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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May 18. 2024

1화 아지트

24시 무인라면가게

새벽을 깨우는 전동스쿠터 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커진다. 

넥워머로 완전무장 한 머리 위에 헬멧을 쓰고 두툼한 장갑까지 낀 태진은 스쿠터를 몰고 컴컴한 새벽 골목길

을 달린다. 밖으로 보이는 거라곤 오직 눈동자 두 개뿐인 태진은 한참을 그렇게 달리더니 조금 갑갑했던지 한 손으로 넥워머를 살짝 내렸다.


 “하~~”


태진은 허공에 하얗게 입김을 내뿜어본다. 넥워머 밖으로 내놓은 코와 입이 금방이라도 얼 듯이 벌게졌지만 태진은 차디찬 이 새벽공기가 좋았다. 이번 주말이 지나면 곧 3월인데 아직 봄이 오려면 먼 듯하다.

2월 말 새벽공기는 여느 겨울과 다름없이 춥고 매섭다. 태진의 마음속만큼이나 꽁꽁 얼어붙은 새벽 골목길.

덜덜덜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우유 상자가 위태위태하게 스쿠터 뒷자리에 실려 있다.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한 달 반이 지났고 우유배달을 시작한 지는 3주가 지났건만 여전히 동네는 낯설기만 다. 태진은 두 곳의 아파트를 맡았지만 이 동네에선 가장 대단지 아파트들이라 우유를 다 배달하고 나면 두 시간은 족히 걸린다.

운이 좋게 배달양이 많은 아파트를 맡을 수 있었던 건 이곳을 담당하던 배달원 아주머니가 암 판정을 받고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태진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던 거다.

누군가의 불행이 태진에게는 운이 좋은 일이 되어 버린 것 같아서 한편으론 미안하고 슬프지만 지금 태진은 남의 처지를 봐 줄만 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지 않으면 할머니와 두 식구가 먹고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아버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초생활수급자에게 지원되는 지원금도 받을 수 없다.

지방으로 일하러 가겠다던 아버지는 처음 몇 달은 매달 생활비를 보냈었다. 그러다 두어 달에 한 번, 세 달에 한 번으로 길어지더니 지금은 생활비와 함께 연락이 끊긴 지 두 달째다. 이젠 아버지에게 연락이 와도 절대 받지 않으리라 태진은 이 동네로 이사 오면서 그렇게 다짐했다.

태진은 아파트 안으로 들어와 스쿠터를 주차하고 함께 싣고 온 카트를 펼쳐 배달할 제품들을 실었다.



 “태진 학생 왔어? 추운데 고생이 많네.”


 “안녕하세요. 얼른 올라갔다 오겠습니다.”


 “뛰지 말고 천천히 해. 날도 추운데 자빠지면 큰일 나.”


 “네.”


이 아파트 경비아저씨들 중에서도 최 씨 아저씨는 유난히 태진을 잘 챙겨주신다. 우유대리점 점장과도 친한 사이여서 태진의 사정을 잘 아는 점장이 미리 귀띔을 한 모양이다.

우유배달을 하며 할머니까지 모시고 사는 착한 소년가장. 어른들 눈에 비친 태진의 모습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 처음엔 그런 시선들이 미치도록 싫었다. 내가 왜, 대체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

아빠가 없는 것도 아닌데... 아니지. 내겐 이제 아빠가 없다. 마음속에서 지운 지 오래다. 태진은 고개를 저으며 배달에 속도를 높였다.




학원가에서 학생들이 한차례 쏟아져 나오고 다시 잠잠해진 시각 밤 9시.

학원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한 상가의 불빛이 환하게 밖을 비추고 있었다.

24시 무인라면가게.

학원 밀집지역도, 아파트 단지 가까운 곳도 아닌 조금은 인적이 드문 이곳에 과연 장사가 될까 싶은 무인라면가게가 있다. 짜장라면의 봉지를 뜯는 준기의 손놀림이 매우 민첩하다. 요즘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닭가슴살과 풀때기만으로 끼니를 때운 준기는  3주 만에 영접하는 라면을 보며 지금 감격스러워하는 중이었다.

라면 끓이는 기계에 버튼을 막 누르려던 찰나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무인라면가게 문이 열렸다.



“아 그러니까 말귀를 존나게 못 알아듣네. 누가 지금 라면 먹재? 그냥 돈으로 달라고 돈으로. “


인근 중학교 교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내 녀석들과 함께 들어오는, 아니 끌려 들어오는 게 더 맞겠다 싶은 저 녀석은 우리 반 최서우?



“최서우?”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중학생 무리들과 최서우의 시선이 일제히 준기에게  꽂혔다.



“니들 뭐냐? 중딩이들 아니야? 하~ 요즘 애들은 이거 위, 아래가 없어. 지금 니들 옆에 있는 그 형님은 고딩이

  거든?“


“아 뭐래. 씨발. 그러셔요. 나이 많이 먹어서 좋으시겠어요.”


