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외로움은 나의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상한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외로움에 사무치면 외로움을 잊게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고 즐겨야 하는 일이다. 말은 상대방과의 대화지만 글을 자신과 하는 대화이다. 오랜 시간 나와 대화했다. 그리고 이제야 내가 도대체 어떤 인간인지 좀 알게 된 듯하다. 과거 항상 일과 관계 혹은 무언가 다른 중독 혹은 흥밋거리에만 기웃거릴 때는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할 시간도 그럴 이유도 알지 못했다.
400편의 역사
호주에서의 4년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글을 쓰고 외로움이란 시간을 견디며 내 안에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어느덧 브런치에 400편이 넘는 글을 올렸다. 맥도날드, 도서관, 공원, 카페, 술집, 음식점, 차안, 기차안, 방구석, 길거리 벤치, 쇼핑센타등등 정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곳곳을 누비며 썼다.
맥도날드에서
2019. 7. 27 첫 글을 시작으로 일 년에 거의 100편씩은 업로드를 했다. (개인 블로그에 비공개로 쓴 글까지 하면 600편이 훌쩍 넘는다, 편당 최소 4,000자 이상씩 썼으니 240만 자 넘게 썼다.)
얼마 전 또다시 제10회 브런치북 공모전에 응모하기 위해 과거의 글들을 찬찬히 드려다 보았다. 옛날 글들을 들여다보면서 해마 속에 깊숙이 잠자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전두엽으로 옮겨와 재생하며 이마를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한 동안 당시에 느꼈던 감회 속에 잠겼다. 수많은 글 속에서 나의 삶이 모두 녹아있음을 느꼈다.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
- 정영욱의 저서 제목 -
3년 동안 해마다 브런치북 공모전에 응모했지만 번번이 쓴잔을 마셔야 했다. 이번에는 사실 기대도 하지 않았다. 기대가 있든 없든 결과는 똑같았다. 이제는 결과가 나를 흔들지 못한다. 나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의미 있기 때문이다. 이제 글쓰기는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기에 내 글이 더 알려지고 더 많이 읽히기 바라는 희망보다 내가 계속 썼고 쓰고 있고 앞으로도 쓸 것이라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게 된다.
비록 내 글이 출판사와 편집자들이 선호하는 글은 아닐지라도 끊임없이 읽어주는 한두 명의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계속 쓸 것이다. 다만 삶 속에서 해결해야 할 경제적, 물리적 상황들을 해결하는데 쏟아야 할 시간들도 소홀히 할 수 없기에 글쓰는 시간이 줄어듬이 못내 서운할 뿐이다.
외로움이라는 특권
세상은 외로울(고독의) 시간을 그리 많이 허락하지 않는다. 외로운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방구석에 앉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한다고 상상해 보자. 나라도 경제도 멈춰버릴 것이다.(그럼 지구는 다시 살아날지도...) 그래서 돈벌이가 아닌 글쓰기 혹은 예술을 하는 자들은 항상 외로움 속에 놓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호주머니가 가벼워지면 사람을 만나지 않는 법이다. 외로움은 외로움을 낳지만 그 속에서 나를 만난다. 그래서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쓰는 것이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가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쓰고 계속 외로운 것이다. 그래서 외로운 작가들이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을 더 잘 아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간을 돈과 글로 바꾸는 삶
시간을 돈과 바꾸는 것보다 시간을 글과 바꾸는 것이 더 소중해질 거라 생각지 못했다. 돈도 안 되는 일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했다. 지금은 돈이 안 되는 일의 가치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질의 풍요보다 정신의 풍요가 나를 더욱 나답게 살게 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야 하는 글쟁이는 돈도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하다. 그렇기에 시간으로 돈도 사고 글도 산다. 삶이 무거운 자는 더 많은 시간을 돈을 사는데 써야 할 것이고, 삶이 가벼운 자는 좀 더 많은 시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이곳 브런치에서 글을 쓰는 많은 작가님들이 바라는 것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시간과 글을 바꿔서 돈을 벌고 더 많은 시간을 글과 바꾸는 그날이 오기를... 그래서 등단과 출판 그리고 베스트셀러의 꿈은 모든 작가의 꿈이다. 물론 등단을 하고 출판을 한다고 생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글로 먹고사는 작가는 글 쓰는 사람의 10%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 만큼 외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것 또한 누구에게나 무한정 허락되지 않는 특권이기도 하다.
"모든 경험은 백 개의 부분, 백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중 하나를 취한다... 나는 그것을 최대한 폭넓게 그리려 하지 않고, 최대한 깊게 파고들어 가려한다."
- 프랑스 철학자, 미셀 드 몽테뉴 -
나는 글을 쓰면서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과거의 글들을 들여다보면서 나만의 글쓰기의 패턴과 방식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나만의 문체가 생겼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건 이런 류의 문체는 출판사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수많은 공모전에 떨어지면서...) 그렇다고 문체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글을 읽고 쓰는 과정에서 당신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수전 티베르기앵 [글쓰는 삶을 위한 일 년] -
문체는 작가를 대변한다. 문체가 곧 작가인 것이다. 글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자아를 바꾼다는 것은 글을 쓰는 궁극적인 목적을 배반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배반하며 글을 쓰는 작가들도 없진 않을 것이다. 대중성과 상업성을 위해 그럴듯한 생각과 혹하는 생각들로 대체하고 포장하며 그것이 마치 자기인 양 또 다른 페르소나를 만든다. 현실의 삶을 사는 인간들처럼 변해간다. 사실 그런 글은 오래갈 수 없다. 아마 스스로가 버틸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반짝하는 대중가요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길이길이 회자되는 글이 되긴 어렵다.
