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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렝게티 초원

평범한 남자 EP 15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그 사건 이후 동호회 카페 게시판에 한동안 그녀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큰 실수를 한 건가? 아 놔! 그럴 수도 있지 설마 그것 때문에 동호회에 안 보이는 건 아니겠지?'


비록 그녀가 나타나진 않았지만 주말마다 꾸준히 산행을 다녔다. 성실한 나의 동호회 활동으로 카페 등급도 업그레이드 되었다. 나도 산행대장으로 산행 모임을 주최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일상은 평일 지쳐가는 업무와 주말 도피하는 산행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희택아~ 산행 한 번 올려라!"

"산행 번개 모임?!"

"그래, 이제 등급도 올라갔는데… 산행 한 번 쳐야지, 안 그래?"

"바야흐로 단풍이 물들어가는 가을 아이가, 이쁜 신입들 오구로 근교 산행 추진해 바바, 내가 바람 잡아 주꾸마"


이제는 동구가 동호회 활동에 더 심취한 것 같아 보인다. 나보다 더 열성적이다. 녀석은 서글서글한 성격 덕분에 카페에 형님, 누나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활동은 내가 더 오래 했는데 아는 사람은 녀석이 더 많다. 자고로 사회생활은 저렇게 해야 한다.


녀석의 권유에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일단 안전 빵으로 팔공 친구들에게 지원 사격을 부탁했다. 산행 모임 공지 올렸는데 신청자가 없으면 그보다 더 쪽팔리는 경우가 없다.


[야~ 대박이다. 너가 올린 번개 산행 완전 대박인데… 신입들 엄청 몰렸어… 특히 여자 신입들 ㅋㅋㅋ]


최근 회사에 프로젝트 때문에 바쁜 터였다. 동구에게서 온 전화를 못 받았더니 문자가 왔다. 컴퓨터로 인터넷 카페는 들여다 볼 시간은 커녕 핸드폰 볼 시간도 없다.


요즘 계열사 관리 업무에 전사 원가 절감 프로젝트 업무까지 나에게 떨어졌다. 컨설팅 용역업체까지 불러 들려 회사에서 세는 돈을 막으라는 사장의 강력한 지시가 떨어졌다.


사장 직속으로 TFT(Task Force Team)까지 편성해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라 거의 매일 야근이다. 나와 컨설팅 업체 직원들은 매일같이 모여 프로젝트 회의를 진행하고 리포트를 작성한다.


각 현업 부서와 컨설턴트와의 미팅을 주선하느라 낮에는 이리저리 타 부서를 돌아다니느라 저녁이 되어서야 자리에 앉아 밀린 나의 일상 업무를 처리하니 집은 정말 잠만 자는 곳이 된 지 오래다.


'헐~ 이건 또 뭐야?!"


밤 11시가 넘어가고 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와서 씻고 그제서야 컴퓨터를 켰다. 카페 들어가서 나의 산행 공지 게시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번개 산행인데도 불구하고 참석자가 20명이 넘었다. 그 중 반 이상이 신입회원이다. 막중한 부담감이 밀려온다.


"네가 산행 때 잘 좀 받쳐줘!"

"그래 OK~ 내가 후미에서 신입들 잘 챙길게 큭큭큭 산지랑 깔롱, 산도령, 마님도 너의 첫 번개 산행을 축하하려 참석 댓글 올렸네, 걱정하지 마삼"

"응~ 그래, 고맙다"


늦은 시간 동구에게 전활 걸었다. 팔공 친구들도 참석한다. 그러나 그녀는 없다. 한주의 마지막을 산 속의 맑은 공기와 하지 않았다면 회사생활이 더욱 고달팠을 것이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역전으로 모여들었다. 산행에 사람이 많이 모여든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부전역에서 집결한 우리는 무궁화호를 타고 기장을 지나 좌천역까지 동해 해안선을 따라 펼쳐지는 경치를 감상하며 40여 분의 짧은 기차여행을 즐긴다. 신입회원들은 기차여행과 단풍 산행의 두 가지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패키지 여행에 과감히 한 표를 던진 것이다.


