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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Apr 28. 2024

초심과 회심 사이

[토마스 복음서]를 읽다가... -스물한 번째 이야기 -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복음 16:18~19] -


예수의 제자 중에서 가장 우두머리를 꼽으라면 베드로(Peter)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예수의 첫 번째 제자였고 가장 충직한 성품과 믿음을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예수의 제자들 중 가장 우둔하고 무식한 자였다. 그의 이름 베드로(Petrus)는 바위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실제로 예수는 그를 아람어로 케파(ܟܐܦܐ، כיפא = 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실제 이름은 시몬 바르요나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바위라고 부른다. 그는 무지한 돌대가리였지만 또한 성전(집)을 세우기 위한 튼튼한 반석 (Cornerstone : 주춧돌)이었다.




나의 글을 많이 읽은 독자라면 내가 성경 속에서 어떤 인물을 가장 좋아하는지 아리리라. 그렇다. 나는 7번째 사도 도마(토마스, St.Thomas)를 가장 좋아한다. 굳이 예수의 제자 중에서 나와 가장 흡사한 인물을 꼽으라면 그가 가장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들 중 도마와 가장 상극의 인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도마는 의심의 상징이었고 (Doubting Thomas) 베드로는 충성(Loyalty)의 상징이었다. 오죽하면 그를 움직이지 않는 바위로 불렀겠는가?

베드로(St. Petrus, AD 1년 ~ 67년 )  &  토마스(St. Thomas, BC 1년 ~ 72년)

나는 그 많은 똑똑하고 재주 많은 제자들 중에 왜 베드로가 리더가 되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총명함으로 친다면 공관복음의 저자인 마태(Metthew)나 마가(Mark) 혹은 누가(Luke) 같은 인물이 더욱 적합하다. 그는 글도 쓸 줄 모르는 일자무식의 어부일 뿐이었다. 그런 그가 나중에 예수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고 제1대 교황이 된 건 무엇 때문일까? 베드로가 기독교의 1대 교황이라는 상징적인 인물이 된 건 나에게 가장 큰 아이러니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이해는 두 가지의 상반되는 생각을 불러왔다.


내가 도마라는 인물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와 관련된 많은 자료와 기록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하지만 4 복음서의 저자 그리고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그에 대한 기록과 자료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옛날 그가 혹은 그의 제자들이 남긴 예수의 기록(복음서)은 거의 대부분 사라졌고 뒤늦게(이집트 나그함마디, 1945)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숨겨진 그의 기록의 등장은 기존의 기독교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예수를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의 복음서 마지막 구절에는 베드로에 대한 언급이 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가로되, “마리아는 우리를 떠나야 한다. 여자들은 삶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  [도마복음] 114:1 -


이 구절은 도마의 베드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담겨있다. 베드로는 제자들 중에서 가장 입김이 세고 영향력 있는 주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언행이 다른 모든 제자들의 환영을 받진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건 예수의 제자들 중에는 학식과 언변 그리고 (현실의) 사리분별에 능한 자들이 많았다. 글자도 모르는 베드로가 리더의 역할을 하는 것을 내심 불편해했을 것이라는 것이 내 추측이다. 도마도 그런 불편한 심정을 자신의 복음서에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었고 그를 제자들의 우두머리로 받아들였다. 예수가 왜 그를 지목했을까?

[성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 Pietro Perngimo(1450~1523) 作 

“무식하면 용감해진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실제로 베드로는 무식했지만 용감한 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상징적인 이미지와 역할은 다른 역사서와 스토리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공자의 첫 번째 제자 ‘자로(子路)’ 와 상당히 닮아있다. 그 또한 우직하고 자기 멋대로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공자의 가장 유명한 제자이며 또한 가장 골치 아픈 제자였다. 하지만 그는 후대에 공자의 유학 사상을 가장 잘 실천하고 이어가는 인물이 된다. 자로는 공자가 가장 인간적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제자였다. 그건 아마도 그가 가장 다듬어지지 않은, 즉 발전가능성이 가장 많은 제자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VIP

자로 (子路,  BC 542년 ~ BC 480년)

교회에서는 가장 모르는 자를 가장 환영한다. 그 모른다는 것이 예수나 성경에 관해 전혀 무지한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내 생각은 세상(세속, 현실)에 무지한 자를 의미한다고도 생각한다. 무지는 때 묻지 않음의 또 다른 말이기도 하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사리분별에 능한 사람은 쉽게 신앙에 길로 들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도하기가 까다롭고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교회는 어쭙잖게 이리저리 교회를 떠돌아다닌 나 같은 논객을 별로 반기지 않는다. 교회는 신(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자를 환영한다. 그런 자를 우리는 VIP(Very Important Person)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예수를 알기 전 베드로 같은 자를 원한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베드로 같은 자를 찾아보기란 너무 어렵다. 순수한 무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제 세상은 순수하게 무지한 자가 살아가기엔 너무도 척박하다. 그래서 대부분이 어쭙잖은 지식으로 아는 척들을 하며 살아간다. 편협한 무지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무시당하지 않고 속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고 몰라도 아는 척을 해야 한다.


