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17 (개정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목은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바짝바짝 타들어간다. 빨리 모이스처 써플라이(수분 공급)가 시급하다. 일어서려니 어지럼증과 동시에 발목의 찌릿한 통증이 밀려온다. 그냥 기어서 방문을 열고 냉장고로 향한다. 군생활 중 배운 포복자세는 술 마신 다음날 요긴하게 쓰인다.
"잘~ 한다~ 술이 떡이 돼가꼬"
"벌컥~벌컥~"
엄니의 잔소리는 들은 체 만 체 1.5리터 물 한 통을 다 마실 기세다.
"캬~~ 이제 좀 살 것 같네, 내가 어떻게 집에 온 거지?"
"기억 안나나? 새벽에 누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이까 니 술이 되가 문에 기대서 쳐 자빠져 자고 있더구만, 누가 데리고 온기고? 그 시간에?"
"헉!?"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순간 끊겼던 필름들이 하나씩 이어지기 시작한다. 1차로 포차에서 마시고 2차로 노래방을 간 것 같다. 편의점에서 들러 맥주를 사서 가방에 넣고 갔던 것 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리고... 그리고
"아~! 몰라~ 아이고 두(頭)야~ 근데 볼때기는 왜 이리 아픈 거지?"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핸드폰의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뭐지?, 헉!"
[야! 희택~ 너 다신 나랑 술 먹잔 소리 하면 아주 죽어~, 술도 못 마시는 게 오기만 살아가지고는... 너 담에 만나면 내가 가만 안둬~! 각오해~ 너 때문에 내가 늙는다 늙어~ 휴~ 그리고 니 술값 내놔! 4만 원 $$은행 : 123-456789-1818]
큰일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리고 간 밤에 그녀로부터 온 부재중 전화가 10통이 넘게 있다. 지금 전화를 하면 욕이 난무할게 뻔하다. 일단 시간을 두고 잠시 잠수를 타야겠다. 그래도 오늘이 공휴일이라 다행이다. 직장인은 뭐니 뭐니 해도 주말과 붙어있는 공휴일을 사랑한다.
'그런데 내가 오떡이 한테 전화번호를 알려줬었나?'
"띠리리 띠리리"
갑자기 전화가 울린다.
"야~ 살아 있냐?"
"어~ 산지! 네가 이 시간 웬일로 전화를 다했냐, 그리고 살아있냐니?"
"어젯밤에 오떡이랑 술 마셨다며?"
"헉~ 그걸 네가 어떻게?!"
"어젯밤에 너 사라졌다고 급히 너 전화번호 물어보던데?!"
"정말?!"
"오~ 둘이서 술도 마시고 장난 아닌데~ 둘이 사귀냐?"
"마~ 쓸데없는 소리는 됐고 또 다른 말은 없었고?"
"아니, 전화번호만 물어보고 끊던데... 늦은 시간에 미안하다면서 말이야, 나도 너한테 전화하니까 너 전화 안 받더구먼, 근데 나중에 오떡이가 너 찾았다며 문자가 왔더라"
그러고 보니 산지에게서도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있다. 간 밤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모양이다. 술에 취해 노래방 화장실에서 오바이트 한 기억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다음은... 잔 거 같은데...
나중에 그녀에게서 들은 얘기로는 노래방의 불 꺼진 다른 방에서 팬티만 입고 자고 있었다고 한다. 머리맡에 가지런히 옷이 개어져 있었단다. 그녀는 나를 찾아 화장실이랑 건물 밖을 다 뒤지고 난리도 아니었단다.
한참 뒤에 빈방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잠도 깨우고 분풀이를 할 겸 나의 소중한 뺨을 후려갈겼다고 한다. 그러나 택시에서 다시 그녀에게 기대 잠들었다. 그녀는 결국 신분증에 주소를 보고 우리 집 아파트 문 앞에 날 버려두고 갔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그녀에게 도전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거다. 세상엔 남자보다 강한 여자도 있다. 그녀는 의리있고 듬직하다. 내 친구들이었으면 또 어디 공중전화 박스 안에 버렸을거다. 그녀는 남자로 태어났었으면 아마 광개토 대왕? 아님 칭기즈칸? 아니 엄홍길이 낫겠다. 산도 잘 타니까
그렇게 그녀와의 산악 데이트는 골 때리는 숙취를 남기고 끝났다.
