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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Feb 07. 2024

일몰과 일출 사이

발리에서 생긴 일 (Day-5)

"모든 여행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에서 -


나는 지금 여행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기록은 단서를 남기는 것이지 여행의 진정한 의미를 기록하고자 함은 아니다. 지금 이 여행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시간이 지나야 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남기는 기행문이 시간이 지나고 다시 이 여행을 떠올릴 때 잊혔던 것들을 다시 상기시켜 줄 것이다. 음... 어쩌면 나중에 내가 기억하고 있는 여행과는 다른 기록들에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왜냐 모든 기억은 과거를 편집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편집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만약 당시에 상황을 모두 사실적인 기록 혹은 동영상으로 남겨두었다면 그때의 자신의 기억이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편집되지 않은 것과 편집된 것 중 무엇이 더 의미 있을까?


편집된 기억만이 의미를 갖는다


처음 호주라는 낯선 땅에 왔을 때 겪었던 많은 일들이 떠오른다. 그때 당시 느꼈던 것과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 다른 것은 기억이 시간을 거치면서 편집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고통과 시련은 지금 얻을 교훈과 깨달음의 대가였을 것이다. 그때는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했다면 지금 그때의 분노가 이성을 일깨웠고 슬픔이 감성을 불러왔다. 그리고 그 이성과 감성은 나의 글 속에서 점점 자라왔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신이 우리를 시간에 가둬둔 이유이다. 우리는 매 시간 맞닥뜨린 사건과 사고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즉각적인 감정에 휘둘렸던 자신을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뱉은 말과 저지른 행동은 돌이킬 수 없다. 그렇게 상처들이 쌓여간다. 그 상처는 나에게 또 타인 모두에게 남겨지고 쉽게 잊히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후회가 쌓여가는 사람과 시간이 갈수록 의미가 쌓여가는 사람은 시간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자는 후회만 쌓여간다.


그래서 나는 현실의 삶에 관조적이게 된다. 그럼 모든 상황을 시간을 가지고 지켜볼 수 있게 된다. 기억이 편집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의 발리에서의 여행이 주는 느낌도 시간이 지나면 변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느낌과 생각들을 기록하려 한다. 그리고 나중에 이 여행을 다시 떠올리며 쓰게 될 어떤 글이 어떻게 변해있을지가 너무 궁금해진다.




"띠리링 띠리링"


새벽 02:00, 핸드폰 알람이 울린다.

스미낙에서 봤던 해변의 일몰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일출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검색으로 이어졌다. 발리의 바투르 화산의 일출이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검색을 찾아본 풍경은 나의 클릭을 유도했고 결국 전날 'Klook'으로 오늘 새벽 바투르 화산 트레킹을 예약했다. 우붓에서 새벽 2시 반 출발이다. 기사가 숙소 앞까지 픽업을 왔다. 칠흑 같은 새벽잠이 덜 깬 상태로 짐을 챙겨 차에 탑승했다.

in the car to Mt. Batur

7인승 SUV에 나 혼자 밖에 없다. 완전 프라이빗 투어다. 지금은 비성수기라 이렇게 혼자 트레킹을 가게 되는 경우도 있단다. 항상 현지의 패키지 투어를 할 때면 사람들이 가득 찬 승합차로 움직였던 기억들 때문에 이런 상황이 낯설지만 특별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도로를 한참 동안 달리며 기사와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건 없다. 너무 많은 일상적인 대화는 기억과 멀어진다.  캄캄한 새벽 차가 거의 없는 한적한 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린다. 부족한 잠 때문에 졸음이 밀려온다. 하지만 혹여 기사가 과속에 졸음운전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일부로 계속 말을 걸었다. 나중에 겪을 일을 알았더라면 잠을 좀 자 두었을 텐데… 1시간 반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바투르 화산 아래에 있는 마을의 공터였다. 어둠 속 공터에서 차량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한 여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검은 레깅스와 회색의 후드티 그리고 운동화에 등산가방을 둘러맨 모습이었다.

트레킹 가이드 '카렉'

“She is your trekking guide.”

“I’m 카렉, nice to meet you”

“I’m Thomas. Nice to meet you too”


차에서 내려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갈색톤의 피부와 이색적인 이목구비가 그녀가 현지인임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이곳 화산 마을에 살고 있다고 했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가이드를 타라 발길을 옮겼다.


“헉헉헉”


숨소리가 점점 가파 진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가파른 산길이 시작되었다. 간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몽롱한 상태였다. 피로도가 급격히 상승한다.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한다. 습한 공기는 더 많은 땀을 배출한다. 입고 있던 옷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 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 그녀는 숨소리 한번 내지 않고 산을 올라간다.


