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신춘 문예]에 응모하며...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지난해 처음으로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아쉽게도 고배의 잔을 마셔야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도전한 등단이라는 관문은 그리 쉽게 열리지 않았다. 과거 7년간 온라인 작가로 써온 글이 만들어준 나의 필력을 증명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직은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다시 1년이 흘렀다. 신춘문예 공모기간이 돌아왔다. 작년에 쓴 잔을 마셨던 소설을 여러 번 퇴고하며 손을 봤다. 그리고 1년 동안 남몰래 써왔던 새로운 소설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중편 1편(동아일보), 단편 9편(동아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한국일보, 매일신문, 경상일보, 부산일보, 조선일보, 국제신문), 총 10편의 소설을 응모했다. 모두 합치면 18만 자(중편 약 5만 자, 단편 약 1.4만 자*9=13만)가 넘는 분량이었다. 책 한 권을 쓰고도 남을 분량이었다.
모두 다른 내용의 소설들이었다. 신춘문예는 같은 작품을 다른 신문사에 응모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추후 확인시 실격처리) 그래서 각 신문사의 성향을 잘 파악해서 그에 맞는 작품을 응모해야 했다. 작년에는 아무것도 모른 체 그냥 생각 없이 응모했지만 이번에 달랐다. 한국으로 돌아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글을 쓰면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면 글을 잘 쓰는 것은 그저 작가의 기본일 뿐이며 글을 어떻게 드러내고 홍보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AI로 만들어진 콘텐츠들로 넘쳐나는 세상이 아니던가? 아무리 좋은 글도 온라인상에서는 그 플랫폼의 성향과 알고리즘에 최적화되어야 노출되고 알려진다.
이건 신춘문예나 다른 문학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을 심사하고 평가하는 기관의 성향을 알아야 한다. 그 몇몇의 전문가와 권위자가 작품을 평가하고 판단한다. 어느 곳이나 작품의 평가는 주관적이다. 플랫폼을 가지지 않는 개인은 그 플랫폼과 주최 측의 성향에 맞춰서 글을 써야 한다. 무명작가가 유명해지려면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구미에 맞춰야 한다. 내가 선호하고 잘 쓰는 글이 그 플랫폼(주최 측)과 잘 맞아떨어지면 금상첨화이다. 운이 따라야 한다. 그래서 좋은 글과 대중적인 글은 같지 않을 수 있다. 작품성과 상업성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이다. 그 시대와 유행에 맞지 않지만 좋은 글도 있다. 그런 글은 시간이 지나야 드러난다. 과거 역사 속 적지 않은 고전 작가들이 그랬다. 어떤 글은 시간이 지나도 어딘가에 묻혀서 드러나지 않는 글도 있다.
글은 발견되는 것이다. 매스컴에서 유명인사(인플루언서)나 연예인들이 소개하는 책은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그들이 순수하게 그 책을 읽고 좋아서 만든 홍보 영상이나 콘텐츠인지는 알 수 없다. 물론 그 책은 분명 잘 쓴 책일 가능성이 높다. 유명인사와 연예인도 자신들의 유명세에 누를 끼치는 졸작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소개하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는다. 잘 쓰는 것은 기본이고 거기에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인플루언서 혹은 유명 플랫폼을 이용해 노출하는 것이 현시대에 글이 퍼져가는 방식이다. 많이 읽히면 그것은 힘이 되고 또한 돈이 된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신춘문예나 문학상을 통해 자신의 글을 알리려고 하는가? 그건 자신의 글이 힘을 가지고 돈이 되길 바라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순문학이라고 하지만 지향하는 바이지 현상(現狀)은 아니다.
