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드 러셀
"힘을 가진 자들은 냉소적이지 않다. 자신들의 사상을 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압제의 희생자들도 냉소적이지 않다. 그들은 증오로 가득 차 있으며 증오란 것은 다른 강한 열정들과 마찬가지로 부수적인 믿음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99p -
믿음이 없다면 냉소적일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냉소적으로 변해가는 것은 바로 이 믿음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마련이다. 이것이 체계화되고 시스템을 갖추면 이념이 된다. 부와 권력이 가공할 힘을 가지면 이념을 만들 수 있다. 부와 권력은 다수를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념도 믿음의 한 종류이지만 믿음이 현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녔을 때이다.
부와 권력과 거리가 아주 먼 자들에게도 믿음은 있다. 그들의 믿음은 불신에 대한 확신과 같다. 그것이 그들이 계속 삶을 지탱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과거엔 자신의 능력과 노력 부족 때문이라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지만 그것이 더 이상 단지 자신의 능력과 노력 부족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순종과 순응의 태도가 아닌 불신으로 가득 찬 증오와 분노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 사회의 양극단에는 공고한 신념과 이념으로 가득 찬 자들과 불신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로 나뉘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들과 떨어져 냉소적인 표정과 태도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들과 같은 시공간에 살지만 그 속에 속하지 않으려는 자들이다. 전자에는 속할 수가 없고 후자에는 속하고 싶지 않다. 감정과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다. 그래봐야 바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력하면 나아지겠지 하는 미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 버렸다.
국가와 사회가 지금 세대에게 가져다 준 삶의 태도이다. 냉소와 무관심이다. 냉소와 무관심은 자신을 지켜야 하는 현대인이 가져야 할 기본자세가 되었다. 그들은 믿음을 의심하는 자들이다.
“저는 저 자신만 믿어요. 그리고 신이나 그 어떤 절대적인 진리 같은 건 믿지 않아요. 그저 다 우연의 일치일 뿐이죠.”
누군가 얘기했다. 무언가 바라던 것이 이뤄지거나 생각지 못한 우연들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자신의 믿음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것일까? 여기서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면 무언가를 따르고 기도하는 미신적인 혹은 종교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사실 믿음이란 자신의 머릿속에 가장 많은 시간 동안 떠올리는 무언가이다. 그것이 특정한 대상일 수도 있고 불특정 한 대상, 즉 관념일 수도 있다. 계속 머릿속에 떠올리는 생각은 믿음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이다.
순종과 복종 사이
믿음은 우연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에 대한 믿음도, 관계에 대한 신뢰도, 삶에 대한 신념도, 정치적 이념도 모두 우연적으로 생겨난다. 자신이 무엇을 믿게 될 줄 알고 태어난 사람이 있는가? 가정과 사회와 국가는 어릴 때부터 특정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그들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믿음과 사상과 신념을 심어주려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 뜻대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부모가 의도한 데로 자라나는 자녀는 없다. 물론 부모와 학교와 사회의 울타리 안에 있을 때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힘없고 연약한 존재는 순종해야만 생존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성도님들, 순종하십시오."
때문에 우리는 오랜 시간 순종하는 것을 강요받아 왔다. 신의 이름을 빌려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 순종하라는 말은 교만하지 말라는 말이지 복종하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복종으로 오인해 왔다.
“복종은 압제의 영속성을 가져다줄 뿐이다. 복종은 창의성을 말살시킨다.”
-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126p –
누군가의 입을 통해 나오는 '순종하라'는 말은 그가 마치 신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 그에게 힘과 권력을 쥐어주는 모습으로 드러나곤 한다. 앞에서 말했듯 이건 마치 주술과도 같아서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게 되고 믿음을 만든다. 순종은 존경과 같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야 한다. 자신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 힘과 권력 앞에서 고개 숙인 채 침묵하고 살아온 자들은 그것에 익숙해져 다른 세계를 알지 못한다. 자신의 세계가 공고한 자는 질문하고 회의(懷疑)하는 자들을 경계하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절대적인 신을 빌려 자신의 입을 통해 말하려 한다. 신이라면 모든 질문과 회의에 답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일까? 회의하는 자는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생각과 태도를 바꾼다. 압제된 본능은 억압되면 될수록 그 폭발력이 클 수밖에 없다. 고농축 우라늄의 파괴력은 실로 엄청나다.
“지식인들이 볼 때 자신들에게 일을 지시하고 대가를 주는 정부나 부자들의 목적이 해롭기까진 않다 하더라도 불합리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약간만 냉소적으로 되면 그 상황에 자신의 양심을 맞출 수가 있다.”
-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_ Oh Youthful Cynicism, 99p -
나는 왜 세상이 냉소적으로 변해가는지에 대한 심증적 판단을 있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언어적으로 풀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답답함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그 답답함을 이 문장 하나로 해결해 주었다.
