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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Mar 17. 2024

미움과 용서 사이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보다가…

“건망증(기억) 때문에 당신을 만났고, 바로 그 건망증(기억) 때문에 당신을 떠났어요”


- [내 머리속의 지우개] 중에서 -


사라지는 기억 때문에 시작된 사랑, 그리고 사라지는 기억 때문에 맞이한 이별.


사랑받고 자란 대기업 커리어 우먼과 가족에 대한 미움을 품고 살아가는 노가다 목수의 사랑이야기가 상념들을 불러온다. 우연히 다시 보게 된 영화였다. 거의 20년이 다 된 영화(2004년)이다. [클래식]과 함께 한국 멜로 영화의 고전이 되었다. 하지만 원작은 일본에서 방영한 단막극 <pure soul:나를 잊어도>이다. 내가 좋아하는 김영하 작가가 이 영화의 각색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다시 보니 모든 것이 새롭다. 명작은 다시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불혹에 목수가 되어 목수가 주인공인 영화를 보니 이해와 공감은 백배가 된다. 영화 속 주옥같은 대사들을 20년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기억이 사라지면 영혼도 사라진데요" [내 머리 속에 지우개] 중에서.


나는 일상에서 글감을 찾기도 하지만 책과 영화에서 글감을 많이 찾는다. 그런데 책과 영화에서 글감을 찾을 때는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다. 행간 혹은 장면 간 떠오르는 여러 가지 영감들 중에 딱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메모해 놓은 여러 문장과 찍어놓은 여러 장면들이 많지만 모든 것을 다 가져갈 수 없다. 딱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그 하나로부터 모든 글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삶은 모든 것을 가지려 하면서부터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포기하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끌어안고 가려고 하면 결국 모든 것을 잃 수도 있다.


미약함에서 위대함으로


한 문장과 한 장면은 넓은 세계로 넘어가는 좁은 관문과 같다. 좁은 한 가지의 통로를 통과해서 모든 영역으로 연결되는 것과 같다. 세상 모든 위대한 발견과 깨달음이 한 사람의 머리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위대한 발견과 깨달음은 여러 사람과의 대화나 토론 혹은 협업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누군가 한 사람이 위대함으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필요한 것이다. 결국 한 사람의 머리에서 모든 것이 정리된다. 나의 글도 항상 그랬다. 한 사건, 한 문장, 한 장면에서 떠오른 영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문단이 되고 한 편의 글이 되고 또 시리즈가 되고 장편이 되었다. 모든 시작은 미약하다. 미약함은 위대함이 반드시 지나와야만 하는 관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미약함을 함부로 여길 수 없게 된다. 세상의 모든 미약한 존재에 이 위대함이 숨어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럼 미약한 것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A true carpenter... [내 머리속에 지우개] 중에서

진정한 목수는 자기 마음의 집을 잘 짓는 사람이래”

(A true carpenter is the one that can build a house in his heart)


- [내 머리속의 지우개] 중에서 -


실력 있는 목수는 현실 세계(육체, Offline)의 집을 잘 짓는 사람이다. 하지만 진정한 목수는 이상 세계(정신, Online)의 집을 잘 지어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세계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세계 이 두 세계를 오고 가며 현실과 이상이 조화롭게 연결되는 목수가 되어야 한다. 실력 있지만 이상이 없는 목수가 한 여자를 만나 이상적인 사람이 되어 간다. 하지만 과거와 미래가 사라져 버린 여자는 이상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끌어안는다.

"You know Jesus, right?"

“철수!  너 예수 알지 예수? 예수도 목수였다는 거 알아? 목수는 신성한 거야”

 

 - [내 머릿속의 지우개] 중에서 -


철수(남자 주인공)는 7살 때 절(사찰)간 목수에게 버려진 고아 아닌 고아로 자란 사내다. 절을 짓는 목수는 목수 중에서도 최고의 목수로 친다. 대목장(大木匠) 혹은 줄여서 대목(大木)이라고 부른다. 절(사찰)을 짓는 목수는 못을 쓰지 않는다. 목수를 상상하면 망치로 못질하는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나의 브랜드 이미지(BI)도 망치와 연필인 것처럼 목수 하면 망치를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사실 목수의 상징은 삼각자(Set square)이다.  대목은 못질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무를 자르고 깎아서 정교하게 끼워 맞춘다. 나무와 나무가 맞물리고 끼워지면서 자연스럽게 하중을 지탱하고 서로를 붙잡아 두도록 재단하고 시공한다. 이건 아주 정교한 작업이며 치밀한 측량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래서 대목은 망치가 아닌 삼각자와 줄자 그리고 연필만 들고 돌아다니며 모든 것을 파악한다. 수평과 수직을 확인하고 그리고 거리와 길이를 표시하고 측량하며 모든 것을 주관한다. 실력 있는 목수는 몸이 아닌 머리로 일을 한다. 몸은 그저 거들뿐이다.