글을 쓰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쓸려면 또한 읽어야 함은 기본이다. 투입 대비 보상이 적은 일이다. 여기서 보상은 금전적 물질적 보상을 의미한다. 만약 다른 보상, 즉 정신적 성장과 발전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내가 8년간 계속 꾸준히 글을 써온 것은 그 보상의 기준을 후자로 옮겨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건 쉽지 않은 일이다. 경제적 물질적 보상 없이 오랜 시간 글을 써내려 간다는 것은 경제적 생계 활동을 병행하거나 아니면 경제적 활동을 하지 않아도 먹고살 만큼 여유로워야 가능하다. 나는 전자에 해당한다. 그럼 시간은 경제 활동과 읽고 쓰는 시간만으로도 하루는 부족하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내가 모든 것이 차단된 세상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만약 한국에서 계속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을 했었더라면 이 습관을 형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관계와 수많은 유혹과 자극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일과 글(Reading & Writing)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면 그곳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난 그렇게 쉽게 즐거움과 행복을 찾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것을 유지하려 계속 노력했다. 쉽지 않았다. 한국이라는 환경은 너무도 많은 소음과 유혹과 자극과 시선들이 곳곳에서 시시각각 전해져 온다.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실상 그렇게 살아도 사는데 크게 지장이 없지만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1년 동안 호주에서 생활하던 습관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니 마치 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호주에서는 그것이 자연스러웠지만 이곳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환경이 참 중요하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말과 행동을 바꾼다. 문제는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나에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이 바뀐다는 것이다. 이건 변화가 아닌 변형에 가깝다. 그런 환경이 잘 맞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아닌 것 같다. 그것을 다른 환경에 있어 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만약 그 다른 환경에 나를 가져다 놓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 나는 내가 글을 쓰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매일 이른 아침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삶을 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삶이 단순해지니 글이 써게 되더라. 복잡하고 분주한 삶을 살던 때 글은 없었다. 그런데 글을 쓰니 생각을 하게 되고 생각을 하니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니 삶이 변화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말은 쉽다. 글은 말을 눈에 보이게 하는 행동(실천)이다. 보이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좀 더 어렵다. 인간은 눈에 계속 보이면 생각하게 된다. 말은 휘발하지만 글은 각인된다. 그래서 말은 나를 바꿀 수 없지만 글은 가능하다. 그걸 깨달은 자는 계속 쓸 수밖에 없게 된다. 스스로 성장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만약 누군가 좋은 스승을 만나고 좋은 환경 속에서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피드백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환경이라면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성장하는 법은 쓰는 것이다. 읽고 쓰면 그 효과는 배가된다. 읽고 쓰지 않으면 휘발된다. 읽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쓰는 것이라 생각한다. 왜 일기를 써야 하는지가 이해가 된다. 책에서도 배우지만 우리는 일상의 삶 자체가 배움이기 때문에 글로서 그것을 보이게 하는 과정이 성장의 시작이고 기본인 것이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의 시작도 일기 형식이 아닌가? 나는 독후감과 소설도 많이 쓰지만 그것이 아닐 때는 일기에서 비롯되는 에세이들이 대부분이다. 모든 일상이 글감이다.
글과 삶의 변화
글은 계속 변화한다. 이것이 삶이 변화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1년 동안 썼던 소설들을 신춘문예에 투고하기 위해 다시 퇴고했다. 작년에 쓴 잔을 마신 소설들은 대대적인 수리 보수(각색) 작업을 했다. 올해에 새로 쓴 소설들은 보고 또 보면서 고치고 또 고쳤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독서 모임에서 알게 된 몇몇 지인들에게 인쇄물을 보여주고 조언도 구했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타인은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에서 타인이 필요한 이유이다.
자신의 삶에 부조리한 나쁜 습관들은 좀처럼 잘 고쳐지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 잘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발견해도 고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내 글을 내가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독자가 필요한 이유이다. 모두가 간섭받기 싫어하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고 싶지만 그것이 어려운 것은 그 삶의 방식이 자신에게 올바른 아닌지가 아닌 편한지 안 편한지로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신춘문예를 준비하면서 매일 소설 속에서 살다 보니 현실 감각이 달나라로 가버린 것 같다. 마지막 원고는 신문사를 찾아가 담당자에게 직접 제출했다. 마지막 원고를 넘겨주고 나오니 온몸에 힘이 빠져 걷는 것도 힘들었다. 찾아보니 실제로 달나라에 갔다가 지구로 돌아온 우주비행사도 그런 현상을 겪는다고 한다. 달나라에 가지 않아도 갔다 온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한동안 글 속에 파묻혀 살면 된다.
어쨌든 모든 소설 원고를 보내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다. 모든 자식들을 시집 장가보낸 기분이 이런 것일까? 결혼도 않은 무자녀의 중년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양육기간(집필기간)이 다소 짧긴 하지만 적잖은 시간 함께하며 보낸 시간이 만든 기억은 그것에 대한 애착을 만들기 마련이다. 이게 자녀에 대한 부모의 집착일까? 하지만 미련 없이 떠나보내야 한다. 내 손을 떠난 작품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谋事在人成事在天 (모사재인, 성사재천)
제갈공명이 말했다. ‘일은 사람이 꾸며도 그 일이 이뤄지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만반 준비를 마치고 그가 한 말이다. 모든 것을 준비하고 일을 끝내면 그다음은 할 일은 기다리는 것이다. 미련은 없다. 내 자식(작품)들이 누군가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동안 꽤나 많은 생각과 상상 속에서 즐거웠다. 오랜 시간 글쓰기로 몸은 다소 피폐한 상태가 되었지만 정신은 그 반대이다.
이제 담담히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