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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Feb 12. 2024

빈곤과 부유 사이

발리에서 생긴 일 (Day-5 +)  

“I know not what tomorrow will bring”

(나는 내일이 무엇을 가져다 줄지 모른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1935년 11월 29일 페르난두 페소아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문구이다. 손에 남은 마지막 힘으로 그가 남긴 마지막 글은 ‘모른다’였다. 우리는 살아서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가지고 또 깨닫고자 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깨닫는 것은 당장 내일 아니 잠시 뒤에 벌어질 일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성인(聖人)들이 이와 비슷한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페소아 또한 평생을 사유하고 글을 쓰면서 마지막에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떠났다.

The last sentence of Pessoa

많은 이들이 사람들 앞에서 혹은 스크린 앞에서 혹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이 아는 것과 가진 것을 뽐내듯이 보여주며 나는 당신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며 그러므로 당신이 나를 follow 하길 바란다. 그러면서 또한 follor들이 떠나지 않게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가지며 그들보다 좀 더 우위의 지식과 소유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더 많을 것을 알게 되고 또 가지게 된다. 이것이 성장과 발전의 과정이다. 가진 자가 더 가져가는 법이다. 부익부 빈익빈의 원리는 비단 물질과 금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지식과 교양 또한 마찬가지이다.

알면 알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이는 법이다.  


지식과 교양의 함양, 즉 배움 중에 가장 큰 배움은 누군가를 가르치며 얻는 것이다. 진정한 배움은 내가 배운 것을 타인에게 이해시키는 과정 속에서 얻게 된다. 그런 논리라면 모든 지식인들은 자신에게 배움을 얻는 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 많은 지식의 깊이와 넓이를 가질 수밖에 없어진다고 볼 수 있다. 가르칠 대상이 많아지면 더 넓고 깊은 선행 학습을 필요하기 때문이다. 허투루 가르치다간 자신의 지식과 교양의 짧음 들통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매일 독자들을 위한 글을 쓰는 것 또한 배움의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글쓰기는 항상 작가에서 시작해 독자에서 끝나게 된다. 독자가 없는 글은 성장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 또한 타자를 통해 자신의 발전을 이루는 과정이다. 인간은 누군가가 보고 있으면 신경을 더 많이 쓰게 마련이다. 신경을 쓴다는 것은 더 많이 생각한다는 말이다.


말하기는 특정한 청자들을 확보해야 할 수 있지만 글쓰기는 특정 대상이 없이도 시작(일기)이 가능하다. 작가 자신을 돌아보고 독자로 나아간다.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대상을 향한 말과 글은 하면 하면 할수록 늘어가고 어느 시점이 되면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와 심금을 울리는 글솜씨를 가지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럼 많은 이들이 자신의 언변과 문필을 찬양하고 존경한다. 그럼 자신도 덩달아 무언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때부터 말과 글은 힘을 가지게 된다. 힘을 가지게 된 말과 글은 사람들을 움직인다. 인간이 힘을 가지게 되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그건 재력과 무력과 지력(사고력을 통한 필력과 언변력)이다. 그중 말과 글이 가장 고상한 힘에 속한다.


우리는 돈과 총칼 앞에서 나약해지는 자신에겐 굴욕을 느낀다. 하지만 지력 앞에서 고개 숙이는 행위는 오히려 숭배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배움에 목말라한다. 왜 그렇게 부모들이 자식교육에 열을 올리고  사람들이 왜 학벌과 학력에 목숨을 거는지 이해가 된다. 그런데 과거 역사 속 배움 속에서 깨달음 얻은 성인들조차도 마지막에 ‘무지(無知)’를 말하고 쓰는 것을 보면 지력 또한 재력과 무력처럼 부질없는 것은 아닐까?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무지 속을 살아가는 우리는 항상 더 나은 내일과 미래를 계획하고 희망한다.

Writing in Mcdonald

지금 나는 이른 새벽 어느 시골 동네 맥도널드에 앉아 과거를 회상하며 글을 쓰고 있지만 내일 또 쓰게 될지 알 수 없고 노트북을 덮고 나서 일터에서 오늘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예상은 하지만 그저 예상일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대처할지를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상황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의미를 찾는 것이다. 비록 그 상황이 고통과 고난일지라도 그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만 있다면 그건 더 나은 나를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결국 예상치 못한 일은 벌어졌다.


무난하게 흘러가던 여행이 어찌 좀 석연찮았다. 신의 심술인가?!

