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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Jun 29. 2024

7화 바닷가의 추억

24시 무인라면가게

"와, 바다다. 얘들아, 바다가 보여."


택시 안에서 꾸벅꾸벅 졸던 준기가 눈을 번쩍 떴다.



"뭐? 바다? 어디 어디. 이야~~"


춘천에서 버스를 타고 강릉까지, 거기에서 또다시 택시를 타고 소율, 태진, 서우, 준기 네 명의 친구들은 어느 한적한 어촌 마을에서 내렸다. 아이들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바다로 돌진했다. 

누구 하나 말릴 틈도 없이 당장이라도 바다에 뛰어들 기세였다. 마침 일몰 시간에 딱 맞춰서 도착하는 행운도 주어졌다. 서해의 일몰처럼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 전체가 붉게 물든 그런 멋진 장관은 아니었지만

나름 소박하고 잔잔한 맛이 있었다. 해변에 서서 해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에게서 어딘지 모를 

쓸쓸한 향기가 났다.



"너무 감동이다. 이 풍경 자체가~ 얘들아 나 눈물 나려고 그래. 이것 좀 봐봐."


준기가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쥐어 짜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무슨 눈물씩이나. 하여간 오버하시긴."


"이런 T 같으니라고. 소율이 너는 아무리 봐도 T야. "


오버하지 말라는 소율의 말에 준기가 MBTI까지 들먹이며 삐진 척을 했다.



"그래도 바다 보니까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고 너무 좋다. 소율이 덕분에 동해바다 진짜 오랜만에 오는 것 

 같아. 이런 즉흥적인 일탈 난 꿈도 꾸지 못했는데... 얘들아 나 지금 너무 좋아."


"그치? 너무 좋지? 역시 통하는 건 서우 밖에 없다니까. 근데 엄태진 너도 이 풍경에 반한 것 같은 표정인데?

 어때? 너도 너무 좋지?"


말없이 바다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태진의 얼굴도 약간 상기된 듯했다.



"좋네."


그럴 줄 알았지. 역시 엄태진다운 단답형이다.



"서우야, 우리 T들하고는 말을 말자."


소율과 태진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오랜만에 탁 트인 바다를 보니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이제 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 가장 아닌 가장 노릇을 하느라 힘들어도 힘들단 말을 할 수 없던 원망할 시간조차 사치라 여겼던 태진에게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서고 싶지만 여전히 엄마가 만들어 놓은 삶의 길을 따라 걷고 있는 소율에게도 

바다는 따뜻한 같았다.

  


"이제 어두워진다. 그만 가자."


소율의 말에 바다를 뒤로 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는 친구들.



"소율아, 너희 외할머니 댁 여기서 멀어?"


"아니 여기서 5분만 걸어가면 돼."


"이 동네에 할머니가 사신다니 너 정말 부럽다. 나도 할머니 댁이 이런 조용한 바닷가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

 을까? 그럼 진짜 자주 올 텐데..."


준기는 진심으로 부러웠나 보다. 말투에서 부러움이 뚝뚝 묻어났다.



"자주 못 와. 나도 고등학교 들어와서 처음 온 거야."


"정말? 아니 왜?"


의아해하는 준기의 질문에 소율은 차마 엄마 때문이라고 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고향이자 엄마가 사는 이 마을을 소율의 엄마는 자주 내려오지 않았다.

이 마을을 좋아하는 소율조차 자주 보내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이제부터 입시가 시작인데 어딜 가느냐며 더 보내지 않았다.

친구들도 그저 말없이 소율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할머니~~~"


한 톤 업이 된 소율이의 목소리를 듣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친구들도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덩달아 기분은 

좋았다. 부엌문이 열리고 깜짝 놀란 소율의 할머니 모습이 보였다.  



"아이고, 이게 누구여. 우리 강아지 아니여."


"할머니 소율이 왔어요."


"아이고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래. 연락도 없이. 느그 엄마는? 엄마는 같이 안 오고?"


"네 할머니. 제 친구들이랑 같이 왔어요. 얘들아 인사해. 우리 외할머니."


"안녕하세요!!"


태진과 서우, 준기가 합창하듯 큰 소리로 꾸벅 인사를 했다.



"친구들? 그래 그래. 잘 왔다. 우리 강아지 핵교 친구들이구나. 오니라고 고생 많았지.

 저녁들은 먹었고?"


"아니. 할머니 저희 배고파요."


안 하던 어리광도 부리고. 소율의 낯선 모습에 태진은 여전히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윤소율 저런 모습이 있었어? 늘 혼자 냉정한 척은 다 하더니...

 풋, 조금 귀엽네.'


그래도 소율의 저런 모습들이 싫지는 않았다. 어쩌면 저게 소율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깐 했다.