'역시 CS(Customer Satisfaction)가 중요하다니까'


완행열차에 몸을 실은 신입회원들은 싸온 간식을 먹으랴, 수다를 떨랴, 창 밖의 비경을 감상하랴 정신이 없다. 난 토요일까지 연속된 근무로 피곤했는지 기차 안에서 잠에 취해 들었다.

드디어 좌천역에 도착했다.


"자~ 반갑습니다. 오늘 달음산에서 여러분의 안전과 낭만을 책임질 산행대장 이몽롱 인사드립니다."

"짝짝짝 짝짝"

"오늘 처음 오신 분이 많으신 것 같아요. 여긴 산과 바다가 보이는 경치가 끝내줍니다. 기존 회원분들께서는 신입분들 잘 챙겨주시고요, 좋은 추억 만들어 가시길 바라겠습니다. 다들 안전 산행하세요!"


나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가족오락관 진행자 비스름한 멘트로 분위기를 띄웠다. 산은 항상 올라간 만큼 보여준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허벅지의 통증이 허리로 올라올 때쯤 조금씩 비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드넓은 동해 바다가 시원한 수평선을 드러낸다. 뒤에선 신입회원들이 이런 장관이 펼쳐지는지도 모른 체 떨어지는 땀과 같이 고개를 땅으로 떨구고 기어 오고 있다. 나의 수족들(팔공멤버)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비즈니스 중이다.


앳되어 보이는 신입 여자 회원 한 무리가 산지와 산도령의 인도를 받으며 올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산도령은 신입 여자 회원들의 가방을 밀어주며 입가에 미소와 함께 뭔가를 계속 중얼거린다. 녀석은 끼가 다부지다. 옆에서 산지는 그런 산도령의 립 서비스의 수혜자가 되고 싶은지 그와 대오를 맞춰 올라온다. 안면이 없는 기존 회원 몇 명은 깔롱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올라오고 동구는 마나님과 오붓하게 올라오는 모습이다.


'동구 녀석~ 후방을 책임진다더니... 마님만 책임지고 있구먼… 지가 돌쇠야 뭐야?!'


"여기 경치가 좋네요, 잠시 쉬었다 갈게요!"

"신입회원인데, 두 분은 체력이 장난이 아니신 듯한데요"

"아~ 네, 저희는 체육학과라서 하하하"

"아~ 어쩐지…"


산 중턱까지 나의 뒤를 바짝 달라붙어 올라오는 두 여자 신입은 올림픽 꿈나무가 분명하다. 삼색 아디다스 줄무늬가 바지부터 상의까지 이어진 트레이닝 운동복을 맞춰입고 조깅화를 신고 왔다. 산행을 왔다기보단 전지훈련을 온 분위기다. 그녀들은 후미를 살피며 산행 속도를 조절하는 나의 페이스에 싫증이 났는지 휴식이 끝나고는 이내 나를 추월해서 올라간다.


"저흰 먼저 올라가 있을 께요~"

"아니 저기?!..."


말이 끝나기가 꿈나무들이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간다.


'참… 나 어이가 없네… (유아인 버전) 뭐 하러 온 거야 쟤네들 이럴꺼면 그냥 지들끼리 가던지'


드디어 정산에 도착했다. 두 팔을 뻗어 하늘을 품에 안는다. 겨드랑이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이 몸을 휘감고 지나간다. 가슴이 뻥하고 뚫리는 기분이다. 사방이 탁 트인 정상에 오를 때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이 느껴진다. 드라마 속에서 누가 하늘을 향해 두 팔 뻗으면 360' 고성능 회전 카메라로 촬영할 때의 장면이 떠오른다.


"와~~~~ 예쁘다!"

"어머머!!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정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네!"


늦게 도착한 신입들은 떨구었던 고개를 들어 사방의 경치를 바라보고는 일그러진 얼굴에 화색이 돈다. 먼저 온 올림픽 꿈나무 둘은 정상석 근처에 앉아 고단백 저칼로리의 닭가슴살 샐러드를 섭취 중이다. 자기들 마음대로… 이미 거의 다 먹은 듯 보인다.


"자~ 산에서 단체 사진 한 장 찍고 식사할게요"


사진 촬영 후 회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식사를 한다.


"오빠~ 이게 다 뭐예요? 와~ 장난 아니다"

"금강산도 식후경 몰라? 산에선 이 정도는 먹어줘야지~안 그래?!"

