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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Sep 23. 2019

소설가의 삶이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이름만 들어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도 독자층이 두터운 일본 작가이다. 사실 난 무라카미의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다. 과거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가 유행하던 시절, 왠지 이 책은 읽지 않아도 가지고 있으면 낭만적인 사람으로 보일 것 같던 때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난 낭만보다는 잠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두툼한 두께가 베개로 이용하기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난 활자 기피증이 심했다.)

                            

  이 책을 집어 들게 된 건 순전히 소설가로서의 글쓰기는 어떨까라는 단순한 호기심이 발동해서였다. 그런 호기심이 책장을 한 장 두 장 넘겨가면서 공감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연한 영감이 운명을 바꾸다!?


   그는 와세다 대학의 연극학부를 졸업하고 7년간을 아내와 재즈카페를 운영하다 우연히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야구배트에 맞은 2루타 안타 소리에 불현듯 소설을 써야겠다는 다소 황당한 계기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듬해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다. 어느 문단에도 소속하지 않고 소속되고 싶지도 않은 외로운 혜성처럼 등장했지만 근 40여 년간 쉬지 않고 집필한 소설 발명가이다.


  그는 공인 소설가로서의 사회적 역할이나 문학의 종류나 문단의 시선 등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나름 꾀자 기질이 다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평생 소설을 써온 사람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 기나긴 집필을 끊임없이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남들이 뭐라 하든 그냥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것이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그냥 쓰면서 즐거우면 그걸로 좋지 뭐"

                                      - 무라카미 하루키 -

                       

무라카미는 쓰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다. 그 즐거움은 자신이 쓰는 소설 안에서 스스로가 여러 가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이루지 못하는 삶을 그 소설을 쓰는 순간에는 철저히 소설 속 인물이 되어 다른 삶을 살다가 오는 것이다. 일반인은 현실세계에서의 한 가지 삶만 살다가 생을 마감하지만 소설가는 여러 가지의 삶을 살다가 가는 것이다. 그 여러 가지 삶을 세상에 남겨 놓고 떠난다.

                                      

"소설가는 여러 가지 인생을 살다 간다"

                                           - 글 짓는 목수 -

                            

  다른 이의 삶에 심취하고픈 욕망 때문일까? 그는 장편 소설 집필에 가장 큰 애착을 가지고 있다. 영문 문학 번역이나 단편소설, 에세이는 그저 장편 소설을 쓰기 위한 몸풀기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다. 장편소설을 집필할 때는 장기간 해외에 머물며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자신의 소설의 세계 속으로 빠져든다.

                  

 그 역시 대단한 독서광이었다. 다독이 다양한 소재를 만들어 낸다. 그의 끊임없이 샘솟는 스토리의 원천은 다독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온 꾸준한 독서 속에서 다양한 소재가 탄생하고 자신의 정신세계와 융합되어 새로운 스토리들이 만들어진다.


뭘 쓰지?

                    

  나 또한 글을 쓸 때 항상 고민되는 부분이다. 도대체 뭘 써내려 갈 것인가? 결정장애 증후군이 발동하기 시작한다. 난 이전에 책상에 앉아 하얀 백지 화면에 깜빡이는 커서만 한참을 바라보다 노트북을 덮은 적이 적지 않다. 그만큼 뭘 써야 할지 결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 중의 하나가 서평이다. 일단 소재가 선정되었니 나의 감상과 책 속의 문구들을 상기하며 나의 생각을 덧붙이기만 하면 되니까 한결 수월하다.

                         

  하루키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아무것도 쓸 것이 없다는 것이 더 자유롭다고 한다. 일단 시동이 걸리면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처럼 멈추지 않는다. 자유롭게 거침없이 적어 내려가는 것이다. 느낌 가는 데로... 나 또한 근래엔 서평을 적을 때 그런 경험을 자주 한다. 책 속의 한 가지 주제를 놓고 내 생각과 경험을 무한정 써내려 간 적이 많다. 그때는 시간이 가는 줄도 힘든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써내려 간다.

                                    

"글을 쓰다 보면 때론 내가 글을 쓰는지 글이 나를 쓰는지 헷갈린다"

                                                                                      - 글 짓는 목수 -

                           

  다 쓰고 나서 다시 보면 나도 놀랄 때가 있다. 내가 이 주제에 대해 이렇게 할 말이 많았던가? 때론 이야기가 너무 삼천포로 빠져서 대규모 공사가 불가피하다.


외국어는 문장을 간결하게 만든다

                        

나는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모국어로 글을 쓰면 기교를 부리려고 고민을 하게 된다. 의미 전달의 명확성보다는 의미 전달의 화려함에 더 신경을 쓰게 되어 때론 전달하려는 내용이 모호해질 때도 생긴다. 하지만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쓰면 어휘량이 부족하여 의미 전달에 집중하게 되어 글이 간결해질 수밖에 없다.


몸과 정신의 균형이 중요하다

            

그는 30년이 넘게 매일 달리기나 수영을 한 시간 정도 해왔다고 한다. 육체적인 운동과 지적인 작업의 일상적인 조합은 장기간의 집필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다. 뛰어난 소프트웨어(Software)는 내구성 좋은 하드웨어(Hardware)에 담겨야 그 가치가 오래가는 법이다. 이런 하루키의 모습은 현실세계에서는 아주 절제되고 현실적인 삶을 살면서도 소설 속에서 현실에서 자신이 할 수 없는 삶을 그리면서 그 욕구를 분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학교인가 공장인가

                       

  그의 에세이에서 학교에 관한 글이 유독 눈에 띈다. 전체적인 글의 흐름과는 달리 다소 생뚱맞은 챕터인 듯싶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학교 교육에 대한 날 선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교사 부모님 밑에서 자랐지만 주입식 교육 속에서 성적으로 순위가 매겨지는 학교 생활은 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나 또한 과거 선생님의 강압 와 체벌(거의 폭행 수준?!)의 공포 속에서 주입된 기억들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학교 교육은 학교 다닐 때만 그리고 오직 학교 안에서 생존하기 위한 행동규범(매뉴얼?!) 같은 것이었다.

                       

   그는 학창 시절 읽었던 수많은 책들(영문 원문 소설을 즐겨 읽음 - 영문 번역가의 기틀을 다진), 들었던 다양한 음악, 여학생들과의 데이트 등이 그의 상상력과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지금 소설의 소중한 소재가 되었던 것이다. 참된 교육의 중요성이 다시금 상기되는 부분이다. 모든 아이들에게 상상력과 창의력을 심어줄 순 없어도 빼앗아 가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다.

                                   

"나를 위한 나만의 글을 쓰라!"

                         - 무라카미 하루키 -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한다는 것은 의미 있다. 그 누구가 사라지면 그 의미 또한 사라진다.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를 위한 것이라면 지속 가능한 일이 될 수 있다. 나의 내면 밑바닥에 있는 것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이야 말로 진정으로 자신을 드려다 볼 수 있는 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나만의 정체성이고 경쟁력이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관을 표현하고 스스로 업그레이드하면서 시간의 경과와 함께 사람들 정신 속에 기억되면서 오리지널이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아닌 그 사람의 인생관을 드려다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일본인이지만 일본 사회와는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사람인 듯 보인다. 그가 만약 일본스런 소설을 썼다면 세계 각지에 그 많은 독자들을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으리라. 그의 소설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간다.


  소설가의 직업으로 살아간다는 건,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삶이 가능한 직업이 아닐까? 그 방식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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