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도 ep10
"어... 어떻게 알고 왔냐?"
"그게 중요하냐?"
"어랏! 수호형님 찾으셨네"
가인은 PC방 다른 곳을 뒤지다가 뒤늦게 택건과 수호가 서로 마주한 곳에 나타났다. 수호는 가인을 힐끔 한번 쳐다보더니 자신이 물어본 질문의 답을 알았다는 듯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군다.
"좀 땄냐?"
"아니 뭐... 오늘은 좀 운 빨이 있는지 좀 전까지 500불 벌었다."
"아주 그냥 신났구먼, 야! 그럼 그걸로 술이나 사라"
"술...?!"
"그래 넌 친구가 물 건너 이 멀리까지 날아왔는데 술도 함 안 사냐? "
"그... 그러지 뭐"
“뭐 하냐? 안 나가냐?”
“이것만 마저 하고”
“야~ 인마!”
“아… 알았어”
수호는 마치 운빨이 올라가고 있을 때 나타난 택건이 야속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표정이 일그러지며 노려보는 택건 때문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셋은 펍을 나와 이스트우드 한인 번화가의 한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해가 지고 저녁시간이 되어서인지 고깃집 안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대부분이 한인들이다. 모두가 한국말을 쓰고 있지만 모두가 한국인은 아니다. 호주로 국적을 옮긴 시민권자도 있고 호주에서 삶의 터전을 잡은 영주권자도 있으며 공부를 위해 혹은 경험과 돈을 위해 온 학생들과 워킹들도 적지 않다. 여기가 한국인지 호주인지 분간을 하기 힘들다.
건축현장 인부들이 하루 일의 고단함을 불판에 익어가는 고기와 소주로 달래는 모습은 한국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다른 것이라면 그들은 한국보다는 더 눈에 띈다. 형광색의 옷을 입고 있어서 복장으로 직업군을 짐작할 수 있다.
셋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셋은 고기가 불판에 올라간 고기만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수호는 지은 죄가 있어 말이 없고 가인은 눈치를 보느라 말이 없고 택건은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고민 중이라 말이 없다. 그러다 결국 답답한 건 택건이었다. 말문을 열었다.
"너, 집에 안 들어갈 거냐?"
“여기 맥주도 한 병 주세요 빨리요!”
“묻는 말에 대답 좀 하지”
"들어가야지"
"언제?"
"몰라"
종업원이 맥주를 가져왔다. 수호는 갈증이 났는지 맥주를 한잔 가득 따르고 물 마시듯 벌컥벌컥 비워냈다. 그 모습을 본 택건도 앞에 놓인 소주잔을 들어 반쯤 입안에 털어 넣었다.
수호는 소주를 먹지 않는다. 그는 한국인으로 태어났지만 한국사람 같지 않다. 그는 인생의 반을 외국에서 살아왔다. 한국이 싫어 떠난 타향살이가 한국의 것들과 멀어지는 계기가 된 것일까? 보통 한국인은 향수 때문에 한국의 것을 더 찾고 즐기게 마련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김치 냄새만 맡으면 구역질을 낼 정도로 한국인이 친숙한 것들과는 멀어져 있었다.
수호와 택건이 처음 만난 건 대학교 강의실에서였다. 그땐 대학 1학년 새내기로 한창 캠퍼스의 낭만과 자유를 느끼고 있던 때였다. 택건은 중문과 1학년 과대표를 맡아서 하루하루 정신없이 바쁜 과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저기 중문과 1학년 맞죠?"
"근데요? 왜요?"
"동기 맞네. 아니 난 얼굴이 자주 안 보이길래 혹시 타과 학생인가 했지"
수호는 검은색 MLB 야구모자를 쓴 머리를 들어 택건을 바라봤다. 모자창 아래로 검고 윤기 있는 머리칼이 사선으로 내려오며 이마를 반쯤 가리고 있었다. 윤기 있고 검은 머리와는 달리 유난히도 하얀 피부를 가졌다.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매 그리고 날렵한 턱선이 남자가 봐도 잘생겼다는 말이 나올 수준이었다. 그래서일까. 항상 강의실 뒷자리 끝에 앉아 있는 그를 한 번이라도 쳐다보려 수업 시간이면 고개를 뒤로 한 번씩 돌리는 여학생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수호는 학교에 잘 나오지 않았다. 가끔 전공수업시간에 보이면 항상 제일 뒤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 창밖에 경치만 구경하다가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택건은 그런 그가 궁금하기도 했고 또한 과대표라는 직책을 맡고 있기에 일종에 의무감 같은 것에 때문에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던 것이다. 1학년 과대표가 되고 과 사무실 조교에게서 받은 1학년 중문과 재학생 명단에는 80명의 학생이 있었고 단 8명만이 남학생이었다. 수호만 제외한 7명은 모두 다 아는 사이였다.