No more VIP, make someone to be VIP


그럼에도 교회는 계속 VIP를 찾아다닌다. 이제 예수와 성경을 모르는 자는 없다. 물론 깊이와 넓이엔 차이가 있다. 성경을 지식이 아닌 진리로 받아들이는 자가 없을 뿐이다. 지식이 진리가 되려면 그것이 삶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삶을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에게도 그 진리를 강요할 수 없다. 이건 스스로 깨닫고 선택하고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다만 우리가 그 길을 가지 못하더라도 그 길이 있다는 사실을 다른 이에게 알려줄 수는 있다. 저 마다 소명의 길은 다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러지 못하면서 왜 나에게 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 다른 소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 실천의 길과 방식은 모두가 다르다. 어떤 길을 가고 어떤 방식을 따르느냐는 그 자신만이 깨닫고 선택하는 것이다. 아무도 알 수 없다. 오직 신과 자신만이 그걸 알고 있다. 혹여 그걸 아는 것처럼 자신에게 조언하고 강요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를 가장 조심해야 한다.


이제 중요한 사람(VIP)을 찾아다니는 시기는 끝났다. 우리가 누군가를 중요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일상 속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주변에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예수가 살던 시기처럼 방랑하고 유랑하며 복음을 전파하러 다니지 않는다.


나의 주변에 누군가가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사람이 백지일지 낙서장일지는 알 수 없다. 하얀 백지는 쓰기 쉽다. 그리고 한 번 쓰면 선명하게 남는다. 하지만 이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이미 쓰인 낚서장을 지우고 다시 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백지 10장을 쓰는 것보다 1장의 낙서장을 지우고 쓰는 일이 더 힘들고 어렵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 나라는 백 마리의 양을 가지고 있는 목자(牧者)와도 같다. 그들 중에 가장 큰, 그 한 마리가 없어졌다.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남겨두고 그 한 마리를 발견할 때까지 찾아다녔다. 이 모든 수고를 끝낸 뒤, 목자는 그 양에게 말했다. 나는 아흔아홉 마리보다도 너를 사랑하노라”


-  [도마복음] 107장 -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것부터 더 신경 쓰고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힘들고 어려운 것이 해결되면 그것이 가져오는 파장효과(시너지)가 더욱더 커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지기 마련이다.

백지와 낙서장

백지에 쓴다는 것


이건 마치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것과 같다. 그럼 이건 ‘모태신앙’이 된다. 하지만 모태신앙은 다른 것을 볼 기회를 앗아가 버린다. 바른 길이지만 쉬운 길이다. 모태신앙은 다른 세계와 신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의 시선과 생각을 이해하기 힘들다. 모태는 모태로 신앙을 전할 뿐이다. 이건 마치 이슬람이 번성해 가는 방식과 유사하다. 모태 신앙은 다른 세계를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 교육되고 훈련된 이념과 사상이 쉽게 변할 수 없는 것처럼 훈련된 신앙은 쉽게 바뀔 수가 없다. 신앙은 (자의적) 선택이다. 하지만 모태는 선택권이 없다. 종교(생활)와 신앙(생활)이 분리되는 이유이다.


낙서장을 지우고 쓴다는 것


 나는 호주에 온 이후 여러 어르신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보냈다. 세월의 길이만큼 그들의 종이(머리)에는 많은 흔적들이 남겨져 이제는 지우려 해도 지우기 힘들어져 버렸다. 그들은 과거라는 감옥에 갇혀서 살아가는 듯했다. 그들은 자신이 겪어온 삶(경험)을 통해서만 모든 것을 이해하고 판단하며 살아오신 분들이다. 전쟁과 굶주림 그리고 쉼 없는 노동 속에서 각인된 기억들은 이후에 세상의 변화와 흐름을 무뎌지게 만들었다. 그들은 변화가 두렵다. 변화된 세상에 태어난 자들과 변화를 거부해 온 자들은 서로 보고 들은 것이 다르다. 


세대 간의 갈등이다.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대부분 그냥 무시하고 내버려 둔다. 그렇게 신구(舊)는 서로 멀어진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보다 더 먼저 천국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만약 회심만 한다면... 시간이 부족하기에 더욱 어렵고 힘들다. 우리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유일한 회심의 기회는 들어주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에 갇혀있는 그들이 과거를 쏟아내고 털어내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그 아픈 기억을 떨쳐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에 겐 필요 없는 이 과정이 선행되어야 하기에 더 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그 오랜 세월을 다 털어내고 지워낼 때까지 들어줄 여유와 인내를 가진 자가 있을까... 다들 삶이 너무 바쁘다. 


