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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Apr 21. 2024

신과 인간 사이

죽음을 미리 본다면...

“난 너에게 지금 당장 100억을 줄 수 있어, 네가 딱 한 가지 조건만 받아들인다면 말이야”

“정말? 그게 뭔데”


깔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신사와 누더기 같은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신사는 남자에게 태블릿 pc를 보여준다. 그 화면 속에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자신이 찍혀있는 영상을 신기한 듯 계속 보고 있었다. 자신이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장면은 기억에 없는 것이었다. 남자는 집을 짓는 공사장에 있었다. 테이블 톱으로 목재를 자르고 있었다. 그런데 톱날을 고정하고 있는 나사가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화면에 보였다. 남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 영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어어~~ 안 돼! 피해!”


그때 톱날의 축을 잡고 있던 나사가 빠지면서 톱날이 빠졌고 그 톱날은 엄청난 회전력으로 남자의 몸 쪽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남자의 오른쪽 팔을 쳤다. 순식간에 팔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엄청난 피가 사방으로 튀기고 외마디 비명이 공사장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남자는 한쪽 팔을 잃어버렸다.


“도대체 뭐야~? 이 영상은?”

“내가 방금 전에 한 말 기억하지? 딱 한 가지 조건만 들어주면 내가 너에게 지금 당장 100억을 준다고?”

“그런데?!”

“네가 나에게서 100억을 받으면 넌 1달 뒤에 이 비디오의 영상처럼 팔이 잘리게 될 거야.”

“뭐라고?”

“그게 내가 말한 조건이야”

“말도 안 돼!”

“그럼 내가 너에게 아무 조건도 없이 100억을 준다는 건 말이 되는 일일까?”

“….”




짧은 스토리를 만들어 보았다. 어떤가? 당신이 만약 이런 상황에서 처했다면 100억을 받고 그 신사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나는 최근 몇 명의 지인에게 이와 같은 상황을 설명해 주고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다. 모두가 100억을 마다했다. 1년의 시간을 준다고 해도 마다했다. 이 대답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그 누구도 돈과 자신의 목숨 혹은 신체의 일부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과 신체가 100억 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웃긴 건 실제 당신의 목숨 값은 돈으로 환산하면 기껏해야 2~3억 정도이다. 일반적인 생명보험을 기준으로 보면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전제 조건이 붙는다. 내가 이 질문을 던진 사람들은 극도의 경제적 궁핍이나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는 분명 아주 절박하고 간절한 상황에 처한 자 일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자녀가 병들어 죽어가는 상황에 수술비가 없는 즉, 자신의 목숨과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사랑하는 존재를 살려야 하는 상황 말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선 그 누구도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건 인간은 정해진 미래, 그것도 불행한 미래를 인정하고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점점 다가오는 하지만 피해 갈 수 없는 죽음 혹은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건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공포이다.


“넌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신의 존재를 설명할 거야?”


내가 이런 스토리텔링으로 질문을 던진 사람들은 모두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항상 교회에서 신께 경배하고 신의 말씀을 읽으며 또한 기도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게 되었는지 나에게 그리 중요치 않다. 왜냐 이건 사람마다 모두 다른 계기와 상황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은 오직 자신이 경험하고 체험한 신의 존재만을 알고 또한 타인이 자신과 같이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믿게 되길 기대한다는 것이다.


“무신론자에게는 신의 말씀, 즉 경전 속에 글귀는 그저 서점에 널려있는 자기 계발서에 적힌 문장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누구나 자기 계발서를 읽으면서 그때마다 깨달음 같은 감흥을 받지, 하지만 돌아서서 현실의 삶으로 돌아가면 어느새 잊어버리고 살던 대로 그대로 살아가잖아. 대부분 생각대로 살기 보단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지.”


경전이든 자기 계발서든 깨달음을 주는 문장과 말들이 우리의 삶을 바꿔놓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건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를 불문하고 그들에겐 신에 존재에 대한 제대로 된 개념이 세워지지 않아서이기 때문은 아닐까? 이건 유신론자에겐 신의 존재에 대한 것이고 무신론자에겐 다가올 미래에 대한 확신이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럼 계속 읽어보시길…


여기서부터 나의 설명은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 개념을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면 신의 개념에 대해 여태껏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


나에게 신의 존재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신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존재’라고 얘기하고 싶다. 이것을 좀 유식하게 설명하자면 신은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를 창조하고 우주의 섭리를 주관하는 존재이다. 시작과 끝이며 알파와 오메가이다. 신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며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신을 경배할 수 없다. 오늘까지만 있고 미래에는 없을 신에게 뭘 바라고 기대하겠는가?


