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에서 느린 사람

아직 봄을 보내지 못했다면

by 채소

안녕. 나의 친구. 이곳은 비가 옵니다. 당신이 있는 곳의 날씨는 어떤가요? 봄비의 위력은 엄청나요! 비 온 뒤 세상은 놀라우리만큼 무럭무럭 자라나 있어요. 활엽수들은 한 뼘씩도 자라는 것만 같습니다.


무성해진 초록 앞에선 저는 자꾸만 고개를 갸웃하게 돼요. 라일락이 언제 다 졌지? 얘네는 언제 이만큼이나 자랐지? 정말 다른 세상이 된 것만 같아요. 당신은 언제 시차를 느끼나요? 전 가끔 지역을 이동하지 않았는데도 발 딛고 서 있는 땅이 흔들리거나 시계가 고장 난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이번 봄비도 제게 그런 감각을 느끼게 해줬는데요. 내 삶의 시간은 좀처럼 가지 않고 이 세계는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았지 뭐예요.


혼자 공상에 잠기다 보면 조급한 마음이 올라와요. 가라앉는 마음을 들여다봐요. 글자를 꾹꾹 눌러서 일기를 쓰고 마음이 달려갈 때는 휘갈겨서 감정을 풀어두기도 했어요. 마음은 남이 알기 쉽지 않으니까 내가 내 마음을 알아주기로 합니다. 종이 위에 한바탕 상태를 펼쳐두고 나니 한결 낫군요.


오늘은 향긋하면서도 단순하지 않은 차를 내어 드립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느린 방식으로 차를 우릴 거예요.


기본이 되는 찻잎으로는 대만 우롱을 꺼내볼게요. 잎이 동글동글하게 말린 모습은 작고 꽤 귀여운데요. 차를 우리면 우릴수록 펼쳐지는 이파리는 큰 편입니다. 조금 길게 우리거나 짧게 우려도 크게 떫거나 써지지 않는 배포가 넓은 차랍니다. 이 우롱차를 마실 때면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안는 느낌이 듭니다. 편안해요.


보드라운 바탕에 목련잎을 더합니다. 목련은 은은한 꽃향과 달콤하면서도 맵싸한 맛을 가진 차입니다. 꽃으로 보면 우아하고 정갈한 모습이었는데, 향과 맛으로 느끼면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요. 저는 목련의 꽃봉오리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걸 보면서 봄을 조금씩 실감하거든요. 그 누구보다 추운 날씨에 꽃 피울 준비를 하는 거니까 용기라는 단어가 어쩌면 톡톡 튀어오르는 무엇인가와 연결되어 있을 것만 같습니다. 부드러운 베이스에 치고 올라오는 맵고 단 맛이 복잡하면서도 즐거운 경험이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스만투스, 금목서를 살짝 얹어줄 거예요. 꽃잎은 참 작은데 향이 짙어서 진한 인상을 남기는 금목서를 아시나요? 향은 만리까지도 퍼진다고 해서 만리향이라고도 불려요. 중국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꽃이라 이 꽃과 함께 차를 말려서 우롱차를 만들곤 했대요. 차가 가진 본연의 향과 함께 꽃의 향이 더해져서 조금 더 복잡하고 오묘한, 진향 향이 남는 차가 돼요. 그걸 오스만투스 우롱이라고 부릅니다. 이 아이디어에 착안해서 마지막에 오스만투스를 살짝 얹어 감칠맛과 복숭아 같은 산뜻함을 더하겠습니다.


오늘은 금목서와 차나무 고유의 향, 목련까지 더해져 복합적인 향과 맛을 느낄 수 있는 차를 내어 봅니다. 냉침 방식으로 느리게, 차근차근, 차갑게 찻물을 내리겠습니다. 조금 느린 세계에서는 더 농엄하고 진하고 느리게 가끔 알싸하기도 한 차를 맛보고 즐겨봐요.


누군가는 복숭아 향을 느끼기도 하는 금목서, 달큰하고 바닐라가 떠오르는 목련, 그리고 우롱이 가진 구수하고도 푸릇한 분위기를 담은 아주 복잡하고도 여운이 오래가는 차가 완성되었습니다.


느릿느릿 길고 진하게 삶을 사는 친구에게 이 차를 건넵니다. 우리들만의 파티를 열어요. 비는 비, 나는 나. 빗속에서도 춤추며 온갖 향과 맛을 보고 들으면서 또 살아보자고요. 느릿느릿 둠칫둠칫 나도 춤을 줄게요.



대만 우롱 | 목련 | 오스만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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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자리

장면 속 이야기를 발견해 차로 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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