"오늘 우리 새내기 과총 있는데 와서 같이 술도 한잔하고 얼굴도 익히고 하는 게 어때?"
"난 그런데 별로 관심 없는데..."
“참, 중요한 걸 까먹을 뻔했네. 오늘 신입생들은 모두 공짜라는 사실, 학과 학회비로 충당할 거야"
택건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수호에겐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택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가방에서 만화책을 꺼내 보기 시작했다.
"에이! 같이 가자~ 이쁜 여학생들도 많이 오는데!
"이쁜 여학생?!"
수호는 이쁜 여학생이라는 택건의 말을 따라 하며 눈알을 다시 택건 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심드렁한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둘은 처음 안면을 트게 되었다. 수호는 사실 그런 류의 과 활동과 단체 모임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학교에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어준 사람이 택건이었다는 것에 일종의 감사 같은 예의 차원에서 택건을 따라 과총 술자리에 참석했다.
“야~ 예쁜 여자는 어디 있어?”
“저기 많이 있잖아”
“흐음… 씨발! 당했네”
안타깝지만 수호는 그날 과총 술자리에서 이쁜 여자는 눈에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리고 택건의 시력이 좋지 않음을 확신했다. 수호는 그냥 택건 옆에 앉아서 술만 마셨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날 저녁 그는 가만히 한자리에 앉아서 술자리에 온 대부분의 중문과 여학생들과 대면했다는 것이다. 그는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끊임없는 여자들의 질문 공세를 태연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한 여학생이 화장실을 가려 자리를 비우면 어느새 다른 여학생이 슬그머니 그 자리를 채웠다. 여학생에는 선후배도 없었다. 여자 선배들도 자존심보단 본능에 충실했다. 몇 명 없는 중문과의 남학생들은 그의 등장에 다들 오징어 신세가 되어버렸다. 새로운 테리우스의 등장에 중문과 여학생들은 번갈아 가며 수호 옆으로 와서 유혹의 눈길과 몸짓을 보냈지만 그는 마치 임금이 후궁 다루듯이 등장하는 여학생마다 한 번씩 눈길만 줄 뿐 입맛만 다시며 술잔을 비웠다.
“야! 넌 선배 왔는데 인사도 안 하냐?”
인기가 많으면 시기하는 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 모습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한 중문과 남자선배가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 택건은 수호의 스타일을 미루어 당시 선배 말이라면 꾸벅해야 하는 후배들의 전형적인 역할극이 수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거라 짐작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결국 선배가 건 말시비는 몸싸움으로 번졌다. 그로 인해 과총 뒤풀이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렸고 수호는 중문과에서 선배들 사이에서 소문난 꼴통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물론 그건 남자 선배들 사이에서 만이었다.
그 사건으로 여자들 사이에선 그의 3대 1로 선배들과 싸우면서도 전혀 굴하지 않는 야생마 같은 모습에 더욱 빠져 들었다. 여자들은 겉으로는 그의 비상식적인 말과 행동에 비난조의 말을 쏟아내었지만 그건 단지 수호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숨기고 다른 여학생들의 관심을 꺼뜨리려는 행위였다.
사실 여자들은 관심이 없다면 얘기를 꺼내지도 않는다. 얘기 거리가 너무 많을 나이다.
중문과 여학생들은 둘 이상 모이면 항상 수호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곤 했다. 남몰래 그와의 러브스캔들을 만들기 위해 캠퍼스 곳곳에서 접근하는 여학생들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 그건 비단 같은 과인 중문과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학과와 학부에서도 적잖은 암컷들의 관심을 받았다. 택건은 그런 수호가 부럽고 신기했다.
당시 수호는 캠퍼스에서 "모범 테리우스"라는 별명을 생겼는데, 이 이유인즉 그는 항상 캠퍼스에 모범택시를 타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인문 대학 건물의 입구에 검은색 모범택시가 나타나면 여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야, 넌 돈이 많으면 차를 끌고 다니면 되지 왜 맨날 택시 타고 오냐? 그것도 모범으로"
“그냥 택시는 폼이 안 나잖아”
“헐… 지랄! 야 그동안 쓴 택시비로 차도 사겠다.”
