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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Mar 19. 2024

소설과 일기 사이

휴일 같은 평일에...

그녀는 혼자 울고 있었다.... 투명한 눈물이 은빛 구슬로 변했다. 은구슬은 또르르르 굴러내리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 나 버린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설움이 밀려들었다...


                                 - 자작 소설 중에서 발췌 -




쓰던 소설이 또 멈췄다.


소설 속 또 다른 여자 주인공의 눈물이었다. 그녀의 흐려지는 시야를 따라서 과거를 만들어야 했다. 플래시백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녀의 눈물이 담고 있는 사연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 눈물이 품고 있는 사연이 앞으로 풀어갈 이야기를 만드는 중요한 마중물 될 것이기에 그 눈물의 이유를 상상해내야만 한다. 아주 이상적이고 또한 더 많은 이야기를 품을 수 있는 사건이어야 한다. 하지만 상상은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푸시하면 할수록 상상은 해마 속 더 깊은 곳으로 숨어버린다.


항상 이야기는 작은 실마리 하나가 떠오르질 않아서 정체와 멈춤의 시기로 접어든다. 달리는 차 안에선 멀리 보지만 정체된 차 안에선 바로 앞의 차에 막혀 바로 앞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한번 정체가 시작되면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럴 땐 노트북 앞에 앉아 있어 봐야 답이 없다. 머리만 아프다. 신나게 달리듯 써내려 가야 제 맛인 소설이 멈추면 마치 한참 재미있게 보던 영화가 중간에 버퍼링에 걸린 것처럼 짜증이 밀려든다. 그렇다고 어찌할 방법이 없다.  


나는 소설을 내 계획과 의도대로 쓸 수 없다. 물론 그래서 계획서도 없다. 다만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내가 헷갈리지 않으려고 엑셀 시트로 인물 상세와 전체 분량(회차별 글자수) 회차별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요약 정리해 둔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점점 시놉시스와 현재까지의 분량 그리고 스토리라인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나의 모든 이야기는 계획 없이 시작되었고 또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써봐야 알 수 있다.  쓰고 또 쓰다 보면 비로소 그 의도와 의미가 드러난다. 내 글은 그렇다.


그래서 안 써지면 더 답답하다. 그 의도와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의미 없는 글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쓰다가 멈춘 이야기를 덮을 때는 마치 화장실에서 똥을 덜 누고 나온 것 마냥 찝찝한 기분이 하루 종일 이어진다. 방법은 없다. 그냥 다시 써질 날을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쓰다만 소설이 한두 개가 아니다. 이건 인내심과는 다른 별개의 문제이다. 나는 아직 그 시기가 도래하지 않은 것이라 믿는다.


시절 인연(時節因緣)


모든 인연이 때가 있듯이 나의 이야기도 이어질 시기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이고 다시 만날 인연은 어떻게든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이야기도 지금 멈췄다면 잠시 떨어져 있다 보면  다시 이어질 날을 만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건 아마도 아직 내가 더 경험해야 할 혹은 더 읽고 봐야 할 것들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아직 경험하지 못했고 읽지 못했고 보지 못했던 것에서 다시 이어질 스토리의 영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직 열매가 익지 않았는데 열매를 딸 수 없다. 설익은 이야기는 익을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영화 [시절인연] 중에서

소설이 멈추면 일기를...


쓰던 장편 소설이 갈길을 잃고 멈춘 지 며칠이 흘렀다. 화장실을 나오고 뒤가 닦이지 않은 그런 기분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럴 땐 지금처럼 일기를 쓰곤 한다. 종종 이렇게 일기를 쓰다 보면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곤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영감이 반드시 쓰던 소설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기를 쓰다 보면 다른 새로운 글탄생하기도 한다. 일기는 항상 막힌 글을 이어가는 마중물과도 같았다. 그래서 쓰던 소설이 이어지지 않으면 새로운 하얀 백지창을 띄우고 어제오늘 있었던 일들을 생각 없이 써내려 가곤 한다. 그렇게 생각 없이 손가락이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슬며시 상념들이 스며든다.  그럼 일기는 사실이 아닌 새로운 사실들을 만들어 낸다. 사실에 픽션이 더해지거나(새로운 단편) 사실이 쓰던 장편 소설 속에 들어가서 픽션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현실과 비현실이 뒤죽박죽 섞이면서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 낸다.


“근데… 혹시 쓰신 소설이 본인 이야기 아녜요?”

“음… 나도 모르겠어요”

“예?!”


누군가 내게 물었다. 그분은 내가 썼던 소설을 읽은 모양이다. 이제 필명과 본명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항상 의도하지 않은 일들이 생기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이것도 받아들여야 함은 어쩔 수 없다. 이런 상황이 또 다른 글감이 되겠지 하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태도를 가지기로. 그분은 내가 소설을 쓴다는 것도 놀랐지만 썼던 소설을 읽고 내게 물었던 대답에 더 놀란 표정이다. 자신이 쓴 글인데… 자신이 모른다니 어이가 없을 것도 같다. 하지만 사실이다.


