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500년의 문학과 예술] 우정민 교수 - 2nd -
"그건 아마도 질서가 무너지면 안 되기 때문이겠죠."
강연자(우정민, 덕성여자대학교)가 답했다. 나의 질문이 시작되고 강연자는 무대 한쪽 끝 강연대에서 조금씩 반대편 끝에 앉아있는 나에게로 다가왔다. 질문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은 그 질문이 품고 있는 의미와 깊이를 아는 자만 느낄 수 있는 법이다. 나는 강연자가 1시간 반 동안 청중을 끌어당기며 했던 스토리텔링이 품고 있는 의미의 양면성을 보고 있었다. 그 많은 청중들 중에 몇 명이나 그 두 가지 양면성을 동시에 다 볼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술과 외설이라는 강연 주제가 품고 있는 표면적인 것만 보고 들었다면 나의 질문의 의미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연자는 나의 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간파했고 그 답변 또한 내가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예술과 외설을 판단하는 것은 단순히 선정성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왜 우리 사회는 그토록 예술과 외설의 명확한 기준을 나누려 하고 선정성에 대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려고 하는 것일까요?"
앞의 서론은 잘라내고 내가 던진 질문이었다. 강연자의 강연이 이런 질문을 품게 만들었다. 4주간의 문학예술 강연의 셋째 주 두 번째 강연이었다. 그전 주까지 강연은 모두 강연에서 끝났다. 3주 만에 청중과의 문답의 시간이 주어졌다. 일방적인 강연은 마치 강연자의 한풀이만 듣다 가는 느낌이다. 한풀이를 했으면 들어준 사람의 한풀이도 잠깐 들어줘야 하는 것이 강연자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앞에 진행한 강연자들이 예의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잖은 아쉬움이 남았다. 나는 무언가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접하면 호기심과 질문이 샘솟는 체질이기 때문에 듣고만 가는 주입식 교육은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료 강연이니 군말 없이 들어야 한다. 유료였다면 한 소리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성교하여 불꽃을 존재로 바꾸었다.”
- D.H 로렌스 [채털리 부인의 연인] 중에서 -
강연자는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 (1928년작)이라는 소설에 주목해서 강연을 이어갔다. 1960년대는 영국의 자유와 해방의 시기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예술 문화 방면에 많은 혁명적인 일들이 생겼다. 그 중심에 외설 논란에 휩싸인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있다. 영국의 한 출판사(펭귄)에 의해 대중에 출간(1960년)되면서 법정공방(형사재판)이 벌어졌다. 이것이 출판사의 승리로 예술로 인정받으면서 영국 사회는 문화 인식의 대전환을 맞이한다. 바야흐로 성적 해방과 표현의 자유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 자유와 해방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비틀스 음악이 흥행한 시기(1963년) 또한 그와 때를 같이 한다.
성해방과 자유에 대한 인식의 변환이 가져온 또 다른 이면의 변화는 무엇일까? 영국은 1960년 이후로 탈산업화가 진행된다. 인간의 생각과 인식의 변화는 서서히 그 행동의 변화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기계화와 물질문명에 길들여진 인간이 한순간에 변하긴 쉽지 않지만 문화와 예술은 서서히 그들의 행동에 변화를 일으키고 다시는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마법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사회와 국가는 그 문화와 예술을 간섭하고 또한 통제하려 한다. 그 중심에 예술과 외설이라는 주제가 포함된다.
기계, 건설, 조선, 자동차 같은 중공업 산업을 떠올리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너무 난데없는 질문인가? 그럼 O, X 문제로 드리겠다. 남성이 떠오르는가? 여성이 떠오르는가? 만약 여성이 떠오른다고 하시는 독자분이 계신다면 댓글을 부탁드립니다. 꼭 한 번 이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해보고 싶다. 나는 조선, 자동차, 건설 이 세 가지 업종에서 모두 일을 한 경력이 있다. 그래서 말할 수 있다. 이런 중공업의 국가 기간산업은 모두 남성이 주도한 것이다. 물질문명의 발전, 즉 국가의 부의 증대(GDP)는 역사적으로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뤄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산업혁명(18세기 중반)에서 시작된 물질문명의 폭발적인 성장은 20세기 초까지 유럽에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리고 아메리카로 다시 아시아로 그 주도권이 넘어갔다. 제조 산업 위상에 대륙간 이동이 이뤄졌다. 문화와 인식의 변화를 먼저 겪은 유럽이 손 놓아 버린 것들을 누군가는 해야만 한다. 왜냐 새로운 물질의 생산을 통한 부가가치 창출(자본창출)을 멈출 수 없다. 물질의 생산은 값싸고 말 잘 듣는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지속적인 세계의 물질문명 발전과 물질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나서서 해야만 했다. 지금 산업혁명의 발원지인 영국의 가장 큰 산업은 금융, 보험 및 서비스업으로 바뀌었다. 굴뚝 없는 산업, 재화 없는 산업이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로운 질서와 패러다임의 변화
기존의 질서가 무너진 것이다. 인간의 인식의 변화와 문화의 자유가 기존의 질서에 변화를 일으켰다. 기존에 사람들을 지배하던 관념이 서서히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문제는 세계의 패권 또한 다른 국가에게 넘겨주어야 했다는 점이다. 물질문명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는 원칙은 아직까지 변함없다. 영국과 유럽 사람들의 인식은 물질에서 다른 것으로 가장 먼저 옮겨갔다. 물질의 풍요가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거라는 믿음은 약해지고 정신과 생각의 자유가 인간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빨리 깨치는 자는 항상 희생당하는 곳이 현실이다. 선구자나 선지자는 삶이 고달픈 법 아니던가? 시민의식은 고양되었을지 모르겠으나 약육강식의 국제 사회에서는 물질문명의 발전은 국가 발전의 기반이자 경제성장의 시금석이다. 물질을 손에 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과거(세계 1,2차 대전) 미국의 제조업 부흥이 세계의 공장역할을 함으로써 세계의 패권국가로 성장했다. 그리고 지난 20~30년간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되어 패권국가로 성장했다. 미국과 중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기반은 결국 물질(제조)이다. 지금 미국이 왜 다시 제조강국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중국의 부상으로 기존의 패권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 아니던가. 아직까지도 물질의 힘은 강하다. 뭐 앞으로는 모르겠다.
