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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자 말고 반려동물

[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 부산 시민 독후감 응모작(원북원) -

by 글짓는 목수

“내게는 책임져야 할 존재가 있다는 그리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지우를 버티게 했다.”

- 김애란 [이 중 하나는 거짓말] 216p –


모두가 ‘자신을 위해서 살아라’고들 말한다. 하루하루 열심히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렇게 열심히 살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누구이고 또 왜 살아가고 있는지 묻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것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면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허무와 우울이 밀려든다.


인간은 동물과 달라서 육체가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니다. 삶에 대한 정신적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 스스로 죽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만약 누군가 혹은 다른 존재의 삶을 책임지고 있다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 인간은 너무도 나약해서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의지하고 또한 그것을 보살피고 책임지는 가운데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일인가구가 넘쳐나는 시대이다. 그건 인간이 인간에게 너무도 많은 상처를 준 과거의 역사가 차곡차곡 쌓여서 만든 현재의 모습이다. 옛말에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을 쉽게 믿지 말라는 속담이다. 우리는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배신과 상처로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가는 삶을 살아간다. 태어날 때 활짝 열린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과정과 같다. 그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던 빛 마저 닫혀 버리면서 삶이 끝난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서 치유와 회복의 얻고자 한다. 그 존재는 무해한 것이고 또한 나의 보살핌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는 서로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한다.

25년 부산 원북원 선정 도서 [이중 하나는 거짓말] & 부산시민 독후감 공모전


지우와 채운은 용식과 뭉치라는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간다. 둘에게 용식과 뭉치는 유일한 가족과도 같은 존재이다. 누군가에겐 혐오스러울 수 있는 도마뱀과 누군가에겐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덩치 큰 개이지만 두 사람에게는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이다. 또한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할 힘을 주는 존재이다. 가족은 위로받고 의지하는 곳이지만 누군가에겐 상처와 고통의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는 가족이 주는 위로와 의지를 대신할 존재가 필요하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존재가 있다. 말은 인간이 소통을 위해 쓰는 도구이지만 또한 말은 서로에게 상처 주고 또한 서로를 기만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말 못 하는 존재는 오롯이 함께 하는 시간만이 서로에게 믿음을 준다. 그건 동물은 상상의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가족과 떨어져 바쁘게 살아간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가족은 더 이상 나를 위로해 주고 공감하는 존재가 되기 힘들게 되었다. 더욱이 과거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와 아픔이 컸다면 가족은 오히려 고통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가족에게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존재는 누구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또다시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말 못 하는 무해한 존재를 찾게 된다. 그 존재를 통해 나의 존재의 가치를 찾고 의미를 확인하며 살아간다.

반려 동물들

한국, 아이의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들이 넘쳐나는 나라이다. 이건 모두가 관계에서 비롯되는 결핍을 해결하지 못한 자들의 만들어 가는 현상일 것이다. 그것이 반려자가 아닌 반려동물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다행히 반려동물을 키우는 자들은 아이는 가지지 않을지는 몰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인구 증가(출산)에 보탬이 되진 못해도 감소 요인(자살)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보살피고 먹여야 할 존재가 있다는 것이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의 부모들은 어린 자녀들을 보면서 힘든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온 것과 그 대상만 바뀌었을 뿐 그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모두가 홀로 살아가는 일인 가구가 대세가 되어버린 세상에 모두가 홀로 외로움을 달래고 자신의 존재감을 찾기 위해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간다.


반려(伴侶)는 짝의 다른 말이다.


짝짓기라는 말이 있다. 짝짓기는 같은 종족끼리 이뤄지는 행위이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남학생과 여학생이 학기마다 짝꿍을 바꾸는 짝짓기 이벤트를 하곤 했다. 이처럼 짝짓기는 같은 종족끼리 이뤄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같은 종족이 아닌 다른 종족에서 찾는다.


반려동물은 평균 수명이 인간보다 짧아 대부분이라 짝을 먼저 보내야 하는 고통의 순간 피할 수 없다. 여러 번 맞이할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누군가는 그런 짝을 버리기도 한다. 같은 종족은 범죄지만 타 종족은 그렇지 않다. 무해한 존재는 선택권이 없다. 배신과 상처를 줄 수 있는 반려자보다는 반려동물을 선택하는 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나의 집에도 ‘뿌뿌’라고 불리는 반려견이 한 마리 있다. 내가 청년시절 우리 집으로 분양되어 온 아기 슈나우저가 이제는 노견이 되어 걷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이다. 작년 말 오랜 시간 해외에서 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녀석과 재회했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녀석은 나를 현관문 앞에서 처음 마주하고는 얼음이 된 것 마냥 미동도 없이 잠시 동안 나를 응시했다. 녀석의 해마 속에 깊이 묻혀 있던 내가 전두엽까지 올라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 모양이었다. 꼬리를 심하게 좌우로 흔들며 나의 품에 달려들었고 오줌까지 지렸다. 부모님은 녀석이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고 나에게 말했다.

만사가 귀찮은... 바닥과 한 몸이 된 노견 뿌뿌

나이가 들어 힘이 없는 노견이 되었음에도 나를 기억해 내고 흥분과 반가움에 나의 품으로 달려드는 모습은 6년 만에 재회한 나의 부모형제나 친구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 누구도 그렇게 열렬하게 환영하고 나의 품으로 달려들며 반가움을 표현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해외 살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귀국한 나를 약간의 의구심과 걱정 스런 표정으로 맞이했을 뿐이다. 그들에게 반가움이란 나의 존재가 아닌 내가 이뤄내고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에 반응하는 감정인 모양이었다. 내가 금의환향(錦衣還鄕) 했다면 좀 달랐을까?


안타깝지만 인간은 그 존재만으로는 존중받고 환영받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려 발버둥 치면서 살아간다. 그 존재의 가치를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연인에게도 증명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연인도 떠나가는 세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나의 존재만으로 기뻐하며 반갑게 품어줄 수 없다. 하지만 매일 내가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가 있다. 그 존재에게는 굳이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언제나 꼬리를 흔들고 한결 같이 나를 맞이하고 꼬리를 흔든다. 비록 이제는 나보다 더 늙어버려 움직임이 예전 같지 않지만 그 마음만은 예전과 같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쉼 없이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세상 속에서 변함없이 나의 존재를 받아주고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간절해 보인다. 그 존재가 삶을 계속 살게 한다. 과거에는 인간이 반려자였지만 이제는 동물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어쩌면 반려(反戾)하는 반려(伴侶)자 보다 반려동물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반려당할 일은 없을 것이기에….

[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in 별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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