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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Apr 02. 2024

물과 바람과 불 사이

[토마스 복음서]를 읽다가... - 스무 번째 이야기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구나 나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은 불 가까이 있는 것이고, 나에게서 멀리 있는 사람은 그 나라에서 멀리 있는 것이니라”


“Jesus said, “Whoever is near me is near the fire and whoever is far from me is far from the kingdom” 

 

-  [도마복음] 82장 -


세례를 받아본 적이 있는가? 교회를 나가지 않는 사람도 교회에서 하는 세례식은 한 번씩 보거나 경험해 본 일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교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들 그리고 과거 때문에 지겹도록 교회와 연결되고 또 엮여서 살아가고 있다. 우연처럼 발을 들인 교회에서 인연들을 만나고 또 마치 운명처럼 들러붙어서 나를 따라다닌다. 신기한 건 과거엔 그토록 관심이 없던 성경과 신앙 그리고 종교 그리고 그와 관련된 역사와 이야기들에 이제야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관심이 생기면 찾고 구하게 된다. 관심 있는 사람이 생기면 그 주변을 맴돌고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이 궁금해지는 것처럼…


물세례


나는 교회에서 총 4번의 세례를 받았다. 누가 들으면 놀라고 웃긴 일이지만 그만큼 과거 한국의 교회는 너무도 사람들의 일상 속에 가까이 붙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신앙이 마치 사회활동처럼 종교활동이 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어릴 때 친구를 따라간 교회에서 물세례를 받았고 군대(훈련소, 자대)에서 두 번의 세례를 받았다. 군대를 제대하고 직장 때문에 찾은 타향의 어느 교회에서 또 한 번의 세례를 받았다. 4번의 세례는 모두 물세례였다. 


세례는 대부분 자의가 아닌 타의(강요 같은 권유)와 물질(초코파이와 선물)의 유혹 때문이었다. 성경이 뭔지도 예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교회 다니는 친구들과 지인들의 끈질긴 권유와 군대에서 배고픔에 주는 그 달콤한 초코파이와 과자 그리고 선물들의 유혹에 이끌려 나의 영혼을 팔았다. 교회도 마치 사회생활과 같았다. 월급을 위해 나가는 회사처럼.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나의 행동이 결정되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별 수 없다. 우리가 사회활동을 하는 것 또한 물질과 관계 속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 아니던가. 교회는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산업자본주의와 태동과 함께 기독교가 부흥한 것이 결코 우연만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둘은 (겉) 궁합이 잘 맞는다. (속) 궁합은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신앙과 성경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깊이 들어가다 보면 이 둘은 서로 괴리감 찾아든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 [마태복음] 3:11 -


성경에는 예수가 오기 전 세례 요한이 물세례로 사람들의 회개하고 회심시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물세례는 사람들을 죄로부터 씻어내고 새로 태어나게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죄라는 것이 모두 세상의 고통(번뇌와 번민)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들로부터 벗어나라는 의미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 물세례는 순간적이고 또한 일시적이다. 나는 오랜 시간 교회를 접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물세례를 지켜봤고 또한 그 사람들도 지켜봤다. 세례를 받을 때의 그 마음가짐과 말과 행동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새로 태어나는 것 같은 기분은 세상의 수많은 고통과 유혹 속으로 들어가면 금방 잊히기 마련이다. 또한 그 고통과 유혹을 벗어날 수도 없다. 


물과의 인연


나와 물과의 인연은 아주 넓고 깊으며 오래되었다. 왜냐 나는 10년 전부터 거의 매일 수영을 하다시피 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거의 매일 침례 아니 침수라고 해야 맞겠다. 물과 나는 한 몸이 된 지 오래다. 나는 일찌감치 물이 가져다주는 평안을 깨달았다. 나에게 물속은 안식이자 모든 일상의 번뇌와 번민으로부터의 벗어나는 곳이다. 알몸으로 물속에 온몸을 내던지고 물과 나의 체온이 평형을 이루는 순간 안식이 찾아든다. 세상과 차단되는 시간이다. 

in the water

과거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는 24시간이 업무시간이었다. 퇴근 후에서 수시로 날아드는 상사의 전화와 고객의 카톡 그리고 수많은 회사 업무 단톡방의 알림은 나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주말에 산에서 등산을 하다가도 회사에서 터진 긴급업무로 친구들을 뒤로하고 산을 뛰어내려와야 했다. 핸드폰은 우리를 모든 것과 24시간 연결시켰지만 그건 우리가 24시간 족쇄에 붙잡혀 있음의 다른 말이었다. 모든 것과 연결되었지만 그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내가 찾은 곳이 수영장이었다. 


“야~ 너 도대체 어디 있었어???! 왜 전화 안 받아?”

“물속에 있었습니다.”

“뭐!?”


샤워를 끝내고 탈의실에서 핸프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한가득이다. 그리고 또다시 벨이 울린다. 물속에 있는데 전화를 확인할 수 없음은 상대도 바보가 아닌 이상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수영을 끊으라고 말하지 못하는 건 그건 누가 봐도 부당한 지시와 명령임이 탈로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면책이다. 그렇게 나는 물속에서 일상의 족쇄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교회에서 주는 물세례보다도 더 의미 있고 소중한 물세례였다. 아마 신은 나에게 세상의 고통에서 잠시 떠나 있는 법을 물로서 알려 주었다. 


