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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소 Apr 23. 2020

파도는 바다의 일이 아니다

 어떤 바다를 헤엄치고 있나요?

저도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책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저는 바다를 보고왔고,

바다의 일으로 파도를 정의하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당신의 파도는요?



서울에서 목포까지, 목포에서 신안까지.

기차로 한번, 다시 배로 한번, 그리고 섬에서 섬으로 버스를 타고 한번.


시간이 가는 것을 가늠하지 못하던 시기였어요. 처음에는 허겁지겁 달려와 출발을 기다리는 사람들 곁에 서고, 10분 내리 숨을 고르다가 열차에 탔어요. 빨개진 얼굴, 부끄러운 마음, 여유롭지 못한 상태로 나와서 조급한 행동, 이런 나를 보면서 더 조심스러워졌지요.


 옆자리 사람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 계속 창밖을 바라보면서 풍경을 흘려보냈어요. '나도, 세상도 움직이고 있구나.'를 겨우 알아차리고 그제야 최선을 다해서 보고 들었어요. KTX가 빨라서 휙휙 나무들이 초록빛깔 선으로 휘휘 감기는 모습, 산 한가운데 같으면서도 집이 있고, 다시 들판이 펼쳐지다가 어느새 도시에 도착하고. 열차에 누군가 계속 타고 내리고. 귀가 막히는 느낌이 들면 침을 꿀꺽 삼켜서 퐁 뚫고. 웅성웅성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다 간간히 들리는 웃음소리를 듣기도 하고요. 그러다 잠이 들기도 하고 말이에요. 2시간 40여분 크고 작은 역을 지나서,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대요.


 산 넘고, 물 건너-라는 관용어가 있잖아요. 예전에는 오랜 시간에 거쳐야만 만날 수 있는 지형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차근차근 하나씩 밟아나가도 부족함이 없었을 텐데 꽤 빠르게, 지나쳐왔어요. 스쳐지나온 풍경이 너무 많으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 일주일, 몇 달을 지나온 제게는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무엇을 건너왔다. 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몇 년 만에 탄 배가 그랬어요. 승선해서 아주 가까이서 본 바다, 바다라고 느끼기보다 파도, 파도라고 불리는 물결과 포말, 출렁거림과 울렁임. 선명한 동시에 사라지는 광경을 바라봤습니다. 사라진 자리는 다시 물로 채워지고 연결되고, 결이 되고 물결로 이어지고. 


 지금까지 보고 있던 중에 가장 큰 파도가 일어나는 듯 싶으면 다음 파도는 더 크고, 이제 커질 만하면 더 잦아들었습니다. 예측할 수 없고 지레짐작한다고 해도 맞출 수 없었어요. 당장 이 파도 다음에 어떤 파도가 무슨 모양으로 올지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알 수 없었지만 괜찮았던 건 왜였을까요? 파도와 파도 사이에는 잔 물결, 물과 기포가 있다는 건 알았어요. 뭔가로 채워지고 있는, 그러나 가만히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없는 물을 봤습니다. 


 계속해서 물을 보는 것은 명상의 어느 면과 무척 닮아있었습니다.


 뭔가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리고 한 자리에서 관찰하는 방식이라면 멍 때리기도 일종의 명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음을 인식하고 그 자리에 있다 사라지는 것을 여실히 살피는 일.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생각의 파도에서 잠시 벗어나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그것은 명상과 닮았어요. 생각하지 않으려고 동굴을 파고 들어간다거나 생각이 마구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것을 인지하지 않은 채로 흘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면요.


 우리는 순간을 살되 과거에 있거나 미래에 자주 영향을 받아서 지금을 살기 쉽지 않잖아요. 또 나의 과거뿐 아니라 많은 정보들 속에 살아서 남의 과거, 우리의 미래를 고민하는 때도 많을 테지요. 그런데 그런 퓨즈를 잠시 끊을 수 있는 기회였달까요. 너무 오랜만의 여행이라 계속 낯선 곳으로 이동하는 내내, 걷는 순간들 발가락의 느낌들이 재밌고 신이 났습니다. -아 다시 떠올리니 섬에 도착해서 처음 바다를 걸었을 때처럼 간질간질해요. 작은 입자의 모래에 발을 푹푹 담그면서 바다 소리를 들었나봐요. 신발에 모래가 들어갈까, 까칠거리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않고요.-


 그렇게 도착한 섬,

 쾌적한 펜션 20명이 펜션의 가장 큰 방에 모여서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3박 4일 동안 불릴 이름을 정하고 이유를 서로 나눴어요. 교수님 나이 이상의 어르신도 함께 모였지만 각자 편하게 '자신이 정한 이름'으로 부르자며 먼저 제안하셨습니다. 은택이, 자유인, 젤리 등등 나이와 경력 상관없이 스스로 정한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차례가 돌아오는 동안 어떤 이름으로 해야 할지 어떤 이름이 좋을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정한 이름이 '파도'입니다. 처음에는 바다, 여름 같은 크고 널찍한 이름을 떠올렸는데요. 이상을 닮고 싶지만 현재 저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지 않더라고요.


