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에 관한 상념
“창작은 가진 것을 잃어야만 비로소 시작된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면 아니 정확히는 소유한 것을 잃어버리면 아니 좀 더 명확하게 얘기하면 소유했다고 여겼던 것들이 떠나가고 사라지면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창작이 시작된다. 창작은 상실의 반대급부이다. 상실의 시대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창작의 시대를 경험할 수 없다. 상실은 창작의 원천이다.
Creator(창작자), 요즘 떠오르는 대세의 단어가 아닐까? AI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모두가 크리에이티브(Creative)해지려 노력한다. 그건 아마도 아직까지는 AI가 넘보지 못하는 영역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AI는 감정이 없고 욕망도 없다. 창작의 원동력이 인간의 감정과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안다면 왜 창작이 AI와 구분되는 인간의 유일한 가치가 되는지가 명확해진다. AI는 인간이 기존에 만들어 놓은 것들을 논리적, 합리적, 수학적, 과학적으로 조합하고 해석하고 분석하는 것에는 능하지만 감정과 욕망에 휩쓸려 무언가를 쓰고 만들고 행동하는 것에는 가치판단을 하지 못한다.
왜냐 창작물의 평가에는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Ai가 아무리 많은 경우의 수를 가진다고 해도 인간의 감정과 욕망이 어디로 어떻게 치닫는지까지 모두 예측하고 분석해 내기에는 아직 인간의 감정 데이터가 부족할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일론머스크가 말하는 인간의 뇌의 시냅스 신경망을 컴퓨터의 랜선과 연결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가능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내가 살아있을 때까지는 그 기술이 나오지 않았음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다.
창작은 소유의 상실이다.
창작(創作)은 창의적인 생각에서 비롯된다. 창작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창조(創造)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창(創)은 창고와 칼이 합쳐진 합성어이다. 창(倉) 창고를 의미한다. 곡식을 저장하는 곳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에게 잉여가 생기고 소유할 수 있는 재산을 축적하는 용도로 만든 공간이다. 그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그 창고에 칼을 가져다 대면 창(創 : Creat)이 된다. 창의(創意)와 창작(創作)과 창조(創造)의 창이다.
창고에 칼을 가져가 다대는 것은 강도들이 하는 행위이다. 누군가를 상하게 하여 소유를 뺏으려는 것이다. 창고의 소유주 혹은 그것을 지키려는 자를 해하거나 죽여야 한다. 그럼 창상(創傷)이 생긴다. 창고에 칼을 대면 상처가 나는 것이다. 칼로 베인 듯이 아린 상처는 아주 고통스럽다. 창상이 깊을수록 오래가며 그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그리고 몸과 마음에 상흔(傷痕)을 남긴다.
진정한 창작은 바로 이 상처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창고의 소유를 모두 잃거나 믿었던 자들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그 상처가 아물고 회복하는 시간에 시작된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이건 모두가 같지 않다. 대부분은 잃어버린 소유를 되찾는 길을 가려 분투한다. 곡간을 다시 채워 넣는 것이다. 이건 실패를 발판 삼아 다시 더 큰 성공을 향해 가는 것이다. 이건 위인이나 부자가 되고자 하는 자이다. 이것 또한 쉽지 않은 길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생각하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는 자들이 있다. 이 길이 창작의 길이다. 이건 세상의 성공과 출세를 향하는 길이 아닌 자신 안에 숨겨져 있던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동안 소유(물질과 관계)로 인해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들을 사라지면서 보인다. 그것들을 언어(문학)로 그림(미술)으로 소리(음악)로 행위(춤)로 표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세월이 좀 흐르고 직업도 가져보고, 사회생활도 해보고, 사랑도 해보고, 이런저런 사람들도 만나보고 서른이 넘어서 그때 시작해도 늦지 않아요.”
