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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면서...'

2025.02.27 목

by JasonChoi

지금은 없어져버린 집 뒤의 산을 걷는 것을 나는 정말 좋아했다. 아시안게임의 여파로 재개발이 되어 조금 더 편한 산책길이 조성되긴 했지만, 말 그대로 산과 논과 밭으로만 존재했던 그곳은 그 나름대로도 멋들어진 산책길이었다.


집에서 출발하여 산 중턱을 통과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 걸리곤 했는데, 조금 빨리 걸으면 1시간 10분이면 한 바퀴를 도는데 충분했다.

산책을 하는 시간 동안 생각정리도 많이 하고, 친구들과 전화도 하는 일이 많았었는데, 루트를 따라 걷다 보면 꼭 작은 다리 위에서 전화신호가 끊기곤 했었다. 다리 위쪽에는 신호가 아예 잡히지 않는지 다리만 건너면 핸드폰이 먹통이 되었다.


재개발이 진행되며 지금은 그 작은 다리가 없어졌지만, 지금도 그 자리는 신호가 잘 잡히지 않는지 가끔 궁금해진다. 그 다리를 건너면서의 작은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20대 초반의 이야기이다.


산책을 하기 위해 집에서 나와 15분 정도 지났을 때, 정말 친했던 이성친구에게 전화가 왔었다. 당시에는 꽤나 오랜만의 전화였기 때문에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20분 이상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 친구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며 당시에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진 이야기를 시작하였었다. 친구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니 문제의 다리 앞에 거의 도착을 하였는데, 친구의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니 인식을 하지 못하였었던 것 같다. 다리를 건너기 직전 헤어진 이유에 대해 들었는데, 과 선배랑 바람이 나서 헤어졌다게 그 이유였다. 나는 이 친구와 대화하면서 단 한 번도 욕을 뱉은 적이 없었는데, 그 이야기에 너무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육두문자들이 입에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 다리 위를 마침 지나고 있었기에 신호가 끊겨있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친구는 나의 욕들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 다만 내가 화가 많이 난 것은 느꼈는지 다시 연결된 전화통화에서는 진정하라고, 대신 더 화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작은 추억이지만, 이러한 추억들이 꽤나 많이 쌓여있던 나만의 산책길이었기에 재개발 당시에 길이 없어진다고 들었을 때, 정말 많이 우울했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애정을 가지고 좋아하던 길이 지금의 나에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서 그런지 요즘에도 가끔은 그 길을 걷던 생각이 나, 당시에 듣던 음악이나, 자주 전화하던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곤 한다.


'너와는 정말 많은 통화를 하며 그 산책길을 걸었었는데, 그때는 용기가 나지 않아서, 꼭 그 다리를 건너면서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했었는데... 지금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다리를 건너는 순간을 제외한 모든 순간에 널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을 나를 상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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