일상과 행간에서 이야기가 술술술...
나의 글은 일상에서 얻은 인상깊은 경험 혹은 책 속 행간에서 비롯된다. 작은 점에서 시작한 스토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나의 이야기는 서론과 본론 그리고 결론간에 서로 접점은 있지만 그 접점의 상관성에 관해 얘기하자면 그리 대중적이진 않다. 대중적이지 않기에 많은 선택을 받진 않는 듯하다.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글과 현상의 이면에서 글감을 찾고 글을 쓰면서 글이 또 다른 글을 만들어내며 스토리가 이어진다. 그러다 보면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이리저리 상념과 잡념이 섞인 상상의 세계를 탐험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마다 항상 알 수 없는 기대감을 가진다. 내가 쓰지만 내가 뭘 쓰게 될지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기대감이 내가 계속 글을 쓰는 동인이기도 하다.
블루투스 헤드폰에서 울려 퍼지는 감성적인 음악이 나와 주변을 비물리적으로 격리시키면,
편도체가 음악에 반응하며 나의 감정 상태에 변화를 일으킨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르면 나의 해마와 전두엽(전전두피질) 사이 시냅스 간 빠르게 신경정보들이 오고 가며 이마가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면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떠오른다. 그럼 나는 그저 대뇌피질의 운동신경이 보내는 신호에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서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되고 처음 올린 글은 서평 ["누구나 기성세대가 된다", 90년생이 온다]이었다. 그전부터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었지만 초기에는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몰랐기에 일단 읽었다. 그리고 읽은 것을 썼다. 거기에 나의 삶을 가미하는 에세이와 독후감 사이를 오고 가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턴가 낯선 호주의 삶 속에서 과거 한국에서의 삶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야기에 빠져서 어느 순간부터 두 개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논픽션(칼럼, 에세이, 서평)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논픽션을 계속 쓰면서도 픽션에 대한 갈망이 마음 한구석에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작년 남몰래 코로나가 한참 성행하던 시기였다. 물리적 격리의 시간 동안 쓰다만 소설 초고들이 컴퓨터 하드 속 곳곳에 남아 있다. 다시 그것들을 이어가 보려 한다. 다시 잘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그냥 나의 해마와 전두엽이 시키는 대로 써보려 한다. 또 다시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속에서 또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이 튀어나올지 나도 알 수 없다. 그냥 쓰고 싶다.
경계에서 사는 자
소설가 박상우는 그의 책 [소설가] (서평참조)에서 '소설가는 경계에서 살아가는 자'라고 표현했다. 나는 이제 그 말이 이해가 된다. 소설가는 현실과 비현실(상상)의 두 세계 사이를 끊임없어 오고 가며 삶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도 상상도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할 수 없다. 그렇기에 어느 한 곳에도 발을 깊이 오랫동안 들여놓을 수 없는 것이다. 몸은 현실을 살아야 하고 정신은 비현실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현실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상상력을 잃어가는 동안 소설가는 현실감을 잃어가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세상은 갈수록 메말라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소설가들은 현실과 소외된다. 그렇기에 더욱더 비현실의 세계를 넓혀가야만 하는 숙명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창작활동은 비현실(허구)을 가장한 현실을 비추고 있음을 소설가는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이 현실의 구체적인 행동 요령, 즉 예를 들면 연말정산 때 어떤 서류를 준비해야 하고 개인사업자 등록은 어떻게 하고 절세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같은 구체적인 경제활동이나 소득증대 활동이 아닌 현실 세계를 관통하는 추상적인 의미와 맥락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을 잘 알지만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소설가의 삶이란...
좌도 우도 아니고 흑도 백도 아닌 경계에 서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싹이 트고 여리고 연한 잎이 볕과 바람을 견디며 짙어지듯, 사람도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 색깔이 짙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색깔 없이 좌도 우도 아닌 경계를 살며 두 세계를 관조한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완전히 치우치지 않는 삶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다. 소속되지 않고 구속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아야 사물과 현상의 정면과 이면 둘 다를 제대로 볼 수 있다.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양면을 다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세상은 항상 한쪽에 서서 다른 쪽을 보는 사람들로 인해 논쟁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소설가는 논쟁과 전쟁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말과 말이 만들어내는 갈등과 불화를 피해 이렇게 홀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언어는 현명하게도 혼자 있음의 두 측면에 대해 각기 다른 언어를 남겼다. 혼자 있음의 고통에 대해서는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혼자 있음의 영광에 대해선 고독이란 단어를..."
- 폴 틸리히, 이준영 [일코노미] 중에서 -
과거 블로그를 뒤져봤다. 2018. 3. 27, 울산의 변두리 어느 한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처음으로 남긴 독후감을 발견했다. [1코노미]라는 책을 읽고 쓴 나의 첫 독후감의 주제는 다름 아닌 외로움(고독)이었다.
그렇게 5년이라는 외로움과 고독의 시간이 흘렀다. 많이 썼다. 그리고 지금도 쓰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쓸 것이다. 의미 있는 시간이었고 또 이 글들을 보는 누군가에게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