"와~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그래 어서 먹고 쑥쑥 자라렴~"

"하하하"


산도령과 산지의 화려한 도시락은 둘만을 위한 것이 아닌 듯 보인다. 내가 옆에 가서 한 젓가락을 투하하자


"야!야~ 넌 천국에서 온 김밥이나 먹어~"

"야~ 넘 치사한거 아니가?"


여긴 세렝게티 열대 초원인가? 먹이를 많이 확보한 강한 수컷 사자가 많은 암컷들을 독차지한다. 무리에서 떨어진 수컷은 홀로 숨겨둔 먹이를 먹거나 하이에나처럼 멀리서 주변을 서성일 뿐이다. 혹시 떨어져 나올 혹은 남겨질 먹이 아니 암컷을 기다리며… 난 어느 쪽인가? 난 오늘 그냥 세렝게티 국립공원의 관리인일 뿐이다. 그들의 안전과 생명을 책임지는…


뒤풀이는 화려했다. 20명이 넘는 인원이 고기집 안을 휘저으며 전세라도 낸 듯 시끌벅적하다. 20명을 인솔하고 통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신입회원들은 기존 회원들과 섞여 그들의 동호회 생활에 대한 노하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산도령과 산지는 신입여자 회원들을 앉혀 놓고 썰을 털기 시작한다.


"여기선 최대 반년 안에 쇼부를 쳐야 돼~"

"예?! 무슨 말씀이세요 오빠~?"

"뜸 들이고 간 만 보다가는 원로원으로 가는 수가 있어! 맘에 드는 사람 있음 빨리 들이대고 낚아채서 이곳을 떠야 돼!"

“원로원이요?”

“우리 카페에 노땅 운영진들 많잖아, 그 분들이 다 원로원 멤버들 아니겠니… 이곳 저곳 간만 보다가 그리 된 거야. 신입들 킬러니까 조심들 해라 니들도 간볼지 몰라 큭큭큭”

“하하하 설마요”

"여기 경쟁이 생각보다 치열하다. 나름 얼굴 반반하고 능력있는 남자들은 금방 팔려나간다고 잠시 방심한 사이에… 하하하"

"아~이 선배님도 농담은… 하하하"

"그래 아직 모를 때가 좋을 때지, 그래서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는 거야"


나의 첫 산행 추진은 나름 성공적으로 보인다. 산행 멤버들이 한 명씩 나에게 산행이 너무 좋았다며 감사의 메시지를 던진다. 건너편에 앉은 깔롱은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인다. 취기가 올랐는지 얼굴이 붉그스름하다. 그가 뾰루퉁한 말투로 나에게 말을 건넨다.


"희택아~ 요즘 너희 회사 잘 나가데~ 주식도 많이 올랐더라"

"뭘~ 요즘 조선 경기가 좋아서 그런 거지 뭐"

"좋겠다~ 넌 빵빵한 회사에… 난 아직도 백수에 골방에서 글이나 쓰는데…"

"에이~ 뭘, 너도 금방 좋은 소식 있을꺼야"

"넌 그래도 싱글벙글 산행 잘 다니네"

"어?! 무슨 소리야?"

"너~ 때문에 오떡이는 동호회도 못 나오는데 말이야"

"뭐?!"


깔롱은 비틀거리며 내 옆자리로 옮겨온다.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시비를 거는 건지 푸념을 하는 건지 모를 소리를 하며 혼자 잔을 비우고 있다. 나는 오떡이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너~ 오떡이랑 연락하냐? "

"그럼 하지!"

"오떡이랑 많이 친한가 보네"

"그래 적어도 너보단"

"그래 좋겠네 친해서"

"치… 친하면 뭐 해 맘은 딴 데 있는데"

"…무슨 말이야?"

"걘 너한테 맘 있는 거 같더라. 씨발..."

"…"


'이건 뭐지?!'


순간 허리케인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간다. 그녀가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말을 이 녀석한테 듣고 있는 내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내가 왜 이런 말을 이 녀석한테 들어야 하는지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러면서도 혼자 마음 속에 그녀를 담고 있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녀가 보고 싶다. 그녀에게 직접 듣고 싶다'


사랑은 알 수 없다.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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