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버지에 대해 모독하는 자들은 용서받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구든지 아들에 대해 모독하는 자들도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성령(Holy spirit)에 대해 모독하는 자들은,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 도마복음 44장 -
Jesus said,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father will be forgiven, and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son will be forgiven,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ot be forgiven, either on earth or in heaven."
기독교에서 성부(聖父, 아버지)는 하나님이고 성자(聖子, 아들)는 예수 그리스도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마지막은 성령(聖靈, Holy spiriit)이다. 공관복음(마가, 마태, 누가)에서도 공통적으로 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받기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도마복음은 성부와 성자를 부인할지언정 성령만은 거역하지 말라는 말로 성령의 중요성을 더욱더 강조한다.
도대체 그 성령이 무엇이길래?
아버지가 아들(예수)을 이 땅에 보내고 그가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간 지 이제 거의 2,000년의 시간이 다 되어간다. 인류 역사상 그 보다 더 영향력이 있는 자를 찾아보긴 힘들다. 비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청년 목수가 되어 어디선가 젊은 시절을 불태웠을 것이다. 그의 청년시절(10~20대)의 약 20년간의 청년 예수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가 다시 인간의 역사에 등장해 전도 여행을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30세 무렵이었다. 그리고 3년가량의 공생애(公生涯)의 기간 동안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임팩트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는 청년시절 동안 지구 어딘가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또 경험했을 것이다. 아마 그 시간은 예수가 인간 세상을 알아가는 시간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는 인간들이 알고 숭배하고 찬양하는 것들이 자신이 느끼고 의식하는 아버지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 또한 느끼지 않았을까? 그 괴리의 시간 속에서 많이 괴로워하고 혼란스러웠을지 모른다. 그 시간은 청년 예수가 아버지가 보낸 (보이지 않는) 성령의 바람과 소리를 듣고 그것에 부합해 가는 시간이지 않았을까?!
나에겐 가려진 예수의 일생에 대한 미스터리가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보이지 않으면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는 더욱더 미스터리하고 매력적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나는 언제부터인가 보이는 것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고 있었다. 이제는 보이는 것에 대한 관심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이 더 커져버렸다. 그래서 현실의 삶에 다소 소홀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현실을 무시하면 벌어지는 처참함을 잘 알기에 둘 사이를 오고 가는 오락가락한 삶을 이어간다. 그리고 이게 나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아니 최선의 ‘삶’이라 생각한다. 요즘은 현실의 일상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뜨거운 하루의 노동이 끝나고 물속에서 몸을 식히고 지친 몸을 뉘었다. 그리고 무심결에 찾은 영상이 지친 몸을 다시 일으켰다. ‘이효리’의 졸업식 축사 영상이었다. 영상 속 이효리의 연설을 보다가 머릿속에 무언가가 연결되며 상념들이 솟구친다. 정리되지 않은 상념들을 정리해 보려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이효리의 국민대 졸업식 축사
“그 누구도 아닌 여러분 자신이며 누구의 말보다 귀담아들어야 되는 건 여러분 자신의 마음의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 이효리의 졸업식 축사 중에서 -
내가 신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성령’의 존재에 관한 것이었다. 성령(聖靈)을 순우리말로 표현하면 '마음의 소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성령’은 일반인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왜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는 수많은 그림과 글과 영상이 난무하기에 우리의 머릿속에 뚜렷하게 혹은 희미하게나마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이 ‘성령’이라는 것은 도무지 그 어떤 이미지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삼위일체 (Holy trinity)
삼위일체, (성부≒문학, 성자≒예술, 성령≒음악)
그래서 나는 스스로 나만의 개념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문학(글)’이고 아들은 ‘예술(그림 or 조각)’이며 성령은 ‘음악(소리)’이라고. 이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이 ‘성령’의 의미와 존재를 최근에 음악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찬양을 좋아한다. 넓은 공간에서 목이 터져라 소리를 내지르면 머리부터 몸까지 후끈 뜨거워졌다가 후련해지고 비워진다. 과거 한국에서 종종 교회를 나갈 때도 오로지 이 찬양 때문이었다. 그 어떤 의미와 감흥도 주지 못하는 목사의 설교는 나에게 그저 자장가일 뿐이었다. 나에게 들리는 목사의 설교는 마치 자기 자랑처럼 들렸다. 자신 안에 소리와 자신을 말하지 않고 성경 속에만 갇혀서 그것을 읽고 설명했다. 마치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시켜 교과서를 읽히고 그것에 대한 주석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학생들은 교과서 곳곳에 선생의 설명을 빼곡하게 메모하고 노트해 그것들을 달달 외우며 시험을 준비했다.