이 문장이 과거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냉소적이지 못해서 힘들어했던 과거의 내 모습들을 떠올리게 해 주더라. 나는 현명하지 못했다. 선진 국가로 나아가는 현대인이 갖추어야 할 필수 자세를 터득하지 못한 탓에 남들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모양이었다. 이건 사회 초년생일 때는 미친 열정으로 비췄고 적잖은 시간 동안 사회생활을 하면서 모순과 부조리에 만연함을 느끼면서 분노와 증오가 쌓여갔다. 이건 나의 건강을 해치는 일이었다. 화를 품고 사는 자는 단명한다. 니체도 단명했다.
니체는 이것이 낙타에서 사자로 변모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들판을 누벼야 할 사자가 철창에 갇히면 분노할 수밖에 없다. 분노하면 채찍질이 날아들다. 진이 빠져 분노가 사라질 때까지 가둬두고 먹이를 주지 않는다. 여기서 채찍질과 철창은 사회와 조직 속에서 자신을 생각과 행동을 좌지우지하는 관계와 시스템을 의미한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외부의 영향력이다. 그것에 순응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여기서 먹이는 연봉과 승진과 같은 물질적, 지위적 보상이다. 사자가 길들여지면 그때서야 비로소 철창 밖으로 나올 수 있다. 그럼 사람들의 박수 갈채를 받는 무대 위에서 스타가 될 수 있다. 잘 길들여진 사자만이 부귀영화를 누린다. 그 부귀영화는 자신을 조련한 조련사와 서커스 단장에게 더 많은 부귀영화를 가져다 준다. 광대나 마술사가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사자는 무대가 아닌 초원에 있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원래 가진 자신의 고유의 속성을 잃고 세뇌되고 훈련된 부자연스러운 속성으로 살아가야 한다. 자신의 속성을 완전히 잃지 않고 철창 속에 갇혀 죽지 않으려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냉소이다.
니체는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그냥 세상을 마치 놀이라고 생각하고 유희하라고 했다. 그때는 그것을 알지도 못했을뿐더러 알아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아이 같은 마음가짐으로 돌아가 세상을 유희한다는 니체의 발상은 정말 기발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자가 몇이나 될까?
"어른이 철들지 않은 아이처럼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좀 말이 안 되는 거 같네요."
독서 모임에서 여러 번 니체를 다뤘지만 사람들은 초인(우버멘쉬)과 아이의 상관성에 대해서는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니체의 철학을 현실 세계에서 실천하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유토피아는 올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이의 천진난만한 미소 대신 냉소라는 아이들이 절대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을 선택해서 얼굴에 지니게 된다. 현대인의 표정이 왜 그렇게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가? 러셀의 말처럼 불법적이지는 않으면서 다소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그런 일들에 익숙해지면 얻는 보상과 대가를 선택한다. 모든 사람의 양심이 선하지 않은 이유이다. 냉소는 양심을 차갑게 만든다.
"우리네 인간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무엇하나 진짜가 없는 이 서커스의 세계는 인간 현실과는 동떨어진 행복의 세계였다."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중에서 -
영화 조커를 봤는가? 조커는 서커스 광대다. 영화 속 조커는 해맑은 악마다. 해맑게 웃으며 천진한 표정으로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말과 행동을 한다면 영화 속의 미친 ‘조커’와 다른 게 무엇인가? 세상에 냉소와 무관심을 가질 수 없어 아이가 부조리에 대응하는 방식을 마치 파괴적인 놀이로 바꾸어 놓았다. 힘과 권력이 없는데 냉소를 가지지 못하면 벌어지는 현상이다. 미친 사자가 광대처럼 눈을 속여 무대 위에 올라가서 포효하는 장면이다. 그럼 조련사도 관객도 모두 희생양이 되어버리고 사자도 결국 죽는다. 다 죽는다.
"그만해, 이러다가 다 죽어"
그래서 사람들은 냉소적임을 선택했다. 냉소적으로 변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 세계의 부적응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퇴출된다. 직장을 나와서 오랜 시간이 지나 보니 그때 냉소로 일관했던 사람들은 아직도 직장에 잘 살아남았다. 그때 나는 그 이유가 그냥 그들이 참고 견디는 것을 나보다 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참는 것이라면 나도 뒤지지 않는다. 학창 시절 개근상은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8년 동안 끊임없이 읽고 써온 것을 보면 나의 인내가 그들 못지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내게 부족한 것은 냉소였다. 내가 냉소에 익숙해졌더라면 지금의 모습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를 죽은 사상가(러셀)가 알려 줬다. 나는 냉소적인 것이 너무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신념을 가지거나 아니면 증오를 품어야 하는 둘 중 하나에 편입되어야 했던 사람이었나 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니체의 말처럼 아이처럼 사는 것이 가장 유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니체가 러셀 보다는 한 수 위의 철학자라고 보는 것에 나 또한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 나이에 유치해진다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유치한 자를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냉소를 피하면서 현실의 삶을 살아가려면 3가지가 남는다. 그건 순종, 반항, (아이의) 유희이다. 이 세 가지 모두 쉽지 않고 고달픈 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은 냉소를 선택한다.
당신은 냉소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