“하, 나 이것들 진짜.”


준기의 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걸 보니 역시 요즘 가장 무서운 아이들은 중학생들임에 틀림없었다.

쪽수로 보나 뭘로 보나 준기가 딸리는 건 확실하다. 게다가 비실비실해 보이는 최서우 저 자식은 열트럭이 와도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때 무인라면가게 문이 또다시 열리더니 가게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는 이는 덩치 좋은 태진이었다. 중학교 때까지 하키선수로 활약했던 태진은 웬만한 성인 못지않은 큰 키와 탄탄한 몸을 지녔다.



“야 너 엄태진 아니냐? 와 진짜 반갑다. 친구야. 낮에 학교에서 봤는데도 또 보니 너무 반갑네. “


태진은 ‘뭐냐, 왜 친한 척이야 우리가 언제 그렇게 친했다고’ 하는 눈빛으로 준기를 바라보았다.



“너 마침 잘 왔다. 여기 이 어린놈의 새끼들이 고딩 형아들 삥을 뜯으려고 하네. 이 사태에 대해 넌 어떻게 

  생각하냐.”


준기의 말에 태진은 아무런 말없이 중학생 무리들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힘입어 준기도 가까이 다가가며 이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아 진짜. 뭐야. 야 나가자.”


“아 존나 짜증 나네.”


태진의 눈빛에 기가 눌리기라도 한 것일까. 바로 꼬리를 내리고 줄행랑을 치는 녀석들이다.



“저 새끼들 저거 저거. 말세야 말세. 그나저나 너희들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이냐. “


“라면가게에 라면 먹으러 오지 왜 왔겠냐.”


“아 그렇지? 헤헤. 근데 최서우 넌 어쩌다가저런 중딩이들한테 걸려가지고는.”


“저, 저기. 고마워. 도와줘서. 내가 라면 살게.”


“됐어. 내가 뭘 했다고.”


태진은 고마워하는 서우를 뒤로 한 채 라면을 골라 키오스에 결제를 다.


“야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좋았잖아 친구야. 난 이미 내 라면을 결제해서 끓이고 있단...

  으악  내 라면~~~“


그제야 짜장라면을 올려놨던 게 생각난 준기가 달려가 보지만 이미 라면은 사이좋게 자기네들끼리 들러붙어 까만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아, 3주 만에 맛보는 라면이건만 이게 뭐냐. 에잇”


“내가 다시 사줄게. 다시 골라봐.”


“아니다. 됐다. 몰래 먹으려던 라면이었는데 먹지 말라는 신의 계시였나 보다.  그나저나 우리 다 같은 반이

  네. 하필 여기서 이렇게 만나냐. 신기하네. “


“신기하긴 뭐가 신기하냐. 동네에 있는 면가게에서 만난 게.”


말 많고 오버스럽고 늘 호들갑스러워 내 스타일은 아니다 싶은 준기가 태진은 좀 성가셨다. 무슨 남자애가 저리도 말이 많은지, 생긴 거와 다르게 참 애가 가볍다고 늘 생각했었는데 역시나였다.



“야, 당연히 신기하지 않냐. 하고 많은 무인라면가게 중에 여기서 만난 게. 저기 학원들 몰려있는 번화가 쪽에

  도 무인라면가게가 있는데  여긴 사람들도 잘 안 오고 외지고 그렇잖아. 이런 곳에서 우리 반 친구 둘을 만나

  다니. 너희들 여기 자주 와? “


“나는 일주일에 서너 번은 오는 것 같아.”


서우가 다 끓인 라면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수줍게 말했다.


“난 숙소생활 하니까 자주는 못 오는데 집에 올 때마다 꼭 들리지. 음... 일주일에 한 번쯤? “


“아 맞다. 너 연습생이라고 했지. 근데 다이어트한다고 하지 않았어?  일주일에 한 번씩 라면을 먹어?”


"친구야~ 일주일에 한 번쯤 온다고 했지 일주일에 한 번씩 라면을 먹는다곤 안 했다."


무인라면가게에 와서 라면을 안 먹는다면 대체 왜 온다는 건지 서우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태진의 말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기획사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고 있는 준기의 꿈은 아이돌 가수로 데뷔하는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준기는 데뷔하는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준기와 서우의 눈빛이 동시에 태진에게로 향했다. 너는? 둘의 시선을 느낀 태진은 마지못해 씹던 라면을 꿀꺽 삼켰다.



“나도 뭐 가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그때 라면가게 문이 벌컥 열리고 준기와 태진, 서우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어 목에 걸치며 세 사람을 바라보는 윤소율. 준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야, 윤소율!!!  너도 우리 반이잖아.”



  


무인라면가게


라면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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