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소설가] 오르한 파묵 - 두 번째 -
"나는 소설이 다른 모험 이야기나 서사시와 구별되는 것은 배후 어딘가에 중심부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 오르한 파묵 [소설과 소설가] 49p -
나는 소설을 쓴다. 하지만 시를 쓰지는 못한다.
나도 쓸려고 해 봤다. 사실 여러 번 쓰기도 했다. 하지만 쓸 때마다 어색한 나를 발견한다. 특히 서정시는 더욱 그렇다. 왜 그런 걸까 궁금했다. 서정시는 감정에 기반한다. 아니 감정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해야 한다. 손은 그저 거들뿐이다. 다만 글로 옮겨야 하는 수작업 때문에 이성이 최소한으로 개입하긴 한다. 하지만 서정시는 자신 안에 차오르는 감정의 손실을 최소화하며 언어로 옮기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정제되고 절제되지만 손실되진 않는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관건이다. 그래서 나에겐 아주 어렵다. 나의 글은 수시로 이성이 간섭하는 탓에 감정에 취한 채로 글을 써나가는 것이 쉽지 않은 탓이다.
감정이 충만해지면 나 또한 시적인 문장들이 떠오르곤 한다. 그런 문장들이 소설과 산문 곳곳에서 드러나곤 한다. 소설과 산문은 기본적으로 이성의 바탕 위에 지어지는 글이다. 소설은 인물과 사건과 배경의 인과관계를 항상 생각하며 써나가야 하므로 더욱 그러하다. 소설에는 종류가 다양하지만 특히 장편으로 갈수록 그것에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장편은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다양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상호 작용해야 하는 복잡한 구조를 띄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편의 집필은 소설가의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장편을 집필했느냐는 작가의 필력이며 또한 이성적 상상력의 용량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시도 소설도 모두 쉽지 않다. 나는 감정에 취하지도 그렇다고 이성적이고 맥락 있는 상상력을 오래도록 지속하는 능력 또한 갖추지 못한 듯하다. 나의 글은 산문에 가깝다. 글을 쓰는 시간이 길어지고 일상의 삶과 관계에서 동떨어진 시간이 길어지면 감수성이 살아나 산문이 시처럼 변해가는 경험을 하곤 한다. 산문시다. 이성의 개입이 많으면 평론이나 비평이 되고 감성이 커지면 산문이 되고 감성에 좀 더 취해버리면 산문시가 된다.
"소설을 쓰는 작가들을 얼마나 나는 부러워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영 이러한 꿈을 종이에 옮길 능력이 없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291 장 -
페소아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는 끊임없이 샘솟는 영감과 글감들을 써내려 갔지만 그건 소설과 시도 아닌 산문이었지만 그 산문은 감성과 이성이 혼재되어 있다. 문학적이며 또한 철학적이다. 그는 신의 자리가 좁혀지고 인간(개인)의 자리가 강해지는 시기를 살았다. 신과 우주의 이야기는 서사시고 개인의 이야기는 소설이다. 페소아는 그 사이에서 신과 우주 그리고 한 인간(개인)을 모두 얘기하고 있다. 서사시도 소설도 아닌 둘 사이 경계선상에 있는 글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산문시가 된다.
디테일하지 않으면서 디테일한 것들을 떠오르게 만드는 마중물과 같은 글귀는 감성을 자극하고 때론 이성을 일깨운다. 내가 그의 글에 빠져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항상 감성과 이성이 충돌하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못하는 망설임을 그의 글 속에서 느끼기 때문이다. 페소아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괴로워하는 듯하면서 또한 그 상태를 즐기는 듯 보인다. 모순을 견디는 것인지 즐기는 것인지 모르겠다.
"실제와 상상을 혼동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을 이해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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