“형제님~ 어디 가세요?”
“집에요”
“네?!”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찬양이 끝나고 교회를 떠나려는 나를 막아선 집사가 나에게 말했다. 그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고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설교 말씀 들으시고 은혜받으셔야죠”
“이미 다 받은 거 같은데요”
“네?!”
내 말을 들은 집사는 어이를 찾아서 제 자리로 돌려놓을 줄 알았는데, 어이를 찾긴 글렀다는 표정으로 변해버렸다. 물론 나도 때와 장소에 따라 지켜야 할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타인에게 불쾌함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그분의 그런 표정을 또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찬양이 끝나고 예배당에 앉아서 숙면을 취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나면 나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그건 다시 찬양 음악이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찬양이 없었다면 나는 교회라는 공간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이효리의 국민대 졸업식 축사
“누구에게 말로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으로 보여주시는 분들이 저에게는 더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 이효리의 졸업식 축사 중에서 -
말로 세상을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려 드는 사람들은 너무 날로 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말수가 없는 사람에게 더 많은 궁금증이 생긴다. 그래서 말없는 사람 곁에 가면 내가 말이 많아진다. 그 말이란 게 그 사람을 알고 싶어 하는 말이기에 대부분 질문형으로 시작된다. 대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굳 스피커가 되려면 굳 리스너가 먼저 되어야 하는 법. 굳 스피커도 언제나 실수가 있기 마련이다. 말은 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다. 글은 퇴고하고 수정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과거에 내가 쓴 글들을 자주 들여다본다. 그때마다 어색하거나 맞춤법이 틀리 곳을 그때마다 수정하고 업데이트(개정) 한다. 누구나 그렇지만 우리는 정치인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 같은 시기엔 더욱더.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들의 말 바꾸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만큼 말은 믿을 것이 못 된다. 말 많은 사람은 세상을 쉽게 살려는 인간들이다. 하지만 말은 부메랑임을 명심해야 한다.
음악(성령) 이 글(아버지)을 부르다
음악(찬양)에 이끌려 다닌 공간 속에서 발견한 것이 글이었다. 음악이 끝나면 책(성경)을 펼쳐야 하는 공간이 교회이다. 학교 종이 '땡땡땡' 울리면 교과서를 펼치듯이. 물론 나는 책을 펼치는 순간 잠들었다. 그때는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성령만 충만하고 그렇게도 선명하게 눈앞에 펼쳐지는 아버지(성부)나 아들(성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전혀 의식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하나님과 예수는 그렇게 나에게 오랜 시간 철저히 무시를 당했다. 웃긴 사실은 성령에 충만해 있으면서 성령이 뭔지도 모르는 시간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그리고 최근에서 이 성령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부터였다. 나는 음악이 없으면 글을 쓸 수 없다. 노트북을 펼치고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으로 귀를 막고 안정과 평안이 찾아드는 가사 없는 뉴에이지 음악이 귀 속을 통과해 나의 뇌 속 편도체를 자극하고 해마 깊은 곳의 기억들을 끄집어낸다. 그러면 전두엽의 운동 피질이 나의 손에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은 하얀 화면 위에 검은 획들로 채워나간다. 획들이 연결되고 이어지며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고 문단이 되면서 의미가 된다.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일상과 관계에서 멀어지면서부터였다. 한국에선 바쁜 일상과 수많은 역할과 관계 속에서 현실의 삶을 쫓아가기 바빴다. 삶의 영상(Running time)은 계속 늘어나고 길어지는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건 내가 편집할 시간(여유)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삶을 바라보려면 삶에서 잠시 떨어져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이건 우리가 외부 컨설팅과 상담을 받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우리는 시스템과 삶 속에 묻혀 있으면 그 시스템과 삶을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바라볼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내부인이 아닌 외부인의 시각에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방법 중에 하나가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사색하고 글을 읽고 쓰는 것 혹은 예술(음악과 미술등)을 행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시스템과 삶에 쫓기듯 살다 보면 그들만의 리그가 되고 폐쇄적인 사이비가 되고 그 속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오지 않는 다른 이들을 이상하게 바라본다. 그럼 서로가 이상한 존재로 여기게 되고 반목과 갈등만 늘어간다. 세상이 냉혹해지는 이유이다.