 저는 복잡한 상태로 이 섬에 왔습니다. 그리고 일부러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앞서 감각에 집중했을 수도 있어요. 진로도 사람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은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한적한 자연 안에서 뭔가 넘실거리는 실마리를 찾고 싶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보면서 신기해하고, 또 어떤 파도가 무슨 모양으로 올지 보며 이입하던 '파도'라는 이름을 선택했습니다. 파도에 올라타고 싶은 상태이기도 하다고, 부딪혀 깨질지 피할지 알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어려울 수도 있겠다고, 어떤 파도를 발견해서 갈지 기대된다며 소감을 나눴어요.

 

 제가 파도에 대해 생각한 건 이정도까지였는데요. 섬에서 한 사람을 만나 파도에 대한 제 생각을 확장하고 정의할 수 있었어요. 




 섬마을인생학교에서 여유로운 시간, 고민을 들여다보고 충분히 잘 새겨보냈다고 회상하지는 않습니다. 학교이니만큼 배우는 것도 프로그램도 가득했어요. 종종걸음으로 시목해변 옆 언덕에 올라갔다가 10여분 즐기곤 내려오던 길, 해변에서 요가-스트레칭-을 간단히 하고는 푸짐한 밥을 먹었던 아침. 몸놀이라는 축구와 비슷하지만 또 규칙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서 최선을 다해 뛰었던 오후, 노래를 부르던 저녁과 함께 밥을 지어 먹었던 숙소 사람들까지. 섬에서 와이파이 없이도 바삐 지냈습니다.


 사실 프로그램 안내서에 소개되었던 자전거를 타고, 별자리를 보기를 기대했지만 날이 흐리기도 하고 준비 중이라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어요. 기대치가 높았던 것도 실망했던 이유 중 하나일 겁니다. 그래도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그 틈에 생긴 혼자만의 시간에 요가매트를 움직여가며 해변에서 소리내어 책을 읽고, 그러다 잠들기도 했어요. 비가 오기 바로 전이라 물안개로 먼바다까지 보이지 않았지만 낮은 파도로 고요한 풍경 속에서 저도 자연스레 고요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아, 비가 조금씩 내리는 날 함께 그물낚시를 하기도 했어요. 그물을 끌어당길 수 있는 여력이 모두에게 있지 않아서 남성의 참여율이 높았습니다. 남성과 여성이 모두 고루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남겼어요.

 하지만 순간순간 온 마음을 다해 놀아서인지 즐거웠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여행 온 아이들과 작은 고기를 보고 밀려드는 파도를 따라가기도, 따라잡기도 하고요. 물이 빠지면서 발, 발목 사이로 남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모래의 감촉을 느껴보기도 하고요. 저는 어렸을 때 바다 곁에 자라지 않아서인지 그런 느낌을 낯설어하고 잘 찾지 않았거든요. 물과 그 주변에 살아가는 생물, 잠시 들린 제가 함께 있는 모습이 아직 어색하면서도 싫지 않았어요. 친해지고 싶었고 나름대로 마음을 붙였습니다. 


 바쁘게 움직였어요. 예상과 달랐지요. 하지만 그 대부분의 일이 자연 곁에서 이뤄졌다는 점이 제게 특별합니다. 그래서 저는 섬마을인생학교를 떠올리면 고요해지기도 하고, 파래지기도 하고, 뿌얘지기도 해요. 자연과의 교감-이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거창할까요-을 시작으로 청년요양원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고 제가 이런 환경에 놓였을 때 조금 더 여유로워지고 느린 생산성을 갖는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섬마을인생학교를, 도초섬을, 신안을 떠나왔지만 저는 이곳 서울에서도 여젼히 이 질문을 슬며시 꺼내서 보곤 해요. 휴대폰 첫화면에 아직도 적혀있을 정도로 유효합니다.


-2편에서 계속 할게요.

(2편을 쓰고 링크를 옮겨뒀어요.)






이 글은 청년인생설계학교, 섬마을인생학교를 다녀온 덕분에 쓰였습니다.

글은 채소의 창작물입니다.
협업 및 제안은 메일을 통해 전해주세요.
고맙습니다.
ⓒ 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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