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도서관 북콘서트에서 떠오른 상념
“저는 산문을 쓰는 게 무서워요.”
며칠 전 북토크에서 만난 김숨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소설 말고 산문이나 에세이집을 낼 계획이 없냐는 한 청중의 질문에 했던 그녀의 답변이었다. 그녀의 말은 얼마 전 북토크에서 만났던 최진영 작가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소설가들이 가진 마음의 짐과 두려움 같은 것이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나 또한 이것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소설도 대중과 독자의 비난과 질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허구라는 명분이 있기에 문학적 혹은 예술적 가치로 인정을 받는다.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생각한다. 하지만 산문은 사실과 허구 사이의 애매한 위치라는 것 때문에 작가의 삶과 사상을 의심받게 된다. 사실적 의견과 허구적 상상은 이토록 다른 대접을 받는다. 사실 산문은 사실을 담은 문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작가의 기억은 모두에게 사실이 아니다. 기억은 왜곡되고 변형되기 때문이다. 그럼 허구적 상상인 소설과 그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둘을 철저히 구분하려 한다. 그건 본래 인간이 분류하고 나누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작가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질타와 비난을 최소화하기 위해 쓰는 방식일 수 있다.
김숨 작가는 타인의 이야기를 쓰는 것을 자신의 업처럼 여기고 있는 듯 보였다. 상처받은 자(위안부)들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해외 현지를 직접 돌아다니며 답사와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작가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려 노력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필력 있는 소설가는 대인 감수성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이건 자신 안에 감정과 생각에 더 예민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다. 자신에게 예민하지 않은데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예민함의 양면성
예민함은 자신을 드러내기가 두렵게 만든다. 타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도 비슷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악플과 비난과 지탄을 견딜 실드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가가 견뎌야 할 모순이다. 예민해야만 타인을 잘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지만 삶에서 자신의 대인 관계에도 예민해질 수 있음이다.
그래서 허구라는 장치를 이용한다. 사실이 아니기에 그 비난과 지탄은 소설 속 인물이 대신 받는다. 그녀가 소설만 쓰는 이유이고 작가가 소설을 쓰는 이유이다.
이 과정은 중요하다. 소설가는 소설을 쓰면서 점점 내면을 강화시켜 간다. 예민함을 드러내는 연습이 어쩌면 둔감함으로 가는 과정일 수 있다. 필력은 내공과도 같다. 나도 초창기 글을 쓸 때는 내면의 감정들을 어떻게 타인에게 드러낼지 고민과 우려가 많았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소설이었다. 장편 소설을 3편 정도 쓰고 나니 독후감을 빙자한 산문들이 등장하더니 이제는 책 없이도 산문을 쓴다. 8년간의 글쓰기가 만든 변화이다. 아직도 사실 나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있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소명이 죽는 날까지 쓰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한 톨 남은 불안과 걱정을 모두 쏟아내고 죽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모든 작가는 그런 지향점을 향해 간다고 생각한다.
과거 많은 고전 작가(톨스토이, 아우구스티누수, 루소, 카프카, 토마스 만 등)들이 고백록과 참회록 같은 산문을 남긴 것을 보면 작가는 마지막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기억(변형된)들을 담담하게 털어놓고 가고 싶은 소망이 있는 것 같다. 다만 작가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걸 실현하고 죽는 작가와 그렇지 못한 작가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은 작가가 쓰지만 그것에서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지는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이유리 작가의 말에 공감한다. 북토크에서 MZ 세대 작가의 말이 나의 상념의 불러왔다. 소설은 작가가 쓰지만 결국 작가의 의도와 생각은 독자에 의해서 변형되고 왜곡되며 재창조된다. 이게 산문과는 다른 점이다. 문학에서 소설이 자유 토론을 하기 가장 좋은 소재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다양한 독자들의 머릿속에서 다양한 생각과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어떻게 해석하든 자유이다. 작가는 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것이 문학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독자로 하여금 변형되고 재창조되는 과정이 새로운 생각과 기존의 생각에 변화를 불러오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같은 글을 봐도 다르게 해석된다. 똑같은 내용의 성경도 사람마다 견해와 해석이 다르니 그렇게 많은 교파와 종파가 생겨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성경도 문학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종파에 속한 사람은 정해진 교리를 변형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금기에 얽매이게 된다. 교회의 목사들은 성경을 오역하지 말라며 각자 자신이 속한 교단에서 배운 해석이 맞는 것이라 설교한다. 그래서 종교는 문학이 껄끄럽다. 문학은 독자를 구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믿음으로 구속을, 문학은 상상으로 자유를 부여한다. 아이러니하지만 우리는 구속도 자유도 모두 원한다. 모순이다. 사랑하면 결혼하고 싶지 않은가? 사랑은 구속할 수 그 무엇이지만 결혼은 그것을 틀에 넣어야 한다.