조선업계는 남자들이 대부분이다 여직원이라 해봐야 열에 한 명 정도도 되지 않는다. 그것도 본사 재무나 총무부서 쪽에 몰려있고 각 공장/사업소에는 대부분이 남자들이다. 간혹 도장(塗裝) 쪽에 중년의 아주머니들이 몇 있긴 하다. 그걸 제외하고는 사업소에는 여직원이 10명도 채 되지 않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여직원들과 업무가 많이 엮여있었다.
그 중 우리 회사에 차도녀 달력 모델 일명 차달모라는 여직원이 한 명 있다. 그녀는 자신의 별명을 모르지만 남자 직원들 사이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몇 없는 여직원 중에 그녀의 외모와 몸매가 출중해서 남자직원들 사이에서 붙여진 별명이다.
사장은 대내외 행사 때마다 그녀를 불러서 귀빈들의 꽃다발 딜리버리를 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달력 모델이라 부른다 정확한 유래를 알 순 없지만 섹시한 주류광고용 달력 속 모델의 모습과 닮아서 인것 같다.
나에게 있어서 그녀는 갑(甲)이다. 갑보다는 내부고객이라고 봐야 하나? 매주 준비하는 임원 주간회의 자료는 각 사업소의 영업부서의 주간 수주/매출 자료 및 그 내역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 자료는 각 영업부서 계원들이 정리를 한다. 그리고 대부분 여직원이다. 그 말은 그녀들의 자료가 빨리 ERP 전산에 입력되어야 내가 빨리 퇴근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중 기계사업부의 그 차달모은 항상 자료 제출이 가장 느린 여직원이었다. 나의 목요일 퇴근시간은 항상 그녀가 쥐락펴락 하고 있다. 처음엔 좀 미안해하더니 나중엔 대놓고 협박이다.
"희택 씨~ 자꾸 조르면 자료 내일 아침에 주는 수가 있어요~"
"제~~~ 발! 그것만은 아니 되어요~, 살려주시옵소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자료 입력을 마치면 그때서야 난 최종 자료를 정리해서 팀장 결재를 받고 출력하고 다음날 임원회의를 위해 회의실에 세팅을 한다. 그러나 목요일에 팀장 대면(對面) 결재를 받아본 적이 몇 번 되지 않는다. 모두 그녀 덕분이다. 대부분 팀장 퇴근 후 통화로 구두보고 후에 회의자료를 세팅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또야!~ 희택아~ 자료 취합이 왜 이렇게 늦어"
"아 그게 기계 사업부 자료가 아직…"
"참~나! 한두 번도 아니고 미리미리 얘기를 해서 자료를 취합했어야지 그것도 핑계라고... 아이고"
그녀 덕분에 목요일만 되면 도다리에게 깨지는 게 일상이 되어 간다.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오늘도 도다리에게 한바탕 깨지고 회사에 홀로 남았다. 이제는 이 불합리한 갑을(甲乙) 관계를 청산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아니~ 도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해도 해도 너무하시네, 아침부터 그렇게 신신당부를 드렸는데도 아직도 자료 정리가 안됐다는 게 말이 돼요? 한두 번도 아니고"
"헐~ 저도 업무 할 거 많아요, 왜 이래요! 희택 씨 본사 자료 만들어 주려고 여기 있는 거 아니거든요. 정 급하시면 직접 와서 정리해 가져가시던지요"
"아니 ~ 그런 이건 그쪽이 해야 할 업무가 아닙니까?"
