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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Jun 16. 2024

5화 사라진 준기

24시 무인라면가게


“할머니!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소율이네 아파트 앞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손자 앞에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벤치 옆에 놓인 리어카에는 폐지들이 절대 떨어지면 안 될 것처럼 꽁꽁 묶여 있었다.



“할머니!!”


화가 난 태진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고 서 있던 소율이 참다못해 끼어들었다.



“야! 엄태진! 목소리 좀 낮춰. 할머니도 지금 놀라신 거잖아.”


소율은 태진을 나무라듯 흘겨보더니 할머니 옆에 앉았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생수 뚜껑을 열어 할머니께 내밀었다.



“할머니, 많이 놀라셨죠. 물 드시고 마음 좀 가라앉히세요.”


태진에게 하던 말투와 다르게 다정하고 따뜻한 말투로 바뀐 소율이 태진은 어이가 없었다.

가정사를 소율에게 다 들켜버린 것만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평소와 다른 소율의 말투와 태도도 태진은 적응이 안 되는 것 같았다.  



“할머니, 이거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아까보다는 많이 침착해진 태진의 목소리에 할머니도 입을 열었다.



“내가 처음부터 이걸 하려던 건 아니고....  공공근로 신청을 해보려고 갔었는데 신청 기간이 지났지 뭐니.

 다음 신청 때까지 석 달은 기다려야 한다는데 그때까지 마냥 놀고 있을 수가 있어야지...

 태진이 너 혼자 고생하는데 이 할미가 조금이라도 보태야지 싶어서..."


“제가 알바 두 개나 하고 있으니까 할머니 일 안 하셔도 된다고 했잖아요.  그러다가 어디 다치시기라도 하면

 어떡하냐고요. “


“미안하다... 우리 손주 혼자 고생하는데 뭐라도 하고 싶어서...

 네 말 안 듣고 괜히 나왔다가 이런 일을 당하는구나. “


“아까 넘어지신 곳은 괜찮으신 거예요?”


“괜찮고 말고. 아무렇지 않아. 걱정하지 말어.”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못하고 태진은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 병원 안 가보셔도 되겠어요? 지금은 괜찮아도 자고 나면 아프실 수 있어요.

 저희 외할머니도 그런 적 있으셨거든요.”


소율이 할머니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아이고, 괜찮아요. 괜찮아. 나 아무렇지 않아요. 그나저나 학생은 말도 참 예쁘게 하네.

 우리 태진이 여자친구?”


“아, 아니에요.”


태진과 소율이 동시에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정색하며 말했다.



“너 뭐냐? 그렇다고 뭘 그렇게 정색을?”


소율이 기분 나쁘다는 듯 태진에게 말했다.


“정색은 네가 더 한 것 같은데.”


태진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할머니를 보니 소율은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소율이 좋아하던 라면을 엄마 몰래 맛있게 끓여주시던 할머니.



'할머니 보고 싶다.....'


“근데 할머니, 왜 이 동네까지 오신 거예요?”


“그게... 우리 동네에서 하면 태진이 너를 마주칠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리고 할미 이런 모습 우리 손주 친구

 들한테 보이면 안 되잖아. 그런데 태진이 네가 갑자기 나타나서 얼마나 놀랐다고..."


“할머니 저 알바하는 식당이 이 동네예요."


“피한다고 이쪽 동네로 왔는데 그렇게 되어 버렸네. 미안하다... 어쩌면 좋으냐... “


“괜찮아요. 저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 할머니가 힘든 일 하시는 게 전 싫다고요.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세요. 아셨죠? “


“그래, 그래. 알았다.”


“그나저나 최강호 자식 그렇게 열받게 해서 보냈으니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냐. “


태진의 물음에 소율도 정신이 번뜩 들었다. 최강호를 잔뜩 열받게 하고 협박을 해서 도망가게 만들었지만  결코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녀석이 아니었다.



“걱정 마. 나도 다 계획이 있단다.”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소율도 지금부터 계획을 세워야 할 판이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건물 지하 1층 계단으로 내려가자 쿵쿵하는 음악소리가 새어 나왔다. 준기가 문을 열자 음악소리가 갑자기 볼륨을 높인 것처럼 크게 들렸다. 음악소리만 들으면 준기의 심장은 쿵쿵 요동을 쳤다. 