Sunrise in Mt Batur

핸드폰이 이상하다. 바투르 화산에서의 경이로운 일출 감상 후 다음 일정으로 온천을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활화산 근처에는 항상 온천이 흐르기 마련, 그럼 등산으로 고통받은 몸에 안식을 주어야 마땅하다. 화산 아래 있는 유명한 온천을 찾았다. 그런데 온천을 즐기다 핸드폰이 온천수에 빠졌다. 그러나 IP68의 방수등급을 지닌 갤럭시 S 시리즈였다. 그런데 온천수라는 미네랄이 풍부한 물은 이 방수등급을 능가하는 힘을 가진 모양이다. 핸드폰이 조금씩 버벅거린다. 어느샌가 핸드폰 화면에 희미한 줄이 하나 생겼다. 시간이 갈수록 터치감이 떨어진다. 집에 도착했을 땐 핸드폰의 화면에 줄이 서너 개로 늘어나 있었다. 그리고 터치감은 현저히 떨어져 컨트롤이 불가능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든 것은 핸드폰 안에 존재한다. 핸드폰이 멈추면 나의 모든 것이 멈춰버린다. 지금까지 여행은 모두 이 핸드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도부터 각종 연락과 결제, 티켓, 사진과 기록 등. 천만다행으로 스페어 핸드폰이 하나 더 있었다. 나는 여행이나 특별한 행사등이 있을 땐 사진 찍기용으로 여분의 핸드폰을 휴대한다. 일상생활용과 사진 기록용 핸드폰 두 개를 사용한다. 그래서 보통 카메라 성능이 더 좋은 폰을 서브로 쓴다.


“삐이익~ 삐이익~ 삐이익~”


내가 메인 폰의 정보를 서브폰으로 옮기려 C-타입 케이블을 꽂았을 때였다. 아직 핸드론 안에 물기가 남아있는 모양이다. 당장 케이블을 제거하라고 한다. 그 전기 충격 때문이었을까?! 화면에 더 큰 줄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이제 아예 터치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젠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버렸다. 멘붕이다.

Out of order

“아놔~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그렇게 숙소에서 한나절 동안 핸드폰을 붙잡고 시름했다. 순조롭고 평화롭던 여행은 한순간 암울한 시간으로 변해가는 듯 보였다. 핸드폰을 붙잡고 있으니 화만 치민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당장 수영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물속으로 뛰어들어 팔다리를 휘저으며 몸 안에 화(火)를 물속으로 발산해 버리는 것이다. 또 하나는 눈을 감고 잔잔한 찬양곡을 들으며 침잠하는 것이다. 수영을 하려니 숙소에 있는 수영장은 가로 3m 세로 4m의 목욕탕 수준의 사이즈로 팔다리를 휘저어 나갈 공간이 없어 보인다. 그럼 두 번째 방법 밖에 없다. 눈앞에 고장 난 핸드폰과 어지러운 것들을 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우고 잔잔한 찬양곡을 튼다. 차를 마시며 창 밖의 먼 풍경을 응시한다. 음악에 조금씩 심취해 갈 때쯤 눈을 감는다. 그렇게 모든 상념이 사라지는 명상의 시간으로 돌입한다. 명상이 잠이 불러왔다. 그렇게 감긴 눈은 의식까지 사라진 꿈 속으로 빠져든다.


눈을 떴을 때 이미 해가 기울어 노을이 지고 있었다. 따뜻한 커피를 끓이고 밖으로 나가 붉은 노을을 바라본다. 평안이 찾아들었다. 내일이면 귀국이다. 오늘을 마지막 밤을 허투루 보낼 수 없다. 서브 폰으로 심카드를 옮기고 필요한 어플만 깔아서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 밤은 우붓 시내를 구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우붓 왕궁으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과 차와 오토바이가 뒤섞인 거리는 활기가 넘쳐난다.

Ubud Palace & ticket

“Hey! Look! Watch this. It’s very good to see”


우붓 왕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던 나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웬 아주머니가 손에 두툼한 티켓들을 들고 서서 나에게 권한다. 30분 뒤에 우붓 왕궁 안에서 공연이 있단다. 100,000 루피아(약 9,000원), 계획에 없던 공연이라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그리고 왕궁 앞으로 가서 안을 들여다보니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공연을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약간의 호기심이 생긴다. 그 아주머니는 어느새 내 뒤를 따라왔다.


“If so, what about this one?”


아주머니는 가방에서 또 다른 티켓을 꺼내 보여준다. 그 티켓에는 불을 뿜는 원주민 사진이 보인다. 여기서 가까운 사원에 또 다른 공연이 있단다. 이 공연이 왕궁 것보다 더 흥미롭단다. 가격은 동일. 같은 시간에 두 공연이 진행된다. 계획에 없던 옵션이 두 개가 생겨나니 어느새 나는 옵션을 벗어난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줌마의 마케팅 전략이 한 수 위다. 나는 결국 그녀의 추천 공연을 선택했고 그곳으로 향했다. 왕궁보다는 작은 사원 안에 나무로 만든 계단식 의자가 사원 중앙을 바라보며 놓여있다. 그 나무 의자 위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둘러앉아 있었다. 공연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원형으로 둘러앉은 남자 원주민들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육성의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악기가 없다. 음악은 오로지 그 원주민 남성들의 목에서 만들어진다. 그 리듬과 음률이 신비롭다. 중독성 있다. 빠져든다. 사람들은 숨죽인 채 그 리듬에 사로잡혀 중앙 무대를 응시한다.