맹목과 의심 사이 (과감한 선택 vs 신중한 선택)


우리는 항상 옳은 선택을 위해 매 순간 고민하며 살아간다. 하루에도 수십 번 선택의 순간을 지면서 좀 더 나은 선택을 기대한다. 뭐 카푸치노를 마실지 모카를 마실지 같은 사소한 선택은 차치하더라도 누군가를 반려자로 혹은 리더 혹은 롤모델로 받아들일지 같은 선택은 좀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좀 더 오랜 시간을 지켜보고 겪어보면서 선택의 순간을 미루고 또 미룬다. 호감 혹은 의심이 믿음과 확신으로 바뀔 때까지… 웃긴 건 시간이 지난다고 모두 믿음과 확신을 가져다 주진 않는다. 또한 생긴 믿음과 확신이 시간이 좀 더 지나 그것이 세뇌였고 오판이었다고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예수와 히틀러


예수와 히틀러(혹은 공자와 마오쩌둥)를 비교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지만 사실 우리는 현실에서 이 둘을 구분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누군가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확신은 그 당사자가 처해있는 상황과 아주 큰 연관이 있다. 그리고 그 자의 그런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하는 자가 그 자의 믿음과 확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누구나 마찬가지 이겠지만 현실의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바꾸기를 원하는 자는 그 길을 아는 자를 간절히 원하고 찾기 마련이다. 그 길의 옳고 그름이 중요치 않다. 방향이 맞다면 방법은 중요치 않은 자들이다. 방향과 방법이 옳은 자가 예수라면 방향만 맞고 방법이 옳지 않은 자가 히틀러이다. 전자는 좀 더 번거롭고 오래 걸리며 평화적으로 평화를 찾는 반면 후자는 저돌적이고 빠르며 비평화적으로 평화를 찾아가는 방식이다. 

예수와 히틀러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이 누구를 만나느냐이다. 만약 베드로와 자로가 예수나 공자가 아닌 히틀러나 마오쩌둥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들의 맹목적인 믿음과 확신의 용기는 강력한 무기(무력)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렵고 힘든 고난의 상황 속에 있다면 이 방법에는 무뎌질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는 방향과 속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뎌진다. 그들이 보여주고 알려주는 길에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검증하는 시간과 여유를 가지지 않는다. 그냥 냅다 달려간다. 그래서 예수와 공자를 만났던 자들은 성인과 군자가 되었고 히틀러와 마오쩌둥을 만났던 자들은 살인마와 괴물이 되어버렸다. 시간이 흘러 역사는 그들은 완전히 다른 인물로 평가한다. 하지만 당시 그 상황에서 그들은 모두 그들의 우상이고 영웅이며 신과 같았다.


예수나 히틀러는 베드로와 자로 같은 사람이 절실하다. 의심 한 점 없이 자신을 믿고 따르는 존재, 그 존재가 있어야만 자신의 뜻과 대업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똑똑하고 의심 많은 자보단 무지하더라도 믿음이 있는 자는 느리게 가더라도 뜻과 대업을 무너뜨리진 않는다. 배신이 없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결국 예수를 부인했다.)


초심()과 회심(回心) 사이


하지만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제 요즘 세상에 베드로나 자로 같은 인물을 찾아보긴 너무 어렵다. 무지하지만 순수하고 충직한 자와 어질고 현명한 스승과의 만남은 가장 이상적이다. 과거 지식과 정보가 부족한 옛 시절에는 이런 순박한 사람들이 지천에 널려있었지만 이젠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 사는 현실에선 베드로와 자로 같은 이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 남은 선택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 (Paul , AD 5 ~ 67년)

사도 바울을 아는가 그는 예수를 실제로 본 적도 없지만 그를 예수의 제자로 칭한다. 그는 예수를 부인하고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핍박하던 자였다. 도마는 의심만 했지만 바울은 그를 핍박하고 박해했다.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예수가 없다고 할 정도로 그는 예수의 행적과 말씀을 가장 널리 알린 인물이 되었다. 회심이 더 강했다. 베드로는 현실의 교황(종교)이 되었지만 바울은 예수의 말씀(신앙)을 더 많이 알렸다. (바울 저서는 신약 성경의 30% 이상을 차지한다)


초심을 죽을 때까지 가져간다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초심은 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회심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맹목적인 초심의 믿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달렸지만 묻고 따지는 의심이 가져다주는 회심의 믿음은 더 이상 누구를 만나든 변함없다.


아직도 초심과 회심 사이에서 고민하는가? “초심을 잃지 말라”는 흔한 말은 그만큼 지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당신은 아직도 초심을 지키고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이제 회심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초심과 회심 사이] with coffee & Don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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