“you look like a professional. You already get used to here for trekking, right?”

“Yes, I often come to this mountain.”


그녀의 탄력 있는 허벅지가 이미 이 산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점령했던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성수기에는 일주일에 4~5번씩 이 산을 오른다고 한다. 그렇게 수많은 등반객들의 엄홍길이 되어 주었던 모양이다. 나도 산타기라면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에 비하면 나는 하룻강아지에 불과한 듯 보였다.


“May I take a rest for a while here?”

“Ok"

"Do we have enough time to see the sunrise on the top?"

"No problem”


산 중턱쯤 올라왔을 때 호수를 끼고 있는 마을의 불빛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마을은 어둠 속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다. 산을 오를 때 차오르는 숨 때문에 말을 걸기 힘들었다. 잠시 쉬는 틈을 이용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앳돼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두 아이의 엄마였다. 첫째는 이미 5살 둘째는 2살이라고 한다. 그녀는 이제 25살의 꽃다운 나이였다. 생각이 나지 않아 다시 물어본 그녀의 이름은 ‘카렉’이었는데, 이름이 품고 있는 의미가 궁금해서 물었다.


“It means the second”


그녀는 6형제 중에 둘째라고 한다. 이 지역 방언으로 첫째는 ‘부뚜’, 둘째는 ‘카렉’, 셋째는 ‘꼬망’, 넷째는 ‘끄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름이 된다고 한다. 아이를 많이 낳아 그냥 순서대로 부른다고. 그래서 마을에는 동명이인(同名異人) 너무 많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 만의 별명을 만들어 친구들 사이에서 그 이름을 부른다고 한다. 갑자기 그녀의 알려줬던 별명이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나에겐 그녀의 별명이 필요 없다. 왜냐 나는 그 마을에 살지 않기에 나에게 ‘카렉’은 그녀 단 한 명뿐이기 때문이다.


걸음을 옮긴 지 1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화산의 정상으로 갈수록 길은 더욱 가파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화산재 같은 알갱이들이 경사면에 많아 길이 미끄럽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 동안 말없이 거친 숨소리만 이어지고 있었다.


“Hi~ #$%@%&”


우리 뒤에 또 다른 두 불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 불빛이 점점 가까워지자 불빛 뒤에 있던 모습이 드러났다. 커다란 백팩을 메고 있는 두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두 소녀는 ‘카렉’에게 그들의 언어로 말을 건넨다. 서로 잘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알고 보니 동네 주민이다. 두 소녀는 가방 가득 음식과 음료를 짊어지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생계 수단은 산 꼭대기에서 이곳 관광객들에게 일출 전 따뜻한 음료와 음식을 만들어서 제공하는 일이다. 가방에는 오늘 정상에서 만들 음식의 재료들과 음료들이 가득 들어있다. 둘은 자매였다.

2 become 4

“who is the older?”

“We are Twins”

“Really?”


나도 모르게 손에 든 손전등으로 그들의 얼굴을 비췄고 그제야 둘의 얼굴이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쌍둥이에도 순서는 있는 법이다. 그런데 둘은 서로 먼저 나오려 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결국 자연분만을 하지 못하고 제왕절개를 해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둘은 선후가 없는 쌍둥이 자매가 되었다. 이건 생김새도 순서도 모두 같은 완전한 쌍둥이다.


나는 가끔씩 세상에 나와 완전히 비슷한 존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는 이 자매처럼 동시대에 쌍둥이로 태어나 비슷하지만 다른 삶은 살고 우리 둘은 동시대가 아닌 다른 시공간에서 비슷하지만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미치게 된 것은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이 무한히 이어지는 시간 속에 셀 수 없이 많은 인간들을 모두 다 새롭게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인류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시간 속에 머물다 간 그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이 모두 다 완전히 다른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졌을까? 신이라면 가능하겠지?! 아니 신도 인간과 닮아 나태함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분명 신도 Ctrl+C 와 Ctrl+V를 이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눈치챌 수 없게 동시대가 아닌 다른 시공간 속에서 겹치지 않게 태어나게 했을지도…  그럼 쌍둥이는 무슨 의미일까?! 거기까지 나의 상상이 아직 닿지 않는다. 신의 실수인가?!

Top of Mt Batur

“Wow, We got the top of mountain finally!”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꼭대기다. 오를 곳이 없다는 것은 이제 올라왔던 뒤를 돌아볼 시간이라는 뜻이다. 뒤를 돌아 바라본 경치는 내가 견뎌온 고통과 노력에 대한 보답이고 그 풍경 뒤에 스며드는 생각은 내가 저 아래 땅에서 살아온 시간에 대한 회고(回顧)이다.  