예술과 외설 사이
선정성이라는 잣대는 폭력성과 중독성이라는 잣대보다도 더 엄격하게 여겨진다. 왜 그런 것일까? 이것을 앞의 역사와 인간의 본성과 연결시켜 설명해 보려 한다. 이건 강연을 듣고 내가 떠올린 개인적인 상념이다. 폭력적인 그리고 중독적인 영화나 예술보다 선정적인 예술에 사회와 대중은 더 많은 논란을 삼는다. 선정성의 중심에는 남녀가 있다.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 연결되어 있다. 그럼 이 선정적인 문화 예술을 통제하려는 것은 어찌 보면 남녀의 본능을 통제하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본능은 이성보다는 감성의 영역에 더 가깝다. 우리는 예술 작품을 이성적으로 감상하진 않는다. 물론 예술 작품을 나처럼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인간도 있긴 하겠지만…. 그것은 작품 자체가 아닌 작품의 배경인 작가의 삶과 시대적 배경과 상황 등의 연관성을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이다. 비평이다.
어쨌든 선정성이라는 기준을 세우는 것은 본능의 해방을 막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영원히 막긴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이 강연을 듣고 난 후 느낀 점이다. 그건 영국의 사례를 봤을 때, 선진국으로 갈수록 사람들의 문화 인식의 변화를 막긴 힘들다. 더욱이 지금처럼 AI 검색으로 거의 웬만한 정보(물을 수만 있다면)에 접근이 가능한 시대는 더욱 그러하다. 그럼 이건 나라마다 국민들의 지적 교양 수준에 따라 시간적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가리고자 하는 것은 다 보게 될 것이라 생각된다. 인간은 원래 숨기고 가리면 더 찾고 파헤치는 청개구리 본능을 지니고 있지 않던가? 지금 나도 그런 심정으로 강연이 끝나자마자 근처 카페에 앉아 사라질 기억을 한자라도 더 쓰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영국이 아니다
앞에서 전개한 나의 상념은 ‘그럼 우리나라도?!’라는 화두를 던질 수밖에 없다. 나는 그것 때문에 강연자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고 강연자는 내가 추측하던 생각에 확신을 보태주었다.
“아, 이런 주제라면 하루 종일 얘기해도 충분하지 않지만, 강연을 마칠 시간이라 간단히 답변드려야 해서… 아쉽네요.”
강연자는 나의 질문의 답변에 앞서했던 말이 생각난다. 맞다. 이 질문은 넓은 화제의 장을 여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이어질 토론은 내가 글로 대신하겠다.
나는 그 질문에 이어 한국과 영국을 비교해 보고자 했다. 모든 사건과 변화에는 그 역사적 환경적 배경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럼 역사를 돌아보자. 영국의 산업화와 한국의 산업화는 어떻게 다른가? 영국은 산업 혁명 이후 100여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산업화가 이뤄졌으며 문화 인식의 변화가 탈산업화의 변화를 일으켰지만 그 또한 40~50년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산업 발전 속도에 비하면 인식과 행동의 변화가 빠르긴 했지만 그래도 점진적인 변화를 거친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어떤가? 한국의 산업화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빠르고 집약적으로 이뤄졌다. 겨우 20~30년 사이에 영국의 100년이 넘는 발전을 따라잡았다. 문제는 인간의 생각과 인식의 변화는 이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깨친 자들은 급진적으로 이 변화를 이끌어 내려고 한다. 이건 이해와 타협 없이 밀어붙이는 것과 같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뛰라고 재촉하는 것과 다름없다. 생각만 앞서는 자들은 그 생각조차 없는 사람들을 기다려 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기려고 한다. 한국의 남녀와 노소가 갈등하고 분열하는 이유일 것이다. 남자는 과거 부모와 학교에서 배운 데로 관습대로 살 수 없는 현실에 억울하고 노인은 배우는 것(변화) 이 어렵고 두려워 화가 날 뿐이다. 물론 승자가 살아남는 세상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승자가 가장 많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 아니겠는가?
수 천 년간 전 세계를 지배해 온 가부장의 전통과 동양의 유교적 가치관이 한순간에 바뀔 수가 없다. 인간은 로봇이나 컴퓨터가 아니다. 프로그램을 포맷하고 새로 갈아 넣을 수 없다. (뭐 일론머스크가 뉴럴링크를 성공시켜 인간의 뇌를 컴퓨터로 연결시키는 날이 오면 가능할지도….)
이 시대적 변화와 흐름을 막을 수는 없지만 변화의 속도는 더 많은 이가 발맞출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저변의 문화 인식 변화가 없는 급진적인 움직임은 혁명(革命) 아니면 전쟁이다. 대화와 타협이 불가할 때 쓰는 최후의 수단이다. 혁명과 전쟁은 반드시 희생양을 낳게 마련이다. 이런 혁명과 전쟁을 원하는 자는 자신과 가족은 피를 흘리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 아니던가?
내가 문학과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읽기와 쓰기 그리고 대화(토론)에 관심을 쏟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비록 느리고 답답하지만 그 누구도 희생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오래고 지난한 과정이다.
이것이 바로 혁신(革新)이다. 문학과 예술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혁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