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출근길, 광석이 형의 노래가 상념을 불러낸다. 광석이 형은 분명 음악에 삶과 영혼을 불어넣은 것 같다.
요즘 먼지와의 사투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오래된 창고를 레노베이션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오랜 시간 쓰지 않은 창고 안은 온통 먼지로 가득 차 있었다. 공사를 하는 건지 청소를 하는 건지 모를 정도다. 오래된 벽과 프레임을 뜯어내니 먼지가 쏟아진다. 너무 오랜 시간 쌓여온 먼지가 빗물을 만나 흙처럼 굳어서 팀버 프레임에 들어붙었다.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긁어내는 느낌이다. 먼지가 쌓이고 쌓이면 흙이 된다. 그럼 더 이상 바람에 날아가지 못한다.
먼지 속에서...
낡은 벽채 안은 거미줄과 온갖 벌레들의 보금자리였다. 빛이 새어 들고 어둠 속 먼지 속에 묻혀있던 것들은 날벼락을 맞았다. 좋고 아늑하던 시절은 다 갔다. 이제 먼지와 함께 떠나야 한다. 죽지 않으려면.
마스크를 쓰고 장갑을 끼고 빗자루로 곳곳의 먼지를 털어내고 청소를 하는 것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창고 안은 온통 먼지로 뿌옇게 변해버렸다. 그 먼지를 밖으로 빼내려 전동 블로워 (Blower)를 불어서 먼지를 밖으로 날려 보냈다. 뭉쳐있던 먼지들은 바람에 흩어지며 하늘로 퍼져나가며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먼지는 흩어지는 순간 먼지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곳곳에 먼지를 털어내니 이제 비로소 창고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오랜 세월을 견딘 흔적들이 곳곳에 드러났다. 사람이 쓰지 않는 건물은 더 빨리 노후화되고 황폐해진다. 벽은 곳곳에 곰팡이가 슬고 팀버(목재) 프레임 곳곳은 흰개미가 먹어 종이짝처럼 으스러진다.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필요해 보인다. 낡고 오래된 것이 새로워지려면 먼지를 털어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호주에 와서 적잖은 시간 청소를 했다. 홈청소부터 이사청소, 학교청소, 이니셜청소 등등 갖가지 청소를 다 해봤다. 이제 웬만한 청소 전문가가 다 되었다. 청결하기로 유명한 한국인들은 청소업에 특화된 듯하다. 호주에서 가장 잘 나가는 한인도 청소로 부자가 되었을 정도로 이다. 청소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돈이 된다. 꾸준하다. 코로나19가 덮쳤을 때도 청소업은 살아남았다. 끊임없다. 왜냐? 먼지는 계속 쌓이기 때문이다. 먼지는 계속 털고 쓸어내야만 하는 존재다. 그래서 먼지는 계속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 하지만 우리는 먼지(Dust)로 만들어졌음에도 먼지처럼 살아가지 않으려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된지라”
- [창세기] 2:7 -
“Then the Lord God formed a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 [Genesis] 2:7 (NIV) -
얼마 전 교회 예배시간에 성경의 창세기를 보다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요즘 나는 성경책을 볼 때 영문 성경과 한글 성경을 함께 본다. 영어공부와 성경공부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성경을 또 다른 각도에서 이해하고 싶어서이다. 작가는 언어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지는 글의 습성을 너무 잘 안다.
과거 내가 중국어를 공부하기 전에 한글은 그냥 소리 문자(표음문자) 일뿐이었다. 중국어는 한자를 피해 갈 수 없다. 그런데 한자를 알고 나면 한글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한글이 소리 문자에서 의미 문자(표어문자)가 된다. 글을 읽을 때 글자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는 한자가 매칭된다. 그러면 단어가 품고 있는 유래 혹은 또 다른 의미들을 알 수 있게 된다. 글을 다각도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번역은 느낌과 의미를 변화시킨다
성경은 한글로 기록된 경전이 아니다. 성경의 원문은 구약의 경우 히브리어와 아람어,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그렇다고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공부할 여력은 없다. 영어만으로도 벅차다. 지구에서 가장 보편적인 언어는 영어이다. 성경도 영어로 가장 많은 번역 작업이 이루어졌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문 성경도 여러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영문 성경을 읽으면서 한글 성경과 많은 차이점을 발견한다. 번역(의역) 과정에서 단어와 서술어등에서 적잖은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한글 성경과 영문 성경은 느낌이 다르다. 느낌이 다르면 의미도 다르게 다가오는 법이다. 왜 한글 성경의 창세기에는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다고 번역한 것일까? 성경 원서에는 분명 ‘먼지’라고 명기되어 있다.
Dust(먼지)와 Soil(흙)은 다른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尘(티끌, 진)과 土(흙, 토)는 글자에서 보듯이 둘 다 흙토자를 포함하고 있다. 그 성분은 같다. 하진만 티끌은 위에 작을소 (小)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정말 흥미로운 사실은 한자의 티끌 진(尘)은 도교와 불교에서는 인간세상(世俗, 세속)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시간’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영문 성경의 창세기에 'Dust’ 이 단어 하나로 찾아낸 이 모든 사실들이 놀라웠다. 먼지는 시간에 갇힌 인간 세상의 작은 존재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왜 한글 성경은 먼지를 지우고 흙으로 바꾸었을까?