나는 음악을 듣고 노래를 부르며 항상 성령과 함께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이 성령인지 몰랐다. 하지만 내가 글(아버지)을 쓰면서 음악이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알게 되었고, 이건 성령이 없으면 글을 쓸 수 없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이 무의식의 시공간과 연결해 주는 순간 글이 폭발한다. 나는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고 납득하지 못해서 계속 알아내려고 했던 그것, 성령이라는 것이 항상 곁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식으로 혹은 배움으로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아니 느끼게 된 것이다.
피에타 조각상
예술과 예수는 미스터리
그리고 요즘 나는 그의 아들에게 관심이 옮겨가고 있다. 요즘 들어 예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다. 예술 작품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여행을 가도 그곳의 미술관은 꼭 들어볼 정도로 예술에 대한 관심이 크다. 그런데 솔직히 봐도 잘 모르겠다. 미스터리이다. 이건 마치 내가 예수를 알려고 해도 예수에 대해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예수란 예수의 전(모든) 생애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말씀과 공생애의 행적, 즉 그의 작품과 기적을 통해서만 그를 알고 있다. 부족하다.
예술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미술관에서 예술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고개가 좌우로 갸웃갸웃 거린다. 잘 모르겠다. 작가가 뭘 의도하고 표현하려는지를... 작가의 설명이 필요하다. 설명해 줘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설명해 줄 작가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 그럼 작가가 살아온 삶(일대기)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럼 그 작품이 이해가 된다. 내가 요즘 미술가들의 전기를 읽는 이유이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보고 작품을 보면 깨달음 같은 이해가 밀려든다.
예술은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삶을 전부 알 수 없고 말씀(작품)과 일부 행적(기적)만 남아있는 예수를 이해하기 너무 힘든 것이다. 그래서 더 미스터리하고 매력적인 존재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더 궁금해진다. 궁금하면 계속 찾게 된다. 궁금한 이성 주변을 계속 맴돌듯이…
알다시피 예수의 그림과 형상은 너무도 넘쳐난다. 우리는 곳곳에서 심심찮게 예수의 이미지와 형상을 볼 수 있다. 중세부터 시작된 예수 그리기와 조각하기는 우리에게 그 이미지와 형상을 못 박아 버린 건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너도 나도 비슷한 예수를 상상하고 꿈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 [욥기] 8:7 -
지독하게 읽지 않던 성경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성경 구절을 하나 떠올리라면 항상 먼저 생각나는 것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기억되는 것들이 있다. 아마 시작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으리라. 보이지 않아서 인지하지 못했던 미약한 것, 그건 바로 나를 감싸고 있는 공기와 바람 그리고 그것을 통해 들려오는 소리(음악)였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 글(아버지)과 예술(아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음악(성령)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단지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
이효리의 국민대 졸업 축사
“나아가서 많이 부딪히고 많이 다치고 많이 체득하세요. 그래서 진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 보세요”
- 이효리의 졸업식 축사 중에서 -
그럼 내가 이렇게 음악을 곁에 두게 된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내가 낯선 세상에 떨어져 부딪치고 다치고 많이 체득하는 과정 속에서 나에겐 위안과 평안이 필요했다. 음악이 그 시공간을 열어주는 열쇠가 아니었을까!? 고난과 시련이 마음의 소리(성령)를 들을 수 있게 했다.
헤드폰을 끼고 음악이 울려 퍼지는 드넓은 공원에 앉아 지평선과 드넓은 하늘을 바라보면 나는 어느새 다른 시공간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수많은 이야기(글)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앞으로도 음악과 성령 사이를 오고 가며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질것임을 믿는다.
당신은 어떤 소리가 들리는가?
세상의 소리가 아닌 마음의 소리(성령, Holy spirit)에 귀 기울여 보시길…
Fin.K.L (Fine Killing Liberty)
P.S. 효리 누나~ 감사해요~ 영감을 주셔서 ^^ 과거 나의 추억의 여신 핑클이 떠오른다. 그때는 성유리였고 이제는 효리 누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