찬은 김 여사에게 전화 걸기 전에 화장실을 먼저 다녀오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사 화장실 창 너머로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은 후미진 샛강 일부가 보였다. 관리를 받지 않고 마구 자란 잡목과 잡초가 뒤엉킨 덤불이 있었는데, 아직 가을은 먼 이야기라도 된다는 듯 초록색 기운이 절정에 있었다. 이제 열흘만 지나면 초록색의 가장자리부터 노랗게 물 들어갈 것이었다. 그러나 덤불의 초록색 잎은 그런 앞날은 모른다는 듯이 당장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있었다. 동찬은 화장실 창 너머의 덤불이 매우 오만해 보인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동찬이 그렇게 서 있었는데 등 뒤에서 손을 씻는 사람들이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한때는 월급 안 받고 김밥만 먹으면서 일해도 좋을 줄 알았는데. 이젠 아냐."
"모두가 아는 선배님이 아니신데요. 큭큭. 그나저나 이번 보너스는 그냥 차비 수준 아닌가요?“
”좀 얇게 나오긴 했지. 그래도 어디가서 차비 수준으로 받았다는 소리 하면 욕 먹어요.“
연휴를 앞두고 있어서였을까. 평소 회사 내에서 들리지 않을 것 같은 내용의 잡담이 들렸다. 동찬은 장윤호의 목소리임을 알아채고는 어떻게 피해갈까를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동찬의 몸은 이미 돌아서 있었고, 동찬의 눈앞엔 그의 얼굴이 있었다. 장윤호는 평소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재수 없는 미소였다. 동찬을 보는 장윤호의 눈은 언제나 '시험으로 들어온 나는 근본 없는 너와는 다르거든'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물론 장 피디가 실제로 동찬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동찬이 그렇게 확신할 뿐이었다.
장윤호는 동찬보다 이 년 늦게 공채로 입사했는데, 당시 인재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회사 내에 돌았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촬영 보조 아르바이트를 했고 아마추어로 단편 영화를 만들 정도로 제작 경험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드라마 분야에서 제작에 특화된 인재, 감독 같은 감독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입사한 후 몇 년이 지나 자기 색깔을 내기 시작할 때부터 장윤호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그나 다큐멘터리이든 드라마이든 작가 정신을 갖고 작품에 매달릴 줄 알았는데 그도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가 택한 장르도 교양 시사 쪽이었다. 동찬이 그를 아는 이유도, 함께 시사프로그램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피디와 연예인이 참여하여 시사를 가볍고 재미있게 만든다는 취지의 프로그램에서 동찬은 그와 같이 일했었다.
동찬이 처음 방송국 문턱을 넘었을 때, 그가 이토록 오래 보도국에 남아 제 역할을 찾아가리라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동찬은 공채가 아니라 경력직으로 보도국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경력직 입사라는 것이 살펴보면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그 당시엔 몇 사람 정도는 임원의 연줄, 이사회의 추천 등 각종 이유로 공채를 거치지 않고 들어오는 인력이 있었다. 회사 사람들은 동찬이 윗사람의 개인적 추천을 통해 입사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데도 별말이 없었던 이유는, 동찬이 입사하기 이전에도 이런 인력이 여러 명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온 인력들은 모두 들어 올 땐 보도 제작 쪽에 배치되었지만, 일이 년 후엔 짐을 싸서 비제작 부서로 옮겨갔다. 보도국이나 제작부서 특유의 분위기가 그렇게 들어온 사람들이 적응할 수 없는 것이어서, 다들 결국 짐을 싸서 비제작 부서로 옮겨갔다. 기존의 제작 부서 사람들은 그런 이유로 불쑥 누군가가 들어와도 별말 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동찬 역시 주위의 형편없는 기대 속에서 보도국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보도 제작부서에서 십 년을 버텼다. 이제 다른 이들과 출발이 달랐다는 과거에 대한 자의식은 많이 희미해져 있었다. 그것은 단지 십 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이 지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동안 동찬이 흘린 땀과 몸부림치며 살아온 시간이 쌓여서 생긴 자부심이었다. 최소한 동찬은 그렇게 생각했다. 동찬은 교묘히 자신을 깔보는 장윤호 앞에서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묵묵히 사무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동찬은 화장실 앞 복도에서 장 피디를 향해 경멸이 담긴 미소로 대응했다. 그 미소는 조용히 바라만 보던 늑대가 마침내 드러낸 이빨이었다. 그러자 장윤호는 순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놀라서 ‘내가 무엇을 보았지?’ 하는 표정을 보였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에서 사라졌다. 동찬은 휴게실로 천천히 걸어가서 자동판매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들었다.