성령(바람≒공기≒소리) 세례


이전에 쓴 글에서 성령에 대해 칼럼[음악과 성령 사이]을 쓴 적이 있다. 오랜 시간 종교와 신앙에 관심을 가지면서 가장 의문스러웠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성령이라는 단어의 정의와 의미와 적용(예시)였다. 정의도 힘들고 의미도 모르겠고 그러니 당연히 경험할 수도 없다. 나중에 오랜 시간이 지나고 깨달은 것은 내가 이미 그것을 경험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했음이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이미 도래했지만 우리가 항상 천국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과 같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해야 할까? 우리는 이런 경험을 한다.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다가 가장 편안하고 당연해서 인지하지 못하던 무언가가 내 곁에서 사라지는 순간 지옥이 찾아온다는 것을. 그것 중에 가장 피부에 와닿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공기(Air)이다. 공기가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몇 분을 버티지 못한다. 0기압의 (우주) 공간에서 온몸의 체액이 기체로 변하는 것이 어떤 고통을 가져다주는지는… 음...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공기는 바람을 만들고 소리는 바람을 타고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간다. 공기가 없으면 소리도 없다. 그래서 내가 이전에 썼던 글에서 성령을 음악에 비유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음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예술의 한 종류이다. 음악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가? 아마 너무도 무미건조한 세상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음악이 주는 영감을 어느 순간부터 깨달았다. 가사 없는 잔잔한 클래식 혹은 뉴에이지 음악의 선율을 따라서 해마 속의 깊은 기억과 연결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사람들은 ‘몰입’이라는 전문적인 용어를 쓰더라.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 성령이란 소리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교회에서도 항상 예배가 시작하기 전에는 음악과 찬양이 우선됨은 분명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in the sound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짓든지, 무슨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하든지, 그들은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 [마태복음] 12:31 -


나는 소리(음악)를 통해서 또 다른 세계와 연결됨을 믿게 된다. 왜냐 나는 음악이 없이는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쓰기는 내가 모든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이다. 하지만 음악이 없다면 연결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음악을 통해 성령을 느낀다고 믿는다. 온전히 이 성령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다른 세계와 만나게 된다. 그 세계가 아마도 신이 각 개개인에게 넣어준 신의 소명이 아닐까?! 물론 그 세계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에 닿으려면 이 바람의 노래(소리, 음악)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일지도…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책 속에서 혹은 전문가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이 일컫는 무의식과 상상(몰입)과 또 다른 내 안의 자신(영혼)이다.


♩ ♬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 ♫


 - 소향 [바람의 노래] 중에서 -


요즘 새벽 출근길에 항상 이 노래를 듣고 있다. 어둠 속을 달리며 이 음률과 가사를 음미하다 보면 가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곤 한다. 우리는 분명 이 바람(성령)의 소리를 듣고 느껴야만 한다. 그럼 여태껏 우리가 보아온 세상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을 느끼게 될지도...


불 세례


서두의 [도마복음]의 구절이 최근에 오래도록 기억되는 건 아마도 물과 바람을 거치고 나면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나는 성령의 소리(음악)를 따라서 쏟아내는 글 속에서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된다. 소리에 심취에서 글을 쓰다가(소설)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기가 막힌 생각과 발견에 놀라움을 경험하기도 한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 Lewis –


그래서일까 C.S. 루이스의 말이 너무 와닿는다. 일기에서 시작한 글이 에세이가 되고 독후감이 되고 칼럼이 되고 또 소설로 이어지면서 내 글이 사소함에서 방대한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보통 경험(체험)을 통한 깨달음과 지식(독서)을 통한 깨달음을 통해 삶을 채워나간다. 

in the writing

자신의 경험(체험)을 통해서만 세상을 판단하는 사람은 가장 우둔한 사람이다. 지혜로운 자는 타인의 경험을 통해 자신을 채워나간다. 그것이 바로 독서이다. 책은 한 사람의 역사이고 진정성을 담고 있다. 진심으로 글을 써본 사람을 십분 공감할 것이다. 책은 글쓰기의 연속이자 집합체이다. 글이 맥락을 가지고 오래 많이 쓰려면 몰입이 필수적이다. 몰입은 한 인간의 무의식과 상상과 경험의 융합이다. 거짓으로 혹은 가식으로는 지속 불가능하다. 그렇게 쓴다 한들 독자가 읽다 보면 금방 눈치채고 눈을 돌려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독서는 다른 한 인간의 경험과 정신세계의 요약을 가장 빠른 시간에 소화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너무 많은 인간들의 직접경험(체험)과 간접경험(읽기와 듣기)이 존재한다. 우리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생계와 생존을 위한 경험(체험)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야만 한다. 이 제한된 시간(3.5차원) 때문에 경험(체험)과 지식(독서)으로는 도달하기 힘든 영역이 존재함을 믿게 된다. 그래서 또 다른 영역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의 영역이다. 사람마다 이 무의식의 영역에 다가가는 방식은 모두 다르겠지만 보통 예술적 영역의 도움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내가 음악을 통해 글을 열고 글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에 연결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무의식의 세계에 연결되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상상하고 떠올리게 되며 그런 것에 스스로도 놀라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경험이 주는 환희는 아주 매혹적이다. 그 어떤 금전적 물질적 보상보다도 더 큰 환희를 선사한다. 


문제는 이 환희를 지속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왜냐 현실의 많은 제약들에 의해 계속 방해와 간섭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더 간절해지고 소중해진다. 그래서 일상에서 항상 이 뜨거운 몰입의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나는 이 몰입의 시간이 불의 깨달음을 가져다주고 있음을 믿게 된다. 그리고 이건 물과 바람을 통해서 다가갈 수 있는 깨달음이며 이 불과 친해지면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라 믿게 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마태복음] 7:7 -


나는 오늘도 물과 바람(소리)과 불 사이에서 지나며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씻어내고 감화하고 깨닫는다.


물과 바람 그리고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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