연습실에는 준기와 같은 조에 속한 연습생 규민과 유하가 춤 연습에 한창이었다. 준기 손에 들려있는 편의점 봉투를 본 친구들이 음악을 끄고 준기 곁으로 다가왔다.



“왔냐?”


“니들 저녁 안 먹었지? 내가 그럴 줄 알고 삼각김밥이랑 핫바 사왔지롱~~”


준기가 봉투를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야! 너 다이어트 접은 거야? 다음 주 월말 평가야.”


먹는 것에 유독 민감한 유하가 한마디 쏘아붙였다.



“먹고 열심히 연습하면 되지.”


“난 안돼. 먹는 족족 살로 가는 거 알잖아. 내가 얼마나 힘들게 뺐는데...”


“저 새끼 지금 며칠째 셰이크랑 닭가슴살 몇 조각으로 버티고 있어.

 아주 지독한 놈이야. 나는 먹으련다. 쓰러지기 직전이다. “


규민은 다이어트보다 생존이 먼저라며 빠르게 편의점 봉투를 풀어헤쳤다.

준기가 사 온 조촐한 저녁거리 덕분에 잠시 휴식시간이 되었다. 모두 다음 주에 있을 월말 평가 때문에 예민한 상태였다. 준기와 규민도 삼각 김밥을 우걱우걱 먹으면서 말이 없었다.

혼자만 셰이크를 마시던 유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조에서 누가 뽑힐까...”


그 누구도 먼저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됐으면 좋겠어. 내가 될 거야...

마음속으로만 되뇌고 또 되뇌었다.



“유하 넌 연습생 생활 몇 연차였더라?”


“난 3년. 너도 그쯤 된다고 하지 않았냐?”


“응. 나도 3년 하고 두 달 정도 되는 것 같다. 우리 조에서 준기가 가장 오래 했을걸. 그치?“


“음... 난 좀 됐지. 연습생계의 고인 물이라고나 할까. 흐흐.”


“준기 너는 참 긍정적인 거냐, 생각이 없는 거냐. 지금 웃음이 그렇게 나오냐. “


늘 남들이 자신에게 하는 말에는 날카롭고 예민하게 구는 유하는 정작 자신이 남에게 하는 말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마구 던진다. 하지만 준기도 똑같이 예민하게 맞받아치고 싶지는 않았다.

다들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그 마음을 알기에... 다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은 같을 것이다.

하지만 늘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는 밝은 준기도 상처받고 아프다는 걸 알까.

준기도 불면증으로 잠 못 이루고 불안증으로 정신과 약을 먹고 있다는 걸 유하와 규민이 알까.   



“다 먹었으면 이제 연습하자. 난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데뷔해야만 해. 반드시 할 거야. “


유하가 한 모금 남은 셰이크를 마시며 일어섰다.



“그래. 오늘도  뼈가 으스러져라 한번 해 보즈아~~~”


준기와 규민의 파이팅 넘치는 외침에 그제야 유하도 웃어 보였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4교시가 끝난 후 점심시간, 반 아이들이 모두  급식실로 가고 교실에 남은 사람은 서우, 소율, 태진 셋 뿐이었다.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 곳에 모였다.



“백준기 무슨 일인지 아는 사람?”


소율이 먼저 입을 었다. 준기가 어제부터 이틀 째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다. 연습한다고 조퇴를 하고 간 적은 있어도 결석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던 준기였다.



“준기한테 혹시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너 뭐 아는 거 있어?”


태진이 빨리 말해보라는 눈빛으로 서우를 응시했다.



“그게 아니라... 어제그저께가 회사 월말 평가라고 했었거든. 그리고 그날 밤에 내가 궁금해서 평가 잘 봤냐고

 카톡을 보냈는데.... “


“보냈는데? 아 답답해. 나 숨 넘어가겠다. 빨리 말해봐.”


좀처럼 보채지 않던 소율이까지 서우를 다그쳤다.



“아, 미안. 카톡은 확인을 했는데 답이 없길래. 그냥 평가를 잘 못 봤나 했거든.

 근데 그날 새벽 4시 10분쯤인가 카톡 확인을 했더라고.  그리고 답장이 왔는데, 좀 이상해서... “


서우가 보여준 휴대폰 화면엔 짧은 문장이 쓰여있었다.



방향을 잃었어. 길을 못 찾겠어.



“이게 무슨 말이야?”


