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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아픔도 잊게한다

평범한 남자 EP 16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요즘 왜 산행 안 나오니? 얼굴 좀 보고 살자~ㅋ]


그녀의 연락처를 알려면 알 수도 있었지만 바로 연락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등산 동호회 카페에 있는 쪽지 보내기 기능을 사용해 그녀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며칠 동안 답장 없다. 그런데 며칠 뒤 "읽었음"이라는 알림이 나의 보낸 메시지에 표시되어 있다. 그녀가 쪽지를 읽었다. 사람의 심리와 편의를 잘 파악한 유저 인터페이스이다.


[그냥~ 요즘 일이 좀 바빠서...]


답이 짧다. 이 짧은 문장으로는 그녀의 심경의 분석할 수 없다. 철저한 방화벽을 친 그녀의 답장은 나로 하여금 다른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랬구나... 난 또 무슨 일이 있나 했지, 다음 주말에 혼자 황령산에 갈까 하는데 같이 갈래? 내가 데리야키 오므라이스 도시락 네 거까지 싸줄게]


방화벽을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며칠이 또 지나갔다. 만만치 않은 상대이다. 장기전으로 돌입할 모양새다. 마치 베트콩의 게릴라 전을 떠올리게 만든다.


중국집에 짜장면 주문하고 기다리는 기분이랄까? 이미 머릿속은 짜장면의 냄새와 면을 비빌 때 나는 그 질척질척한 촉감을 느끼면서 젓가락으로 돌돌 말아 침이 흥건한 입속으로 투하하고 있다.


[내가 왜?]


짬뽕이 왔다. 배달이 잘못된 것이다. 이럴 땐 어찌해야 하나? 짬뽕이 불기 전에 결정해야 한다. 그냥 먹고 다음을 기약하느냐? 아님 내가 원하는 짜장면을 받아낼 것인가?


[그래도 우리 뽀뽀한 사인데, 만나야지,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내 입술 돌리도~ ]


짜장면을 받아내고 말겠다는 신념으로 다시 한번 방화벽에 마지막 수류탄을 투하했다.

이렇게 한 달 동안 인터넷 쪽지 펜팔이 오고 갔다. 바로바로 오고가는 문자메시지와는 달리

기다리는 설레임이 일상의 활력소가 되는 듯 했다.


정보화 사회는 그렇게 종이와 펜을 대화창과 키보드로 바꾸어가고 있었다.

[야~ 언제? 어디?]


드디어 기다리던 짜장면이 도착했다.


"룰루 루루 룰루 루루"

"희택씨 무슨 좋은 일 있나 봐요?, 요 며칠 표정이 좋아진 것 같아요"

"아뇨~ 좋은 일은요, 웃으면 복이 온다길래, 긍정 마인드로 살려고요 하하하"

"좋아 보여요, 그러니까"

"참~ 미화 씨 이제 곧 품절녀 되신다면서요?"


목요일 저녁이면 본사 대회의실에서 그녀와 다음날 이른 아침에 있을 임원 주간회의 준비를 한다. 각 사업부별 주간 실적 및 이슈사항을 취합해서 A4지 한 장에 요약해서 회장님을 비롯한 임원들 그리고 각 중요 부서장들의 자리에 세팅해 두는 것이다. 회장님을 비롯한 사장, 전무, 상무, 상무보까지의 임원은 별도의 파일 케이스에 이전 자료까지 포함해서 세팅한다. 회의 자료는 각 임원들 지정석에 테이블 안쪽 끝선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배열해야 한다. 군대에서 개인 관물대 각 잡듯이 말이다. 다시 군대로 되돌아온 기분이다.


처음엔 오와 열의 간격을 맞추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하지만 미화 씨의 다정한 지도 덕분에 지금은 미화 씨 없이도 곧잘 준비한다. 그래도 미화 씨는 항상 목요일 저녁이면 같이 남아서 회의 준비를 마무리까지 도와주고 퇴근한다.


"희택씨도 어서 좋은 여자 만나셔서 결혼하셔야죠?"


'미화 씨 같은 여자 있었음 벌써 갔겠죠'


"결혼이 뭐 그리 쉽나요 하하하"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묵혀둔 채 맘에 없는 소리만 내뱉었다.