동찬은 휴게실에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아 천천히 음료수를 마셨다. 동찬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인사담당자가 안내문을 놓고 갔다. 며칠 전에 인사팀에서 말한 올해 말 진급에 필요한 '교육 일정에 대한 안내'였다. 동찬은 안내서를 훑어보다가 비제작 부서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비제작 부서라면 대표적인 곳이 경영지원부서였다. 하지만 비제작 부서라고 동찬처럼 연배가 어느 정도 있는 인력이 마음대로 아무 때가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사 프로그램의 외부 판매를 관리하거나 회사가 운영하는 작은 체육관, 방송인 교육 기관 같은 곳으로는 옮겨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도국에 있으라고 붙잡을 때가 떠날 시기일 것 같았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의 진로에 관한 생각을 오래 하지는 못했다. 전화기 신호음이 다시 울렸고 동찬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동찬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정재식이었다. 동찬은 그를 친구나 선배가 아니라 그저 사회생활 중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 정도로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동찬의 학교 친구들 모두를 합친 것 보다 동찬의 운명에 더 큰 영향을 준 인간이었고, 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의문의 인간이었다. 동찬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신의 운명은 정재식이 짜놓은 그물 안에서 놀아왔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은 마수인지 호의인지 알 수가 없는 그물이었다. 동찬이 재식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거의 사 년 전이었다. 그 이후에는 일 년에 한 번씩 재식이 동찬에게 전화를 걸어와서 인연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었다.
"나, 재식이다."
"선배님. 한국에 계셨군요."
"바다 건너를 매일 나갈 수야 없지. 잘 지냈냐?"
"예. 선배님. 오늘 저녁에 따로 약속 있으십니까?"
"엉? 아니."
술을 함께 할 지인이 없는 것도 아닌데, 동찬은 그 순간 왜 그를 만나자는 제안을 던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동찬은 재식과 회사 끝난 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동찬은 다른 일로 '나한'에서 임원을 지낸 사람을 만난 일이 있었다. '나한'은 동찬의 처인 윤숙의 친척들이 경영하는 회사였다. 그 임원이 정재식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며 한 말은 이랬다. 정재식은 '나한' 선대 회장의 형제 중 한 명의 셋째 부인의 아들이었다고 했다. 당시 집안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나한'에 직접 뛰어들 수가 없었다고 했다. 대신 정재식이 그렇게 대담하게 사업을 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남자로로부터 한몫을 챙겨낸 어머니의 재력이 뒤에 있었다고 했다. 동찬은 이런 사실을 십 년이 넘도록 모르고 있었다. 동찬은 윤숙에게 넓게 보자면 집안사람인 '정재식'에 대해서 아느냐고 넌지시 물었었다. 윤숙은 모른다고 답했다. 어쨌거나 정재식이 동찬을 윤숙과 엮어놔서 어떤 이득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인연의 시작은 동찬이 대학 졸업 후 들어갔던 화학 회사에서 였었다. 정재식은 일 년인지 이년인지 근소한 차로 회사 선배였으나 나이는 동찬보다 너덧 살은 많았다. 당시 그 회사는 기존에 자신들이 하던 사업을 바탕으로 신사업에 진출하면 국내 독점 공급자 위치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그런데도 회사의 임원들은 전도양양한 분야를 외면한 채 기존 제품 생산에만 안주하려 했다. 동찬은 어쩌다 보니 새로운 쪽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편에 서있었다. 회사 내에서 동찬과 함께 일하는 상사가 그쪽이었다. 동찬은 경영학 전공자가 아닌데도 상사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보고서 여러 개를 작성했었다. 그러나 결정의 순간이 오자, 이사들 간의 알력 싸움에서 사장과 특수관계인, 즉 친척 쪽에서 투자하자는 쪽을 몰아내는 일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반대편은 공장에서 있었던 사고의 책임까지 동찬에게 뒤집어 씌웠고, 동찬의 이혼까지 거론했다. 당시 동찬은 자신의 사생활을 들먹이며 자신을 이상한 인간으로 몰고 가는 치사한 짓을 벌이는 쪽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