"난 모르겠고요~ 그건 희택씨 사정이고요"
난 목에서부터 끌어오르는 뜨거운 마그마가 머리끝까지 치솟더니 드디어 장엄하게 폭발하고 말았다.
"야!! X@#$%&$"
나는 회사에서 쓰지 말아야 할 육두문자를 수화기에 대고 날려 버렸다. 다행히도 사무실엔 나 혼자밖에 없었다.
그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실수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나 자신이 미워진다. 역시 난 아직 아마추어인 게 분명하다. 프로의 길은 멀고도 험하구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속으로 얼마나 다짐을 했던가? 수많은 상사의 갈굼과 부당한 대우, 욕설에도 꿋꿋이 버텨왔던 나였다. 그런데 말단 여직원 한 명으로 나의 굳은 신념이 산산이 무너져 내려버렸다. 여자는 때론 남자의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을 정도로 무섭다.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해졌다. 다음날 임원 회의 자료가 준비되지 않았다. 일단 늦은 시간 도다리에게 연락을 취해 상황을 보고하고 기계사업부 실적을 뺀 자료가 세팅되었다.
아침 임원 회의가 끝나고 도다리가 붉긋붉긋한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온다.
"희택~ 이리 와봐!~"
"예~"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냐? 일 처리 이따위로 할래 자꾸? 회사생활 이제 2년이 다 돼가는데, 아직 회의자료 정리도 안 되냐? 그 따위로 하려면 집에 가!"
"죄… 죄송합니다."
두 손을 뒤로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로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모습이다. 그의 기관총에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다. 아침부터 나의 총살로 부서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기계사업부를 찾아갔다. 차달모는 뭐가 재밌는지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연신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모니터 옆으로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이내 나의 시선을 피해버린다.
"잠깐~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내가 왜요?"
그녀도 말이 짧다. 처음은 다 그러니까 이해한다.
"어제 일도 있고 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전 희택 씨한테 더 이상 할 말 없는데요!"
"부탁입니다. 잠시만... 다른 사람들 눈도 있으니 조용히 밖에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
"싫은데요!"
또 방어벽이다. 이젠 한 번 부셔봤으니 경험을 살려야겠다.
"에~이, 제가 정말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노여움 푸셔요~ 보희씨~ 제가 실수에 대한 보답을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난 맘에도 없는 애교 모드로 검지와 중지로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건드리면서 사무실 밖으로 밀어냈다. 그녀는 나의 보답이라는 말에 혹했는지 나의 두 손가락에 연약하게 밀리는 척 밖으로 나간다.
"제가 그 말 듣고 제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아요?!"
'화는 내가 내야하는 거 아닌가!?'
"아~ 정말 미안해요, 제가 잠시 돌았었나 봐요, 잠시 미친개가 물고 지나갔다고 생각해주세요"
"그건 그렇고, 그래? 뭐예요 그 보답이란 게?"
본색을 드러낸다. 그런데 나도 일단 그녀를 끌어내려 별 생각없이 던진 미끼였다. 그런데 덥석 물어버린거다. 순간 머릿속에 나의 CPU와 메인보드 그리고 메모리칩이 빠른 속도로 협업하며 아이디어를 구상한다.
"사실~ 괜찮은 친구가 하나 있어서요, 보희씨 남자 친구 없다고 하시던데..."
"아~ 소개팅이예요?"
"뭐 그런 셈이죠 하하하"
"음... 난 소개팅에 별로 관심 없는데... 근데 누구예요?"
관심이 없는데 누군지 물어온다. 이건 없던 관심이 지금 바로 생겨난 것인가? 그녀는 소개팅만 수십 번을 한 걸로 회사에 소문이 자자하다. 주변에 남자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한 번씩은 해줬을 거다.
소개팅이 다 시원찮았는지 인연이 아니었다는 변명만 들려왔다. 그녀의 눈은 그녀가 들고 있는 핸드폰의 이름과 같은 것 같다. SKY~ 비록 학교는 SKY가 아닐지언정... 눈이라도
그나저나 빨리 희생양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