소설가는 모순적이다.
소설을 쓰는 과정은 삶의 기억에 허구와 거짓을 섞어서 희석하고 변형해서 풀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건 구속과 자유 사이에서 갈등하는 문학의 특징이다. 구속에서 자유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세상에 태어나 자신이 속한 틀에 맞춰져 자라고 세상을 경험한다. 그러다 앞에서 설명한 세상의 모순을 견디기 힘들어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혼잣말을 한다. 그 말이 글이 된다. 그 불만 섞인 일기가 소설이라는 틀에 들어간다. 농축된 일기를 물타기 한다. 작가마다 자신만의 포뮬러(Formula: 비율 및 공식)를 가지고 있다. 이 희석되는 과정이 바로 이야기 바다에 풀리는 과정이다. 산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굽이굽이 흐르며 육지에서 유입된 온갖 물질들에 오염 혹은 변형되었다. 그게 바로 나를 만든다. 강 하류에서 바다와 만나는 순간 나는 희석된다. 그리고 바다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이것이 소설의 세계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그리고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도서관이라는 바다이다.
산문은 연어다.
모두 희석되어 나를 잃어버렸다. 작가가 이 희석된 세계에서 농도가 사라지면 그 자신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 나는 그런 작가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글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이익을 대변하고 집단을 대변하는 것이 되어버리면 그렇다. 필력이 세지고 명성이 생기면 그런 유혹이 찾아들게 마련이다. 대중은 유력인사들의 언변력과 필력에 의해 움직이기 곳이 인간세상이다.
다시 자신을 찾아가야 한다. 마치 연어가 다시 산골짜기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듯이 자신이 지나온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고통스럽고 험난한 과정이다. 그 과정 속에 많은 연어들이 시작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나는 산문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 아마도 작가가 연어처럼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는 과정은 자신의 결핍과 아픔을 되돌아보는 힘든 과정이다. 소설가가 산문가로 바뀌는 과정이다. 이 산문이 진정성 있는 삶의 회고와 반성을 품으면 고백록과 참회록이 되는 것이다. 그냥 담담히 써내려 간다면 산문이고 그것이 부끄러워 약간은 서정적 혹은 철학적 표현을 덧붙이면 산문시가 된다.
그럼에도 계속 소설 쓰기로 일관했다면 그건 자신의 예민함을 둔감하게 만들 용기보다는 그 예민함을 끝까지 간직하려는 순수를 지향한 것이리라. 시작으로 돌아갈 용기를 품지 못했음이다. 그들은 육지의 오염이 없는 넓은 바다를 유영하는 자유롭고 정처 없는 영혼이다. 나는 안다. 자신의 산문을 쓰면서도 드러내지 않는 소설가들을…. 그건 용기는 품었지만 자신의 예민함이 아직도 자신 안에 많이 남아 다 덜어내지 못해 그 예민함이 자신을 찌를 거라는 것을 알기에 숨겨두고 있는 것뿐이라는 것을….
작가는 일기에서 시작해서 에세이(이성)를 지나 소설(이야기: 이성+감성)이라는 바다를 거치고 산문(감성)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이 작가가 가야 할 소명의 길이 아닐까….
나도 산문이 무섭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