구름이 많이 끼었다. 태양이 저 산 너머 지구의 뒤편에서 고개를 내밀려 준비 중 인가 보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점점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붉은 하늘빛이 아래의 마을과 호수의 윤곽을 조금씩 비추기 시작한다.

Breakfast on the top of Mt Batur

“This is breakfast we provide, enjoy”


그때 옆에서 ‘카렉’이 샌드위치와 커피 그리고 삶은 계란이 담긴 접시를 가지고 왔다. 어느새 그녀는 산 정산에 세워진 천막 안에서 음식을 만들어 내왔다. 아직 해가 뜨기까지 시간이 남았다. 나는 동이 뜨는 방향을 보고 앉아서 그녀가 만들어 온 음식을 먹었다. 산 아래에서 봤다면 눈길이 가지 않을 음식이지만 지금 나를 감싸고 있는 이런 시공간의 분위기는 이런 음식이 너무도 의미 있고 감사하다. 음식은 맛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다. 뜨거운 커피가 땀이 식어 한기가 느껴지던 몸속을 다시 데운다. 그녀가 만든 바나나 샌드위치는 여태껏 내가 먹어본 샌드위치 중 가장 맛있는 것이었다. 찜통에서 계란과 함께 쪄낸 바나나를 으깨어서 만든 모양이다.


“Wow~”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린다.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려 한다. 반대편 산 정상에 걸친 구름들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온다. 빛이 점점 붉고 강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그때였다. 호수 옆에서 강한 바람이 불며 안개가 함께 몰려온다. 순식간에 안개가 빛을 삼켜버렸다. 빛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다시 어둠이 찾아들었다. 이 믿기지 않는 상황 속에 사람들은 실망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듯 웅성거린다. 짙은 안개는 모든 것을 가려 버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가 않는다.

The Lights in Fog

다시 손전등을 켰다. 빛이 보인다. 빛이 안갯속에서 강하게 뻗어나간다. 손전등 불빛이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는 건 처음이다. 어둠이 짙고 공기 중에 입자(수증기)가 많으면 빛은 더욱더 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건 인간 세상과도 같다. 악이 만연한 곳에 나타난 선함은 이런 불빛과도 같다.


악이 선을 드러낸다. 어둠 속 동굴 속에서 길을 잃었다면 동굴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은 구세주이다. 태양빛이 이글거리는 사막 한가운데 야자수와 야자수가 만든 짙은 그늘 아래 오아시스가 보인다. 태양빛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이 구세주가 된다. 태양 볕만 가득한 사막 아래에선 그 어떤 빛도 드러나지 않는다. 강렬한 태양빛은 다른 모든 빛을 없애버린다. 선과 악은 손바닥 뒤집기 와도 같다. 절대 선과 절대 악이란 존재하는가?! 이 모든 것은 상황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당신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아주 선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한다면 당신 곁에 있는 평범한 사람은 당신으로 인해 스스로가 악한 사람처럼 되어버릴 수도 있다. 아니 그렇게 느끼게 된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하지만 그도 온갖 악행을 일삼는 무리들 사이에선 아주 선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Foggy Sunrise on the Mt Batur


“Wow, Look at that!”


안개가 걷히고 있다. 강한 바람이 불어오며 눈앞을 가리고 있던 안개를 순식간에 걷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안개 뒤에 가려졌던 태양빛이 약해지는 안갯속에서 산란하며 하늘을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안개가 다 걷히자 머리 위의 하늘은 다시 푸르름을 되찾고 있었다.

'Light ball on my hand' made by '카렉'

멀리 빛나는 태양은 붉은빛에서 노란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좀 더 지나면 그 노란빛 마저 사라지고 무색(or 흰색)으로 존재할 것이다. 한참 동안 그 찬란한 일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많은 상념과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저께는 바다에서 오늘은 산에서, 일몰과 일출을 바라보며 상념이 물결치고 또 불어온다.


우리는 한낮에 고개를 들어 태양을 바라보지 않는다. 왜냐 너무 강하기에… 빛이 저물거나 혹은 깨어날 때, 즉 빛이 약할 때만 빛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때의 빛만이 우리에게 의미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저 자연 현상으로만 바라볼 뿐 그것이 우리의 삶과도 같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어제와 오늘 나는 발리에서 일몰과 일출 사이에서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Sunrise in Mt. Bat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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