공연

아름다운 여인이 등장한다. 화려한 복장과 요염한 자태로 관객들을 이목을 집중한다. 여인은 쉬지 않고 팔꿈치와 손목 그리고 손가락 관절을 움직이며 관객의 눈을 현혹하는 듯하다. 그리고 왕처럼 보이는 자가 등장한다. 두툼한 풍채와 긴 수염을 가진 남자가 등장한다. 여인의 자태를 보고 여인에게 관심을 보이고 여인은 왕을 의식하며 더 요염한 자태와 손동작으로 왕을 유혹한다. 남자는 힘과 지위로 여자를 취한다. 역사적으로 아름다운 여성은 항상 영웅과 힘 있는 남성의 전리품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 토속 연극 속에서도 이 장면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끝난다면 뭐 전 세계 어디에나 있는 영웅호색(英雄好色) 스토리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원숭이가 등장한다. 마치 손오공을 연상케 하는 모습을 한 원숭이가 여인의 주변을 서성인다. 발리에서 원숭이에 신(하누만 : Hanuman)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원숭이가 여인에게 관심을 보이고 인간 세상에 간섭한다. 이건 아마도 신이 인간 세상에 관여함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인간 세상에는 아직도 인간이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하다. 이런 불가항력의 일들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신이란 존재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전 세계 어딜 가더라도 그들의 역사 속에는 항상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의 존재는 신화와 서사시등의 형태로 기록되어 그들의 정신세계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 신화나 서사시를 가진 민족과 국가가 번성하고 발전하여 힘을 가지게 되면 그 신화와 서사시는 널리 퍼지게 된다. 그럼 그것은 하나의 종교가 되고 그 신화와 서사시는 경전이 된다.


이곳 발리에 와서 느낀 점 중에 특이점을 하나 꼽으라면 이곳 사람들이 타인과 외부인에게 상당히 우호적이고 상냥하다 것이다. 물론 나쁜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한 느낌을 받았다. 그게 무엇 때문일까 발리를 여행하며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들에게 신이란 존재는 모든 사물과 존재에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힌두교는 신이 아주 많다. 신의 눈을 피할 곳이 없는 것이다. 그들의 모든 말과 행동은 업보(Karma)가 되어 모두 쌓이고 쌓여 결국 심판을 받는다. 양심에 거스르는 일들은 모두 업보가 된다고 믿는다.

제당

발리섬 곳곳에는 사원뿐만 아니라 식당, 가정집에 제당(작은 탑) 같은 모셔놓고 매일 그곳에서 기도를 한다고 한다. 그들은 양심에 어긋나지 않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매일 신에게 기도하며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려는 연습을 하려는 것이 아닐까? 자신과 가족을 위한 기도에는 분명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건 업보가 되어 자신 혹은 가족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치열한 경쟁과 승자독식의 세상 속에서 머물던 우리에겐 삶은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 전쟁터는 타인(적)을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는 곳이다. 나와 내 가족이 살아남고 행복하기 위해선 타인의 희생과 헌신을 담보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뒤를 보지 않고 이웃과 주변을 신경 쓰지 않으며 앞만 보고 달리고 또 올라간다. 그들을 밟고 또 그들을 이용하며 성공만을 쫓는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건 무엇 때문일까? 우리는 결과, 즉 성공과 승리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성공과 승리의 과정을 간과했다. 왤까? 빠른 성공과 승리를 원하기 때문이다. 너를 밟고 올라가면 가장 빠르다. 너와 내가 계단을 같이 만들어서 올라갈 수 도 있지만 그걸 만들고 기다릴 시간은 없다. 시간을 견디지 못함이다. 전쟁이 길어지면 안 되는 이유이다. 전쟁은 속도이다. 장기전은 승자나 패자 모두에게 득이 될 것이 없다.

Ubud 시내

공연이 끝나고 우붓 시내의 밤거리를 걸었다. 꽤 늦은 밤이었지만 거리는 화려한 조명과 신나는 음악 그리고 술과 음식을 즐기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 밤의 여흥을 만끽하고 있다. 화려한 조명 아래 길가에는 어린아이들이 구걸을 하고 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호주머니의 동전 몇 닢을 건넸다. 잠시 뒤 도로가 인도 위에 젖을 드러낸 앳된 아이 엄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내가 그 옆을 지나갈 때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표정이 없다. 여인은 옆에 바구니에 담긴 허접한 부채를 들어 보인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지갑에서 지폐를 한 장 꺼내 여인에게 건넸다. 그러자 없던 표정이 생겨났다. 돈의 위력이다. 돈이 넘쳐나는 이곳에 빈곤도 넘쳐난다. 빈부는 항상 같은 곳에 함께 존재하며 서로를 더욱 부각한다.


그때 갑자기 발리의 해변에서 보았던 붉게 타 들어가던 석양이 떠올랐다. 하늘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였던 그 빛은 강한 어둠이 다가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발리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 뒤에는 분명 그만큼의 추한 빈곤이 함께 존재한다. 발리가 아름다운 것은 그만큼 많은 고통을 품었기 때문이리라.  


빈곤과 부유 사이를 걸으며 발리의 마지막 밤이 깊어 간다.


Sunset in B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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