"운전하기 귀찮아!"
“헐… 어이가 없네”
택건은 수호의 예상치 못하는 말과 행동들이 흥미로웠다. 항상 예측 가능한 말과 행동들만 하는 또래들과는 다른 독특한 무언가가 있었다. 한 번은 언제나처럼 수호가 모범택시를 타고 학교에 등교한 날이었다.
“앗! 지갑이?”
자신이 집에 지갑을 놔두고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택시비를 낼 돈이 없었다. 더욱이 그날은 택건도 다른 건물에 교양수업이 있어서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친구가 없었기에 돈을 빌릴 곳도 마땅치 않았다. 물론 모범택시 앞에는 수많은 여학생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수호가 마음만 먹고 손 내밀면 간도 쓸개도 내어줄 여자들이었지만 그는 귀찮은 걸 아주 싫어했다.
그는 택시기사에게 잠시 가방을 맡기고 기다려 달라고 말을 하고는 대학본부 건물의 제일 꼭대기 층에 있는 대학총장실을 찾아갔다. 하필 그때 총장비서가 화장실을 가고 자리를 비운 사이였다. 수호는 노크를 하고 바로 총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똑똑똑”
“안녕하세요 총장님, 저 중문과 99학번 한수호라고 하는데요, 제가 지갑을 집에 놔두고 와서 그런데요, 돈이 좀 급해서 그런데 한 5만 원만 빌릴 수 있을까요?”
“…어 뭐… 뭐라고요?”
“돈을 좀 빌렸으면 합니다, 택시비를 내야 는데, 지갑을 놔두고 와서요, 제가 내일 바로 갚아드릴게요, 혹시 걱정되심 제가 여기 학생증 맡기고 가겠습니다.”
“허허허 거 참! 그래요 여기 5만 원”
“감사합니다. 역시 총장님의 인품이 남다르시다는 소문이 틀리지 않네요”
“허허허, 나도 총장생활 10년 동안 자네같이 남다른 학생은 처음이네.”
수호는 그렇게 대학 총장실에서 5만 원을 빌려서 나왔다. 택건은 나중에 수호가 총장에서 돈을 빌린 자초지종을 듣고는 혀를 내둘렀다. 택건은 수호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리고 다음날 수호는 총장실을 다시 찾아가 빌려간 오만 원과 함께 박카스 한 박스를 건네주고 왔다. 이 소문은 또 금세 캠퍼스 안에 퍼졌다. 그 이후 수호는 캠퍼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내가 뭐 잘못했냐? 학생이 총장한테 돈 빌리면 안 돼? 총장은 학생들이 낸 등록금으로 그 많은 월급 받아먹고살잖아. 그럼 학생들이 월급 주는 사람인데… 그럼 우리가 고객인거지. 왜 우리가 그 사람 눈치를 보고 어려워해야 는 건데? 한국인들은 참 이상해 안 그래?"
택건은 그전까지 사람이 유명해지는 데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선한 행동과 위대한 일을 하는 자와 악행을 저지르고 잔혹한 일을 하는 자였다. 천사 같은 사람 아니면 악마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수호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지만 유명해졌다. 그는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데 유명해지려면 이상해야 한다는 진리를 택건에게 일깨워 주었다.
수호는 보이지 않는 선을 넘나드는 녀석이었다. 그 선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정해주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스스로 정해놓고 지키는 그런 선이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선은 갈수록 많아지고 사람들은 수없이 복잡하게 그어진 선들 안에 갇혀 버린다. 수많은 선들로 좁혀진 공간만큼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도 좁아진 공간에 갇혀버린다.
택건은 수호의 그런 예측 불가능한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에 왠지 모르게 끌렸다. 자신도 한국인이면서 한국인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마치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틀에 박힌 말과 행동만 하는 다른 또래 친구들보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 흥미로웠다. 학교에서 유명한 아웃사이더가 되어버린 수호도 캠퍼스에선 마땅히 같이 다닐 친구가 없었기에 항상 택건과 함께 다녔다. 그때부터 둘은 둘도 없는 캠퍼스 친구가 되었다.
수호는 택건에게 ‘한국인이 아닌 한국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