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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Feb 04. 2024

외국어와 모국어 사이

발리에서 생긴 일 (Day-4)

"잡념이 사라지는 곳,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땅에서 평화를 느낀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에서 -


해외여행의 매력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모국어에서 벗어나 나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서로 다른 언어 속에 뒤섞인 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상황을 답답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해외(자유) 여행이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언어의 장벽을 회피하기 위해 가이드의 깃발을 따라다니시는 분들도 있으시리라. 물론 그런 여행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로지 휴양을 위한 여행이라면 오히려 그 편이 나을 것이다. 현지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과 낯선 상황들을 모두 대신 해결해 주시는 그분들이 있어 익숙함에 머물며 낯섦을 간접 경험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나는 간접보다는 직접 여행을 선호한다.


쌍방이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서로 소통을 하면 생기는 현상 중에 하나는 서로가 의사 전달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럼 모국어에서 느끼는 잡다하고 복잡한 뉘앙스나 느낌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모국어에 너무 익숙해서 모국어의 단어 하나하나 그리고 어조와 문장의 끊김과 호흡 등에서도 상대의 미묘한 감정들을 캐치해 낼 수 있을 만큼 예민하다. 하지만 서로가 모국어가 아닌 관광지 공용어(영어)를 통한 의사소통은 그런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다. 그리고 서로가 모국어가 아니기에 서로의 의사 전달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은 다르다. 물론 그들도 만약 모국이 아닌 타국에서 영어를 쓴다면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도 상대의 로컬 영어에 맞춰서 말해줘야 한다.


내가 호주에서 살면서 느낀 점은 모국어가 영어인 곳은 모국어가 부족한 자들에서 그리 관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어가 더 불편해지고 민감해진다. 언어는 친숙하고 편하게 다가가야 늘지만 우리는 항상 이 언어로 자신을 평가받으면서 지내온 시간 때문인지 '영어'가 좀처럼 친해지지 않는다.언어는 도구이고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이지만 '영어'라는 언어는 언제부터인가 우리를 객체로 만들어 버린 것 같다. 


AI와 신(God)


신은 수많은 언어로 인간들을 갈라놓았지만 이제 인간은 언어의 장벽을 AI 기술로 완전히 극복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럼에도 기를 쓰고 영어를 모국어처럼 쓰려고 노력해야 할까에 의문이 생긴다.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더 의미 있고 소중한 일들이 많다. 나는 그래서 기를 쓰고 영어 공부를 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의도적인 공부보다는 의도적인 환경에 놓이려 한다.


내게 남은 시간을 의미 전달을 위한 또 다른 도구를 가지기 위해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남긴 수많은 의미들은 모국어로 분명하게 남아 있고 이 의미를 정확하고 명확하게 다른 언어로 전달되는 건 어느 한 시점에 해결될 날이 올 것이다. 이건 마치 과거 목수가 손톱으로 수십 년 동안 땀흘리며 잘라오던 나무들을 전동 톱이 발명되고 단 몇 달 혹은 며칠 만에 다 잘라버릴 수 있는 것과도 같다. 손톱으로 열심히 자르면 체력은 길러지겠지만 더 많은 구조물과 조형물을 만들 수는 없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남다른 생각과 아이디어를 더 빨리 현실에서 구현해 내어야 한다. 아직까진 AI 기술이 완벽한 번역과 통역을 섭렵하지 못했지만 이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지금도 쌓여가는 빅데이터는 언어의 수많은 경우의 수를 스스로 학습하고 있다.


모국어의 감옥


세계 어느 작가도 모국어로 창작된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외국어로 번역하는 사람은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럴 능력이 없으며 또한 그럴 능력을 키우는데 시간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작가는 모국어의 감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더 많은 의미와 이야기를 남기고 싶지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하는데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만약 현실에서 누군가(모국어가 다른)와 사랑과 우정 같은 깊은 감정 교류와 관계의 발전을 원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 언어(외국어)의 스킬이 필요하다. 대화를 통한 감정표현과 공감은 의사 전달만을 위한 언어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건 문학과 다른 학문(과학, 경제, 정치, 철학 등)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학문은 의미전달과 이해가 목적이지만 문학은 느낌 전달과 공감이 우선이다. 그래서 문학은 모국어에 갇혀버린다.