장남인 사장이 경영권을 잡고 나서부터 임원들의 심경의 변화가 심한 듯 보인다. 회사의 가파르게 올라가던 실적 또한 예전 같지 않다. 사장을 둘러싼 각 사업소장들의 알력 싸움 또한 만만치가 않다.


회의가 끝나면 회의 자료들을 회수하는데 임원들의 회의 자료에는 회의 동안 끄적인 메모나 낙서 흔적들을 볼 수 있다. 회의가 따분한지 회의 자료에 그림을 그리는 임원도 있다. 제조업 임원보다는 만화가의 재능이 있어보인다. 오랜 기간 누적된 회의자료를 보면 각 임원들의 성향이나 관심사 등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중 회사의 양대 실세인 구조물 사업부의 권 전무와 기계 사업부의 김 전무의 세력 싸움은 정말 흥미진진하다. 매출의 70%를 차지하지만 수익성은 나쁜 구조물 사업부와 매출은 상대적으로 적지만 수익성이 좋은 기계사업부는 항상 으르렁대면서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그 가운데에 해외 사업부(내가 처음 입사했던 사업부)의 박 상무가 그 둘을 중재하고 있다.


그 형세가 삼국지의 위촉오를 보는 듯하다. 나는 그 삼국의 난세 속에서 그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럼 나는 나관중인가?


그렇게 조선 산업에 불어오던 순풍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을 즈음 삼국 전쟁의 불씨는 타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울러 나의 사랑의 불씨도 그 시기를 같이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어~ 먼저 왔네? 미안 차가 막혀서..."

"야~ 네가 보자고 했으면 일찍 와야 할 거 아냐?"

"쏘리 쏘리"


짜증 내듯 화내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보이는건 왜일까?

눈에 백내장이 오는 것인가?! 그녀는 안본 사이 좀 야윈 듯 보인다.


"너 요즘 다이어트하니?"

"아니 왜?"

"전보다 살이 빠진듯한데..."

"그래? 요새 학교에서 아이들이 너무 괴롭혀서 말이야"

그녀는 정수리를 내게 들이밀어 보인다. 아이들이 머리털을 잡아당겨서 한 움큼씩 빠져있는 땜통을 보여주며 학생들의 무자비한 공격에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어간다며 하소연한다.


"그런데 뭐 어쩌겠어, 불쌍한 아이들인걸..."

"녀석들이!! 안되겠네 감히 선생님을 내가 확 마!"

"야~야~ 됐어 됐네, 연기하지 말고 어서 출발하자"


연기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

우리는 대학 캠퍼스를 통과해서 등산로로 진입했다. 둘만의 하이킹이다. 그녀는 속도를 내지 않는다. 내 짧은 다리에 대한 배려인가? 우리는 초입의 오르막을 말없이 나란히 걸어 올라갔다.

액세서리 없는 머리끈으로 묶어올린 꽁지머리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찰랑 걸린다. 굳게 다문 입은 유난히 작아 보인다. 이마에선 땀방울이 맺어 흘러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야~ 너 자꾸 힐끔힐끔 볼래?~ 변태 맞구만 이 녀석!"

"아~ 아니 뭘 힐끔힐끔 봤다는 거야?"

"그럼 뭔데?"

"그냥 본 거다, 내 눈으로 보는 것도 죄냐?"


그녀는 나의 대답에 입가에 김새는 미소를 띠며 피식거린다. 그러더니 속도를 올리는 것이 아닌가? 성큼성큼 멀어져 간다. 그녀의 저 긴 다리가 부러울 따름이다. 나도 지지 않으려 그녀를 따라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다.

산악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틈틈이 뒤를 돌아보며 나와의 간격을 좁히지 않으려 달리는 듯 걷는다. 나의 양발의 교차 속도가 빨라진다. 짧으면 횟수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횟수가 많아지면 칼로리와 체력 소모가 커진다.


그녀의 승리다.

승리의 기쁨에 심취했는지 정상 봉수대 옆에 서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어 '달려라 하니'의 포즈를 취하며 기뻐하고 있다.

"야~~ 이제 오니? 남자가 비실비실해가지고 얻다 쓰겠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꾸할 말은 이산화탄소의 과다 배출로 인해 나갈 틈이 없다. 머릿속에서만 맴돌고 있다.

"사진 한 장 같이 찍자?"

"왜?"

"넌 왜 이리 말이 짧냐?"