인간은 먼지(티끌)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신이 먼지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문장과 신이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문장은 확연히 다른 느낌과 의미를 준다. 나의 어린 시절 교회에서 가르쳐준 기억 속에는 창세기 속 인간 탄생 스토리는 항상 하나님이 찰흙을 가지고 인간의 형상을 빚으시는 모습을 상상하게 했다. 만약 그것이 흙이 아닌 먼지였다면 이런 상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흙으로 빚으사...
흙과 먼지는 그 화학적(과학) 성분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문학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는 아주 다른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먼지의 의미는 부정적이다. 일상에서 먼지는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있는 존재의 또 다른 말이다. 먼지가 쌓이고 습기를 머금고 질량이 늘어나면 그 중력의 힘에 의해 서로를 누르며 무거워진다. 그럼 그건 흙이 된다. 흙은 무거운 존재다.
흙은 정착을 의미하고 먼지는 유랑을 의미한다. 흙은 농경사회를 대표하는 단어이고 먼지는 유목민이 사는 사막이나 불모지를 떠올리게 한다. 인류의 시작은 수렵 채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인류는 한 곳에 머물 수 없는 존재였다. 계속 움직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태초에 신은 인간을 만들고 풍요로운 에덴동산에 정착시켰다. 그곳에서 부족함 없이 풍요와 안식을 누리며 살게 해 주었지만 인간이 신에 뜻을 저버림으로써 그 정착과 안식의 공간에서 쫓겨나 끊임없이 떠도는 삶이 시작되었다.
그러다 인간은 농경사회를 맞이하고 다시 먼지가 아닌 흙과 함께 한 곳에 정착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먼지의 삶을 거부하고 흙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건 또다시 신의 뜻을 거부한 것이 아닐까? 농경사회는 잉여생산물을 만들어 내었다. 그때부터 부의 개념이 생겨났다. 그때부터 인간의 또 다른 욕망(소유욕)이 생겨났다.
직역과 의역 사이
이처럼 성서는 지역과 환경에 따라 의역(意譯 :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고 판단해서 번역함)되어 줄기는 같지만 가지(디테일) 다른 의미를 만들어 냈다. 직역(直譯 :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에 충실하게 번역)은 문화와 환경이 다른 곳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해되기 힘들 수 있다. 그래서 의역이 필요하다.
그래서 농경사회의 한국인에겐 먼지보다 흙, 그리고 땀 흘리는 고생은 한 곳에 정착해 논과 밭을 가는 노동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사실 창세기의 저주받은 인간은 먼지처럼 떠돌며 채집하고 사냥하는 이동(여행)하는 인간에 더 가깝다.
그래서 의역(번역자의 의도와 생각이 포함된)은 원서의 의미를 오역하게도 한다. 번역자가 원작자의 생각과 의도를 완전히 꿰뚫어 볼 수는 없다. 만약 원작자가 사라졌다면 의역은 원서의 의미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또한 원작자가 그 생각과 의도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쓴 글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번역은 아주 중요하다. 원서의 원래 의미(원작자가 생각하며 쓴 의미)를 완전히 똑같이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얼마나 가깝게 번역하느냐는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번역 또한 편집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원작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 편집이다. 편집의 예술이다.
흙과 땅
나는 먼지가 더 마음에 든다. 흙은 너무 무겁다. 흙은 땅과 연결된다. 땅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너무도 집착하고 얽매이는 단어이다. 땅은 과거 논과 밭 그리고 현대의 공장과 건물을 상징한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생긴 건 인간이 얼마나 이 땅이라는 것에 집착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수렵사회-> 농경사회 -> 산업사회 ->???로 이어지는 동안 땅의 가치는 미친 듯이 치솟았다. 화폐의 가치에 비교해 노동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동안 땅의 가치는 평가절상 되어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노동은 자본을 창출하고 자본은 자본을 증식하며 그 비대해진 덩치를 땅에 저장한다. 그리고 지금은 너무도 비대해진 자본들이 또 다른 갈 곳을 찾아다닌다. 요즘 같은 시기는 그곳이 암호화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토지 독점권(사유)을 가진 사람들은 사실상 그 토지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소유한 것이다”
- 헨리조지 [진보와 빈곤] 중에서 -
[진보와 빈곤]에서 부의 불평등의 시작은 바로 이 땅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주와 소작농에서 시작한 불평등은 자본가(공장주, 건물주)와 노동자의 불평등으로 이어졌다. 앞으로 기후변화와 전쟁등의 재앙으로 땅이 황폐해지면 또 다른 무언가가 이 땅의 존재를 대체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건 분명 지금의 불평등을 이어가는 것임은 분명하다.
세상엔 헤아릴 수도 없는 부와 풍요가 넘쳐나고 있지만 또한 지독한 가난과 빈곤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이 모든 게 우연의 결과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태초에서 시작된 먼지의 운명을 거부하고 흙의 운명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