얼마 전 어느 문인의 북토크에서 등단 작가의 꿈을 가진 학생에게 작가가 던진 말이 기억났다. 아직 삶의 창상을 경험해 보지 않은 자가 창작자의 타이틀을 다는 것을 우려했던 모양이었다. 지금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크리에이터가 되려고 한다. 이건 창작자라기보다는 유행추종자에 다름없어 보인다. 소유를 잃고 칼에 베어본 시련과 상처 없는 창작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그건 시대가 흐르면 금방 잊히는 것이리라. 유행가는 한 때이다. 하지만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큰 감동과 감흥을 불러오는 노래가 있다. 고전(Classic)이다. 문학도 그렇다. 세월이 가도 그 의미나 가치가 전혀 퇴색되지 않고 더 빛나는 글이다. 아마 우리는 그런 것들에 창작이라는 단어를 써야 하지 않을까? 모두가 작품을 만들 수는 있지만 창작품은 잃어본 자와 상처받아본 자가 만드는 것이다.
“나는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 호기심, 그리움 그리고 사랑, 세 가지라고 말하는데, 이것 역시 감정적 요소들입니다.”
- 나태주 [영혼을 위한 시 쓰기] 27p –
창작은 어쩌면 사랑에 대한 호기심과 그리움을 깨달으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소유에 눈이 멀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알지 못하는데… 이 사랑을 보게 되는 것이 소유가 사라지는 순간부터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 그때부터 사랑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되고 그것이 몹시 그리워진다. 물질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데 현재 채워지지 않은 그곳을 물질로 채워도 또다시 칼을 든 강도를 만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하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아서 그 누구도 탐내지 않으며 빼앗아 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계산적이던 머리가 감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무조건적인 마음에 밀려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창작활동으로 점점 커져간다. 이것이 너무 커져서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어려워질 정도가 되면 비로소 진정한 창작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읽고 보고 들으면서 이비성적으로 눈물 흘리고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떨림을 느끼는 것은 그것을 만든 창작자가 느낀 것이 독자와 감상자에게 전이되는 과정일 것이다. 창작자가 울지 않았는데 독자와 감상자가 울 수 없다. 창작자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계산적으로 만든 것을 볼 때 우리는 똑같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계산적으로 변해간다. 그런 작품도 있다. 우리는 그런 작품을 흔히 제품이라고 얘기하곤 한다. 웃긴 건 제품도 작품도 모두 상품이 되는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다. 그건 우리의 몸에 피가 돌듯이 세상에는 돈이 돌아야만 숨 쉴 수 있도록 만들어진 탓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 말하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논리적이고 계산적으로 진화하고 분화한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는 것이다. 모순이다. 분명한 건 둘이 상충하지만 둘 다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난 어느 쪽도 부인하지 않는다.
나는 창작자의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에 창조론에 좀 더 관심이 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나도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이성적이고 때론 계산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후자의 진화론도 무시할 수 없다. 둘 다 인정하지만 호불호가 나뉠 뿐이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다른 누군가는 좋아할 수도 있지 않은가? 나에겐 원수 같은 누군가도 헌신적인 부모이고 다정한 연인이며 믿음직한 친구일 수 있다. 내가 싫다고 그자를 없애 버리려 한다면 그 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럼 내가 칼을 들고 창고를 턴 강도가 된 것이다. 뭐 그럼 그 털린 자가 후에 창작자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남의 소유를 빼앗은 대가로 절대 창작자는 될 수 없음을 알지 않은가? 그럼 스스로 기뻐하는 법을 알 수 없게 된다. 창작자는 다른 이들에게 칼이 아닌 창작품으로 그가 가졌던 호기심과 그리움과 사랑을 전달하는 일을 하는 자이지 상처를 주고 소유를 빼앗는 자가 아니다.
창작은 상실에서
세상은 창작자를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건 우리가 몸 담고 있는 현실 세계를 위협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창작자는 그저 차가워지는 세상에 작은 불씨를 간간이 던져주며 냉기가 빨리 퍼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자일 것이다. 창작은 다른 이들이 소유를 잃지 않으면서 온기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자가 아닐까? 우리가 창작품을 보고 느끼는 이해와 공감이 그것을 돕는다. 풍요의 시대에 살지만 상실의 느낌을 느낀다는 것은 현재에 감사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소유는 더 많은 소유를 쫓고 많은 다른 가치들을 무시해 버린다.
진정한 창작은 상실과 상처에서 비롯된다. 소유에 칼을 댄 상처를 가져 본 자가 가는 길이다. 그래서 진정한 창작자는 더 이상 소유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