Set square (삼각자)

그 머리가 사람들까지 컨트롤하게 되면 진정한 대목장이 된다. 우리는 그런 역할을 하는 목수를 현장에서 십장(十長 : Foreman)이라고 부른다. 한자 뜻 그대로 10명을 주관하는 우두머리를 의미한다. 건축 현장의 총감독이다. 그러고 보면 예수가 왜 목수의 직업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가. 목수는 집을 짓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 즉 구심점이 되는 직업이다. 일도 전체에서 부분까지 빠삭해야 하고 사람도 잘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집이 튼튼하고 정교하게 지어지는 법이다. 직업은 소명과도 연결된다.


“너 진짜 목수 가짜 목수 어떻게 다른지 알아? 목재소에 가보라고 가짜들은 말이 많아요 나무 하나 주면은 마디가 많네 삐뚤어졌네 옹이 투성이네”


-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중에서 -


나는 이제 갓 데모도 티를 벗은 소목(小木 : handyman)에 가깝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런 대목의 기술과 안목 그리고 감각은 한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십 년에 걸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고통과 시련을 동반한 오랜 시간을 견뎌야만 한다. 나는 호주에서 이곳저곳 수없이 많은 건축현장을 돌아다니며 적지 않은 목수들을 만났다. 말 많은 목수, 힘 좋은 목수, 재치 있는 목수, 예술적인 목수 등등 목수의 성향이 가지가지이다. 그런데 말 많은, 불평불만이 많은 목수치고 제대로 된 목수가 없다는 건 확실하다. 불평할 시간에 더 고민하고 생각하는 목수가 제대로 된 목수이다.

"결을 보는 거야"

“진짜는 말이야 결을 보는 거야 결이 뭐야 가능성이야 그걸 볼 줄 알아야 진짜 목수라는 거야”


 -  [ 내 머리속의 지우개] 중에서 -


나무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은 나무에 난 상처들, 즉 옹이만을 본다. 겉만 보고 나무의 가능성을 판단하는 소목이다. 하지만 대목은 나무를 찬찬히 가까이에서 드려다 본다. 그 나무의 결을 보는 것이다. 진정한 목수는 나무의 상처를 보지 않고 나무의 결을 보고 그것을 집을 짓는 중요한 곳에 사용한다. 커다란 옹이가 있는 고목이 집의 기둥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더 멋있고 고풍스럽지 않은가. 상처를 품고 일어선 나무가 더 견고한 법이다. 또한 더 큰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나무옹이


“넌 말이야 옹이 투성이었어 지금도 옹이 투성이고 근데 난 결을 본 거야 뭔 말인지 알아 인마!”


- [내 머리속의 지우개] 중에서 -

 

남자의 장인이 그에게 말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상처를 가지고 있다. 큰 상처도 있고 작고 많은 상처도 있다. 하지만 그 상처에 집착하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옹이는 나무의 일부분일 뿐이다. 전체를 봐야 한다. 상처가 많음에도 오랜 시간 꾸준히 나이테를 늘려가며 한결 같은지를 봐야 한다. 그것이 나무의 결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능성이다. 여자는 남자의 그 가능성을 보았고 그 여자의 아버지 또한 그러했다. 사랑과 인정은 남자를 성장시킨다.


“용서란 미움에게 방 한 칸만 내어주면 되는 거니까”

(Forgiving… is giving your hate just a little room in your heart)


-    [내 머리속의 지우개] 중에서 –


영화는 기억을 통해 사랑과 용서를 이야기하고 있다. 기억(시간)은 사랑과 미움을 만든다. 누군가는 기억 속에서 사랑을 키워가고 누군가는 기억 속에서 미움을 쌓아간다. 미움이 스며들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용서로 미움을 품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된다. 그것이 바로 과거 나사렛 예수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사랑이다. 배신을 용서하고 미움을 품는 사랑. 그래서 너무도 어렵다.

"가족?"

남자의 삶을 짓누르고 있던 가족을 향한 미움은 결국 사랑을 통해 용서로 향한다. 과거 남자의 기억은 미움을 만들었고 또 여자가 만들어준 기억은 사랑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미움을 품고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에 이르렀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요한복음] 13:34 -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하고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는가? 그럼 당신은 지금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마태복음] 5:44 -


그럼 이 기가 막힌 말이 좀 이해가 되지 않을까?

 

미움과 용서 사이에는 사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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