"모국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만, 이제 그 언어의 사소한 뉘앙스와 기색, 기미와 정취, 발화자의 숨의 의도를 너무 잘 감지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진정한 고요와 안식을 누리기 어려워졌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에서 -


writing with Sunrise

일찍 일어나는 새가 모이를 더 먹는다는 말이 있다. 지난 밤 받은 마사지의 효과일까? 피로가 많이 풀린 듯하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 뜨거운 커피를 끓이고 테이블에 앉아 적막 속에서 글을 썼다. 전날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얼마쯤 지났을까? 의식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고개를 들어보니 창밖에 동이 뜨고 있다. 그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 쓰던 글을 멈췄다. 해맞이를 하러 방문을 열고 새벽의 공기를 들이마신다. 이제 다시 현실의 여행(비현실)으로 돌아와야 한다.


아침이 밝았다. 모국어의 감옥에서 벗어날 시간이다.


Morning calm




여행지에 도착하면 항상 그렇듯 그곳의 유명한 관광지 한 두 곳쯤은 꼭 둘러봐야 한다. 그건 그 관광지에 대해 예의이기도 하고 또한 그곳을 갔던 흔적을 남기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명한 데는 그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유명에는 항상 긴 역사를 품고 있는 법이다.

Breakfast (약 3,500원) in 편의점

집 앞 편의점에서 저렴하고 알찬 아침을 먹고 다시 또 바람을 가르며 달린다. 우붓의 도로는 거의 다 1차선 같은 좁은 왕복 2차선 도로가 대부분이다. 여기선 차보다 오토바이가 더 빠르다. 차는 제 성능을 발휘하며 달릴 도로가 없다. 나도 이제 바이크 운전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한 모양이다. 좁은 길도 잘 다닌다. 어느 순간부터 자동차들 사이사이를 파고들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Become a Local rider

우붓에 오면 모든 관광객이 간다는 계단식 논을 찾았다. 이런 풍경은 한국에서도 간혹 산골 마을에서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곳은 대부분이 이런 식의 벼농사를 짓는다. 비가 많이 오는 고온 다습한 기후는 2모작(3모 작도 가능할 듯)이 가능하다. 벼농사를 지으려면 모내기를 위해 물을 가둬야 한다. 물을 가둬두려면 땅의 수평을 유지해야 한다.

Tegallalang Rice Terrace

이런 점에서 농사도 목수일과 비슷한 점이 많다. 수평이 맞지 않으면 물이 흐르고 물건이 구른다. 피사의 사탑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말 칼로 자른 듯 평평하게 만들어진 계단식 논이다. 목수일에서도 계단을 직접 짜는 목수는 고급 기술자로 친다. 이곳 농부들은 수평 잡기의 대가들이 분명하다. 물이 잘 고여 있다. 벼들이 길게 자라 벼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곳은 관광지라 추수를 하지 않는 모양이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계단 논이 펼쳐진 계곡을 바라보며 그네를 타고 사진을 찍고 차를 마시며 이색적인 풍경을 감상한다.


나는 계곡 반대편까지 걸어 올라갔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옷이 흠뻑 젖어버렸다. 나는 등산을 좋아해 산에 대해서는 남들보다는 잘 아는 편이다. 산은 어디에 서 있느냐 어느 길을 따라가느냐에 따라 다른 경치를 보여준다. 같은 산이라도 길이 다르고 방향이 다르다면 다른 산을 경험하게 된다. 반대편으로 넘어가니 또 다른 절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등산의 묘미가 여기에 있다. 같은 산을 왜 그리 주구장창 다니냐고 누가 물었던 적이 있다.  