“나도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어서 너 지금 어딘데? 하고 보냈지. 근데 카톡을 안보길래 학교 가서 물어봐야겠

 다 했어. 근데 준기가 안 왔더라고.  무슨 일인가 걱정하고 있었는데 오늘도 안 나오는 거야.... “


태진의 물음에 서우도 답답한 마음을 전했다.



“담임은 뭐 알고 있는 거 아닐까. 이틀째 결석인데 애들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아무 말 안 했잖아. “


우리 중 제일 똑똑한 소율이 하나씩 정리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담임한테 가서 한번 물어보고 담임도 모르는 눈치면 우리가 어떻게든 찾아봐야 할 것 같다.

 혹시 너희들 준기 집은 알아?”


“집은 모르는데 연습실은 한번 가봤어.”


서우의 말에 소율은 희망의 빛이 조금 보이는 듯했다.



“정말? 잘됐다. 그럼 담임이 모르면 하교 후에 연습실로 가보자. 거기 연습생들한테 물어보면 뭔가 해답이 좀

 보이지 않을까. “


“근데 너 괜찮겠어? 학원은 어쩌고?”


마치 소율의 스케줄을 아는 것처럼 태진이 물었다.



“괜찮아. 오늘 하루 학원에 대충 핑계대면 돼. 그럼 이따 하교 후 지하철 역 앞에서 보자.

 나는 종례 끝나자마자 교무실 들렀다고 바로 갈게. “


“응.”


세 친구들의 얼굴에는 마치 전투에 나가기 직전 병사들의 비장함이 묻어 있었다.




“네?? 퇴출이라고요?”


준기의 연습실을 찾은 세 친구들은 연습생 규민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엊그제 평가 일이었는데 평가 끝나자마자 준기가  신인개발팀에 불려 갔어요.

 우리도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준기가 눈이 퉁퉁 부어서 나오더라고요.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


“그래서요? 그럼 준기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뭘 어떻게 돼요. 준기는 숙소에서도 한참 전에 나간 상태라 쌀 짐도 없고 그냥 그날부로 연습생 계약 종료

 되고 나가는 거죠. “


“말도 안 돼. 그런 게 어딨 어요? 아무리 연습생이라도 계약 기간이라는 게 있는데 그렇게 자기들 마음대로

 계약 종료라니요. “


'역시 소율이 우리 중 제일 똑똑해.'


또박또박 따지는 소율을 보며 서우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저희도 자세한 내용은 잘 몰라요.”


“혹시 준기가 엊그제 나가면서 별 다른 말은 없었나요? 어디로 간다던지 하는... “


“집으로 가는 거지 하고 물었더니 춘천으로 가족 여행 갈 것 같다고 했어요.

 그동안 못한 여행을 좀 가야겠다고요. 근데 가족들과 같이 여행 간 게 아니에요? “


 ”아, 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이만 나가자. “


태진과 서우는 말없이 소율의 뒤를 따라 지하 계단을 올랐다. 밖으로 나오니 지하 연습실과는 공기부터가 달랐다. 저렇게 공기도 탁한 곳에서 준기가 땀 흘리며 열심히 연습했을 생각을 하니 서우는 마음이 아팠다.



“춘천? 왜 하필 춘천이야?”


소율은 계단을 오르면서도 계속 그 생각뿐이었다. 춘천이 고향인가, 왜 거길 간다고 했을까.



“춘천에서 초등학교 땐가 2년 정도 살았다고 했어. 그래서 간 걸까?”


서우는 준기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최서우. 너 언제 백준기랑 그렇게 친해진 거냐?”


여지껏 말이 없던 태진이 입을 열었다.



“그러게. 둘이 언제 그렇게 다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이가 됐던 거야?”


“아 그게... 어쩌다 보니 라면가게에서 둘이 라면 먹다가... 음악 좋아하는 것도 같고 내가 쓰고 있는 곡에 대한

 조언도 듣고 하다 보니까...”


“너 곡도 써? 헐. 최서우 너도 음악 해?”


태진과 소율이 동시에 놀란 눈빛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준기와 서우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래도 이 녀석들은 자기만의 꿈을 위해 조금씩 걸어가고 있었구나.



“아... 난 얼마 안 됐어. 아직 걸음마 수준이라서 부끄러워...”


그때 서우의 호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을 확인한 서우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준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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