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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평 Feb 29. 2020

박사님의 속마음

나는 어떤 연구원이 되어야 할까

반(?) 사회적 인간의 자기소개

마음에 드는 박사 또는 연구원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눈치게임이 끝나고 일반과제를 하나 배분받았다. 잘 알지 못하는 박사님의 잘 알지 못하는 주제. 나는 이 연구원에 온 이후로 한 분의 박사님과만 일해봤기에 우리 실임에도 불구하고 그 외 박사님들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끽해야 두 분 정도 식사 몇 번, 간단한 일 몇 번 같이 한 정도. 그리고 드디어 오늘 새 과제 연구책임자인 박사님과 단둘이 식사를 했다.


나는 단둘이 보는 만남을 몹시 어색해하고 또 어색한 걸 죽어라 싫어한다. 어느 정도냐면 대학교 시절 내내 붙어 다닌 동기임에도 졸업 후 만날 때면 '오늘 어색하면 어쩌지'를 맨날 고민했다. 요즘은 우리 실 연구원 선생님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다 같이 수다를 떠는 자리를 벗어나 둘이서 밥이라도 먹고 커피라도 사러가는 순간이 오면 속으론 어쩔 줄을 몰라한다. 물론 겉으론 멀쩡한 척, 연기를 선보인다. 참으로 반(half) 사회적 인간이다.


박사님과의 식사는 본격적인 과제 시작에 앞서 서로에 대해 알아보고 몇 가지 당부를 하기 위한 상견례 자리였다. 박사님은 내 전공이 정보사회학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심 모를 줄 알았고, 모르길 바랐다. 나는 지금도 내 학부 전공에 대해 설명하는 일을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그냥 사회학을 전공했다고 말한다. 글쎄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좋게 말해선 한 우물만 팠고, 솔직히 말해선 하고 싶은 것만 공부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하나의 전공은 여러 세부 전공으로 나뉜다. 나의 원래 전공이었던 영어영문학을 예로 들자면 크게 영문학과 영어학으로 나뉜다. '르네상스와 셰익스피어, 낭만주의시, 현대미국소설, 중세로맨스' 등 텍스트를 읽고 행간의 의미를 느끼고 공부하는 영문학 과목이 있다. '영어어휘분석, 영어문장분석, 영어담화분석' 등 영어학 수업에서는 텍스트 자체를 분석한다. 이에 따라 보통의 영문학도들은 영문학파 또는 영어학파로 나뉘어 한 놈만 팬다. 전공 필수가 아니고서는 서로의 수업에 출몰하지 않는다. 그게 재밌고, 성적도 잘 나오니까.


정보사회학도 비슷하다. 먼저 내가 졸업한 학과 홈페이지에 소개된 정보사회학 정의를 빌려오자면 이렇다.

정보사회학은 정보통신기술의 급속한 발전과정이 사회에 미친 영향력을 분석하여 정보사회라는 현시점의 사회현상에 접근하는 학문으로 말할 수 있다. … 정보사회라는 분석대상에 접근함에 있어 기존의 사회학적 시각을 반영하는 동시에, 스마트폰과 사물인터넷 등 새로운 기술의 영향력을 중심으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한다. 정보사회학의 연구 분야는 크게 SNS와 같은 온라인 네트워크의 영향력, 온라인 공간에서의 독특한 문화적 현상, 해킹, 언어폭력, 사기, 인터넷 중독과 같은 역기능의 진단과 대응 방안의 마련, 정보경제의 측면에서 전자상거래, IT 생태계, 신산업 및 직종, 거시적 측면에서의 정보기술과 국가발전, 세계화 등 광범위한 분야를 포괄한다.


정리해보자면, 정보사회학이란 정보사회의 성격과 변동요인, 전망 등의 거시적 분야와 미시적 현상을 민속 방법론부터 통계적 방법론까지 다양한 방법론을 활용해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설명하는 학문이다. 현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발전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근본적인 관점이 사회학적 상상력이 필요로 하는 사회학이므로 이 학문은 정보학이 아닌 정보사회학이 되었다. 사회구조와 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연구하는 사회학보다 thematic하고 세부적인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설명하기도 참 복잡하다. 그래서 나 또한 전공 편식을 해온 것이다. 정보사회학 수업은 크게 정보 관련 과목(정보와 데이터분석, 조직과 정보체계, 조직정보망구축, 과학기술과 사회변동 등)과 사회 관련 과목(사회불평등론, 일탈과 사회통제, 사회학의 이론과 관점, 사이버사회심리 등)으로 나뉜다. 학부 시절 나는 가능한 사회 관련 수업만 들었다. 그게 재밌고, 성적도 잘 나오니까.