 신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모두 존재하고 그 모든 시간을 볼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께 과거에 대해 얘기(회개)하고 미래에 대해 소망하며 현재를 바꾸려고 다짐(결단)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신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이 과거의 위안과 현재의 평안과 미래의 소망을 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는 이것을 과거의 경험(과오 혹은 실패)과 현재의 노력을 통한 미래의 성취라는 다른 단어와 표현을 사용하는 것뿐이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그리고 나에게 시공간적으로 접근성이 가장 좋은 교회라는 곳을 통해서 그 신의 존재를 알아가고 있다. 그리고 교회(기독교)는 이 신의 존재를 인간과 믹싱 시켜 버린 한 존재를 숭배하고 찬양한다.

Jesus

신과 인간 사이


예수(耶穌, Jesus), 인간의 역사를 기원전(BC)과 기원후(AD) 나눈 신의 아들(The Son of God)이다. 그는 인류 역사 상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며 그를 모르는 인간은 문명이 닿지 않은 곳에 사는 몇몇에 불과할 정도로 그의 존재를 모르는 자는 극히 드물다. 역사 속 수많은 인물들이 그의 존재를 알리려고 수많은 희생과 피를 흘렸다. 그 덕분에 그는 신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걸 기독교에서는 메시아 (Messiah)라고 칭한다. 물론 이건 다른 종교에서 바라보는 시각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종교와 메시아는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아무도 혹은 아무나 될 수 없는 존재라는 종교로 나뉜다. 나는 뭐가 옳다 그르다를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신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신을 믿지 않는 자(무신론자)들에게 설명하는가에 초점을 두고 얘기하려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만큼 적합한 인물이 없다.


신은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라고 말했다. 인간은 이전에 썼던 글[3차원과 4차원 사이]에서 설명한 것처럼 3.5차원, 즉 3차원에 머물며 4차원의 인지하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신은 4차원에 존재한다. 그럼 여기서 신의 존재로 온 인간인 예수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자. 이건 예수가 신의 존재라는 전제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럼 예수는 3차원에 존재하지만 4차원을 인지를 넘어 경험할 수 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빠져나오는 이스카리옷 유다 [칼 블로흐] 作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마태복음 26:21] –


성경에는 예수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며 자신이 한 제자(가리옷 유다)의 배신으로 죽음으로 걸어갈 것을 암시하는 구절이 있다. 예수는 미래를 보는 자였다. 서두에서 내가 설정한 스토리처럼 예수는 이미 자신이 죽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언제 어떻게 죽는지를 알고 살아간다는 것만큼 공포스럽고 괴로운 일이 있을까? 이건 인간이 결코 견딜 수 없는 공포이다. 그래서 인간은 미래를 볼 수 없고 현재만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우리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또 자기만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   [로마서 14:7] -


유신론자, 즉 진실로 신의 존재를 믿는 자는 바로 죽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자이다. 이건 무신론자에게도 같은 개념으로 적용될 수 있다. 필사즉생필생즉사 (必死卽生 必生卽死 : 죽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남긴 이 말은 성경의 구절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신을 믿지 않는 자 또한 그 진리를 알 수 있다.


죽음을 각오하는 자는 영원해지는 것이다. 예수가 죽어야만 했던 이유이고 그랬기에 예수는 영원히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 예수가 공생애 기간(3년)을 자신이 아닌 만인을 위해 살아간 것은 아마도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자신의 죽음을 이미 보았기 때문 아닐까? 서두의 짧은 스토리처럼 당신이 언제 어떻게 죽는지를 보게 본다면, 그리고 그것이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오늘도 어제처럼 살겠는가? 오늘이 어제와 달라짐은 바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영화 The Man from Nowhere (아저씨) 중애서

“니들은 내일만 보고 살지? 내일만 보고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 영화 [아저씨] 중에서 -

 

영화 [아저씨] 속의 아저씨의 삶은 비루하지만 평탄했다. 하지만 그가 오늘만 보고 살아가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자신도 몰랐지만 자신에게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앗아가는 순간 아니었던가? 인간에게는 돈이나 자신의 생명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다. 그걸 깨닫는 것은 삶의 가장 밑바닥 혹은 벼랑 끝까지 몰려본 자나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자가 아닐까?


이처럼 죽음을 불사하고 받아들이면 세상은 아름다워질 수 있다. 더 가지기 위해 싸우고 뺏기지 않으려 싸우는 것이 모두 의미 없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바라보며 가슴 아프고 애잔한 감정이 스며드는 건 그가 배신을 당해서도 혹은 만인을 위해서 죽었다는 사실 때문도 아니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가야만 했던 그 사실이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에 대한 경외감에서 오는 감정이었다.


“세 시쯤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엘리 엘리라마 사박다니?’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었다.”


-  [마태복음 27:46]  -


예수도 마지막 죽음의 순간 하늘을 바라보며 신을 원망하는 듯한 말을 남긴다. 아마 그것은 너무도 견디기 힘든 공포와 고통을 홀로 견뎌온 시간에 대한 원망이 아니었을까? 신의 능력을 가지고 인간의 육체에 갇혀있는 고통을 우리가 어찌 이해할 수 있으리오...


그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항상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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