땀에 쩔은 등판

그 자는 산이 가진 한 가지의 이름만 기억할 뿐 산이 품은 여러가지 길과 풍경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같은 산이라도 꼭대기로 향하는 길은 여러 가지이고 갔던 길을 반대로 간다면 더 많은 길이 있다. 그래서 갈 때마다 새롭다. 익숙함 속에서 새로움을 선사하는 것이 바로 산이다. 문제는 여긴 입구와 출구가 같은 관광지라는 것, 왔던 길을 다시 가려니 갑갑하다. 해는 점점 중천에 떠서 숨이 턱턱 막혀온다. 유격훈련 때 하던 휠 로프 타기가 보인다.

유격 훈련?!

"Can I ride this to go back to the starting point?"

"No, you can't"


돌아갈 때는 쉽게 가려했지만 안 된단다. 돈을 내고 온 자만이 다시 이걸 타고 돌아갈 수 있단다. 편도행은 없다. 여행과 같다. 여행이 유랑과 다른 것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다. 왕복 티켓을 끊고 온다. 나는 여행을 왔는데 지금은 유랑민이 되었다. 걸어서 돌아가야 한다. 또 한 번 땀으로 샤워를 해야 했다. 원점으로 거의 다 왔을 쯤이었다.


"Can you take a photo for me?"


헉헉거리며 숨을 돌리고 있는 나에게 금발의 한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꽃으로 장식된 하트 모양의 조형물에서 사진을 찍고 싶단다. 나는 그녀의 핸드폰을 들고 나의 감각적인 앵글로 여러 장의 사진을 남겨 주었다. 사진을 보며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그래서 나도 부탁했다. 그런데 나는 만족스럽지가 않다.

Love in Bali

중이 제 머리를 깎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잘 찍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과 사물을 관조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어떻게 보면 그 사물과 사람을 좀 더 직관적 혹은 은유적으로 담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사진은 그렇게 내가 세상과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 사람도 사진작가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글 작가에게 문체가 있다면 사진작가에겐 앵글(프레임)이 있다.


"Are you traveling alone?"

"Yes, I am, and you?"

"me too"

"Where are you from?"

"Czech!" (체코)


체코 프라하의 여인이었다. 프라하의 여인을 발리에서 만났다. 그녀도 혼영(혼자 여행하는) 족이다. 그녀는 혼자 여행할 때 자유를 느낀다고 했다. 가고 싶은 곳을 가고 가고 싶을 때 가고 먹고 싶은 걸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어서 좋단다. 자신의 감정 변화에 충실한 여행을 할 수 있다. 그녀도 P가 분명해 보인다. P는 P를 알아본다. 그래서 서로는 서로의 갈 길을 방해하지 않는다. 나는 올라가고 그녀는 내려갔다. 아직은 생기 발랄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는 잠시 뒤면 나처럼 땀범벅이 되어 일그러질 표정을 상상된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흠뻑 젖은 옷을 말리려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냉기가 온몸을 감싸며 몸 안에 열기를 뺏어간다. 시원한 아이스크림과 냉수로 열기를 식힌다. 다시 또 움직인다.

Pura Tirta Empul

다음은 유명한 사원이다. 신성한 물세례를 받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소문답게 그곳에는 세계 곳곳에서 온 세례자들로 북적댄다. 12번의 물세례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고픈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두 손을 모은 이방인들은 모두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 나 또한 여행 중에 갑자기 날아든 뜻하지 않은 비보로 두 손을 모아 기도해 본다.

Prayers before baptism with water

세계 각지에서 온 이방인들은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자신만의 언어로 신에게 간절함을 호소한다. 우리는 서로 무엇을 기도하는지 알 수 없지만 신은 모두 다 알아들으리라. 신은 인간을 수많은 언어로 갈라놓았지만 신을 향한 간절함은 누구 하나 다르지 않다. 소리와 몸짓과 모습은 모두 다를지언정 그 마음만은 하나라는 것은 분명하다.


수많은 외국어와 모국어 사이에서 간절함이 피어난다.


A wish between foreign languages and mother ton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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