본인 전공에 대한 반쪽짜리 지식으로 웅얼웅얼 설명을 끝내고 나서야 음식을 주문했다. 빅데이터 관련 과제였기에 박사님은 나의 ‘정보’ 사회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확실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정보 ’사회’ 학을 전공했노라 고백한 셈이었다.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었고 허용된 유일한 핑계는 "그래서 석사 세부 전공은 범죄사회학입니다..." 였지만, 이렇게 된 이상 꿋꿋이 카레는 먹고 가야겠다 싶었으므로.


연구원도 입소문을 탄다고요?

사이좋게 닭 가라아게 카레라이스 두 세트를 시키고서, 박사님은 슬슬 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만남에 앞서 작년도 보고서를 미리 살펴보고 온 터라, 연구계획을 어떻게 따라가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쉽게 이해가 갔다. 인상 깊었던 것은 나, 연구원의 역할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이었다. 박사님은 '이러이러한 일에 신경 써주면 좋겠어요'에서 나아가 어떻게 하면 좋은 평판을 가진 연구원이 되는 비법을 전수하려 했다.


지금은 육아휴직으로 잠시 실을 떠난 연구원 선생님을 예로 들었다. 나보다 한참 선배인 C선생님은 석사를 마친 뒤 인턴으로 연구원에 들어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모두가 하기 싫어하는 잡무를 맡았었는데, 그 일마저 자기만의 원칙을 세워 프로페셔널하게 처리했다. 석사가 연구원이 아닌 인턴으로 들어온 것도 신기한데, 귀찮을 법한 작은 일까지 사명감을 갖고 하는 게 대단했다고. 그 모습을 지켜본 주위 박사들은 인턴인 C에게 연구원의 업무까지 종종 부탁하게 되었단다. 그렇게 점차 인정받게 된 C는 과제 연구원으로, 그다음엔 풀 인력 연구원으로, 그다음엔 무기계약직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박사님은 C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선생님 연구원 못 나가게 하려고 박사끼리 과제 기간을 조율해가면서 과제 연구원 계약기간을 이렇게 저렇게 맞추기까지 했어요. 순전히 우리가  사람의 능력을 필요로 했으니까요."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돌아와 동료 선생님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박사님이 C에 대해 이 정도의 호평을 했노라 이야기를 전했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H와 A는 당연하다는 듯 별 표정 변화 없이 대답한다.

“그 쌤 그냥 연구원에서 유명해요. 일 잘한다고.”

“어 맞아 유명해. 깔끔하고 정확하게 잘한다고 유명하지.”

그 사람 대체 무슨 일을 한 걸까. 뭘 했길래 이 정도 평판을 가지고 있는 거지?


앞선 글인 <리서치회사 출신 연구원의 소회>에서 나는 감히 리서치회사 연구원의 덕목을 꼽은 적이 있다. 꼼꼼함과 데이터분석 능력, 글쓰기 능력,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C는 우리 박사님을 비롯한 연구원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네 가지 능력 이상의 어떤 업무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입소문이 나 있었다. 예컨대 부탁하지 않아도 박사가 깜빡하기 쉬운 일정을 잊지 않고 챙겨주는 일, 언제 어디서든 써내야 하는 글을 써내는 일, 완벽하게 맺고 끊어 소통하는 일 등이다. 결국 내가 보란 듯이 뱉어낸 네 가지의 건방은 나를 향해 있었다.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


나는 어떤 연구원이 되어야 할까

여기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안 어떤 연구원이 되어야 할까. 적어도 전공이 맞지 않는다고 불평만 할 것이 아님을 알았다. 짧은 인생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무척 중요하고, 지금의 나를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것은 고용주인 연구원이니까. 그들이 원하는 연구원으로서의 역할을 지금보다 더 잘 해내야겠지. 내가 강한 것은 무엇이고 약한 것은 무엇인지를 간만에 고심해보는 것이 이번 주말의 숙제가 되겠다. 다만 항상 나를 괴롭히는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강박은 잠시 사라져 준다면 좋겠다.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좀 도와준다면 고맙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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