"싫은데"

"싫으면 시집가던가~"

"푸하하하"


내가 가방에서 디카를 꺼내 보이자.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너나 찍으란다. 그래도 난 그녀와 사진을 찍었다. 단지 내가 좀 더 커 보였다. 그녀가 배경이라서...


"오~~ 맛있는데!"

"글치~ 내가 오므라이스는 좀 하지! 하하하"

"그러게 같이 온 보람이 있네"


우리 둘은 큰 바위에 앉아 조용히 한눈에 들어오는 시내를 내려다보며 내가 싸온 도시락을 하나씩 들고 눈과 입의 호사를 누리고 있다.


"근데... 왜 나온 거야?"

"그냥~"

"접땐 미안했어"

"괜찮아~ 미안한 짓 안 했음, 안 나왔을걸"

"어? ...."


뭔가 미끈한 뭔가가 내 볼을 들렸다가 급히 돌아간다. 난 손을 들어 그 지나간 자리를 가운뎃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지른다. 오므라이스 볶음밥에 쓴 해표 식용유의 미끈함이다. 그제서야 난 그녀의 입술이 왔다간 사실을 인지했다. 이제 서로 주고 받은 사이가 되었다. 기브 앤 테이크는 남녀간의 애정관계에서도 필수이다.

그렇게 우리 둘은 한동안 다 비운 도시락을 손에 든 채 시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려가는 하산길은 더 빠르다. 그녀는 산을 위해 태어난 게 분명하다. 학교가 아니라 산림청에서 일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에게 하산길은 쥐약이다.

등산은 오르막보단 하산길을 더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승무욕에 불타던 나는 그 불문율을 깨뜨려 버렸다.


"아~~악!"


순간 자리에 주저앉았다. 왼발을 접질렸다. 한참은 내려가던 그녀가 뒤를 본다.


"왜 그래?"

"아냐~ 살짝 접질렸어"


그녀는 급히 나에게 돌아왔다.


"으이그~ 그냥 천천히 오라니까, 괜찮아?"

"괜찮아~ 뭐 이 정도야"

"아~~~야"


그녀가 나의 왼발목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는 통에 비명이 내어 나갔다.


"안 괜찮은 거 같은데... 일어설 수 있겠어?"

"응~"

"내 어깨를 잡고 일어서봐,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내가 부축할게"


난 오른손을 그녀의 어깨에 걸치고 일어섰다. 그녀의 넓은 어깨 때문에 내 몸은 그녀의 몸에 가득 포개어졌다. 그녀의 몸의 열기가 나의 몸으로 전도(傳導) 되고 있다. 옷에 배어 나온 그녀의 땀과 나의 땀이 뒤섞여 새로운 냄새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 냄새가 싫지 않다. 눈앞이 하얗다. 그녀의 목선이다. 귀 뒷머리의 연약한 머리카락들이 땀에 젖어 목선 미끄럼틀에 붙어있다.


"야~ 똑바로 안 걸을래? 어딜 보고 있는 거야?"

"어~~ 그... 그래 미안"


마지막 30분간의 하산길은 내 심장만 열심히 뛴 거 같다. 그렇게 우린 한 몸이 되어 이인삼각 놀이를 하며 무사히 내려왔다.


"자~ 이제 평지니까, 걸을 수 있겠지?"

"그... 그래, 고마 ~, 아~야"


순간 그녀의 체온을 떠나기 싫어 다시 고통을 호소했다. 그런 나를 안쓰러움과 귀찮음이 반반 섞인 표정으로 다시 부축해 주었다.

"병원 갈까? 괜찮겠어"

"무슨 병원까지, 소주나 한잔하고 가자, 통증엔 소주지 하하하"

"쯧쯧쯧... 못 말리겠구만"


우린 서로 소주잔을 기울이며 다시 승부욕이 발동했다. 그녀는 나의 잔을 확인한다.


"야 희택! 바닥 깔지 마라~"

"너나 깔지 마~ 근데 너 아까 나한테 왜 뽀뽀했냐?

"난 하면 안되니? 너도 했잖아~"

"그럼 한 번 더해줘 바바!"

"야~너! 맞고 싶니?"

"하하하"


우린 서로 티격태격거리면서도 입가엔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그렇게 술병이 하나둘씩 쌓여가면서 나의 시야가 조금씩 흐려지고 주변 볼륨도 줄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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