그렇다. 나도 모르겠다. 기억은 변형된다. 지금도 계속 변형되고 있다. 이야기 속에 오래 머물다 보면 이게 좀 헷갈린다. 물론 이야기의 시작은 대부분 현실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그런데 이게 쓰다 보면 사실이 아닌 사실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하지만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쓰던 이야기가 멈추거나 혹은 현실에서 시작한 스토리가 공백 혹은 더 나아갈 길이 없을 때 또 다른 시공간의 현실 혹은 상상이 이야기에 개입한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는 한 가지 현실과 또 다른 현실 그리고 비현실이 뒤죽박죽 섞여 버린다. 그런데 그 서로 다른 현실들이 아주 드라마틱하게 연결되고 조화를 이루어 간다. 그럴 때 희열을 느낀다.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무(無)에서 유(有)가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없는 흩어져 있던 유들이 모여서 의미 있는 새로운 유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소설을 쓰는 방식이다. 내 기억 속 혹은 무의식의 상상들이 연결되고 융합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건 아마도 다른 소설가들도 비슷하게 겪는 경험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한다. 뭐 아직 다른 소설가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들도 분명 소설을 쓸 때 현실에서 많은 영감과 에피소드들을 얻고 소설 속에 몰래몰래 옮겨놓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휴일 같은 평일


모처럼 평일의 휴일을 보내고 있다. 일을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차가 뻗어버렸다. 목수는 홀몸으로 일을 할 수가 없다. 공구가 항상 따라와야만 한다. 목수의 가장 큰 단점이다. 목수는 툴이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그냥 손가락과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이런 두 가지 상반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내가 신기하기도 하다. 뭐 아직 작가는 직업이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난 목수 보단 작가가 더 마음에 든다. 왜냐 가볍기 때문이다. 차에 그 많은 공구를 싣고 다니지 않아도 모든 것을 창조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A pen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 Lewis -


그래서일까 나는 이 문장을 믿는다.  [글짓는 목수]의 브런치와 인스타의 메인 문구이다. 내 좌우명과도 같다.


“You(Carpenter) can make any visible things by tools”

-  Carpenwriter -


목수(carpenter)에게는 이 문구가 더 잘 어울릴 듯하다. 목수는 현실의 모든 구조물들을 만들 수 있지만 공구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요즘 하루 왕복 100km씩 100kg이 넘는 공구들을 싣고 여기저기 달리다 보니 붕붕이가 파업을 해버렸다. 퇴근길에 연기를 내고 설사를 하며 멈춰 섰다. 다행히 정비소에서 다시 살릴 수 있다고 한다. 돈만 주면... 돈이 필요하다. 항상 현실의 많은 문제들은 돈으로 해결 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에게 많은 시간과 관심을 쏟는다. 나도 좀 더 관심과 시간을 쏟아야 할 것 같다.

Tools

일을 할 수 없어 생긴 여유로운 시간을 나는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었다. 돈을 벌지 못하는 궁핍의 시간은 상상할 수 있는 풍요의 시간을 선사한다. 평소와 같이 새벽에 일어나 마음을 가다듬고 노트북을 켜고 소설 속 이야기로 빠져들려 했다. 이제 출근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그냥 그 속에 계속 머물 수 있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더라. 신은 나에게 내가 원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이야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난 아직도 이게 참 신기하고 이해할 수 없다. 준비된 상태는 준비되지 않고 항상 준비되지 않은 것 같은 상태에서 이야기가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그래서 나는 신은 장난꾸러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마치 청개구리 같은 어린아이처럼 나를 방해한다. 지금도 방 안에 앉아 소설을 쓰려고 머리를 쥐어짜다가 집밖으로 뛰쳐나왔다. 버스를 타고 창 밖을 보며 음악과 함께 사색에 잠긴다. 등교 시간인가 보다 학생들이 밀려 들어온다. 어느새 버스는 만원이 되었다. 호주에서 이렇게 북적대는 버스는 처음이다.


이색적이다. 버스 안 사람들을 구경한다. 각기 다른 피부색의 학생들이 어울려 장난질에 빠져 있다. 어찌나 시끄러운지 이어폰을 끼고 있어도 들린다. 그런데 내 앞에 앉은 한 중동 남자의 행동이 이상하다. 그 옆에 앉은 동양계 남자는 그 남자의 이상한 행동과 소리에 위협을 느꼈는지 자리를 피한다. 가만히 지켜보니 그 남자는 틱장애를 앓는 사람이었다. 불쾌한 행동과 소리들은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고 소리 내지 못한다. 몸과 입이 통제되지 않는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자신이 얼마나 싫을까. 이렇게 내가 좀 전까지 이렇게 시간이 남아돌아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었던 것처럼…

버스 안에서...

세상 일이 그렇게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지만 원치 않던 것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는 법을 알게 된다면 세상은 정말 살아볼 만한 곳이 되지 않을까? 내가 좀 전까지 글이 써지지 않아 괴로워하다가도  지금 이렇게 버스에서 내려 어딘가에 앉아서 봇물 터지듯 소설인지 일기인지 모를 글을 쏟아내는 것처럼. 항상 예상치 못한 때에 환희가 찾아든다. 내가 의도하거나 계획한 것이 아니지만 지금 이 글이 끝나가고 있는 시점에 나는 크나큰 환희를 느끼고 있다. 원하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 원치 않던 행운을 얻을 때가 있다.   


오늘도 작가는 휴일 같은 평일에 소설과 일기 사이에서 환희를 맛보았다.

다음엔 소설이길 바라본다.


A old man at bus s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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