"할미가 얼른 밥 차려 줄게. 여 앉아서 쉬고 있어. "




할머니 손은 금손이었다. 어느새 뚝딱뚝딱 만들어서 한 상 가득 차려 내오시다니.

물컵 올려놓을 공간조차 없을 만큼 가득 채워진 상을 보니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우와~ 대박!!"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 맛있을 것 같아요. 잘 먹겠습니다."


친구들은 밥상을 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저부터 들었다.



"찬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미리 연락을 주고 왔으면 맛있는 거 준비해 놓을 텐데..."


"할머니 지금도 충분히 넘쳐요.먹을 거 천지구만. 꼭 준비해 놓으신 것처럼..."


"느그 엄마가 언제 올지 몰라서 이것들은 항상 채워놓고 있었지.

 어디 느그 엄마가 연락하고 오더냐. 늘 갑자기 들이닥치지.

 너도 엄마 닮아서 이렇게 갑자기 오지 않았냐."


내가? 내가 엄마를 닮았다고?

엄마를 닮았다는 할머니 말에 소율은 수긍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강한 부정을 할 수도 없었다.

누가 봐도 냉정하고 찬 바람 불고 못돼 처먹은 게 우리 엄마랑 나는 닮았으니까.



"어여 많이들 먹어. 할미가 숭늉 끓이고 있는 것 가지고 올 테니까. "


할머니가 부엌으로 사라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휴대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이잉~~~"


몇 시간 동안 꺼놓았던 소율의 휴대폰이 켜자마자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밥 먹던 친구들의 숟가락도 자동으로 멈췄다.



"먹고 있어. 나 잠깐만 전화 좀 받고 올게."


휴대폰을 들고 소율이 대문 밖으로 사라지자 친구들도 갑자기 의기소침해졌다.



"소율이 괜찮으려나..."


"괜찮지는 않겠지만... 뭐 엄만데 딸을 죽이기야 하겠냐. 뒤지게 한번 깨지고 말겠지."


소심해진 서우의 말에 준기가 죽어있는 분위기를 다시 띄우려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죽일 수도 있을 듯."


태진의 한 마디에 서우와 준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이 자식 살벌하게.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그런 답을 하다니. 얼어붙어 버린 서우와 준기를 보더니 태진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



"소율이 엄마라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단 말이지."


"너 소율이 엄마 봤어?"


"응. 우연히."


"엄청 살벌하신가 봐. 어떡하냐 소율이..."


서우는 자신이 마치 아빠에게 겪는 일을 소율이 당한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야야 일단 밥부터 먹자.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대."


"백준기 넌 가만 보면 애늙은이 같아. 우리 할머니가 자주 하는 말인데 그거."


"그래? 내가 또 할머니, 할아버지들 하고 잖냐. 흐흐.

 태진이 너희 할머니도 내가 한번 뵈러 가야겠구나. "


어이없다는 태진의 표정에 눈 번 찡긋하는 준기다. 태진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율이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돌아가면 소율이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너 지금 어디야? 어디냐고?"


휴대폰 밖으로 엄마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이 들려왔다.



"너 오늘 논술특강도 째고 원어민 수업도 째고 말도 없이 지금 어디 간 거냐고?

 오늘 잡은 특강이 얼마나 어렵게 잡은 건지 알기나 해? 왜 말이 없어? 어디냐고?"


소율은 1초도 쉼 없이 쏘아붙이는 엄마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할머니 집 왔어요."


소율이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뭐?? 거길 갔다고? 대학 갈 때까진 할머니집 내려가지 말라고 했잖아."


"할머니한테 전화해서 뭐라고 하지 마세요. 연락 없이 내가 온 거니까.

 내일 아침 먹고 올라갈 거예요. 가서 얘기해요."


"지금 엄마가 갈 테니까 꼼짝 말고 거기 있어."


역시 엄마답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친구들이랑 같이 왔어요.그러니까 오지 마세요.  저 친구들한테 창피당하고 싶지 않거든요.

 할머니한테 전화하셔서 뭐라고 하면 저 내일도 안 가요."


휴대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몇 초간의 이 침묵이 소율은 미치도록 싫었다.



"알았어... 내일 아침 첫 차 타고 올라와. 아니면 엄마가 가. 알겠니?"


"네..."


소율은 끊긴 휴대폰을 한참 동안 쏘아보았다.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엄마는 소율이 할머니 집에만 갔다 오면 마음을 못 잡고 더 방황한다며 싫어했다.

죽어라 해도 날고 기는 애들을 따라가려면 부족한데 자신의 고향집에만 갔다 오면 소율의 마음이 붕붕 떠 

있다면서 죽도록 싫어했다. 그렇게 싫은 고향집에 자신의 공부를 위해 어린 소율을 1년 동안 맡겨놓았으면서

왜 지금은 소율이 가는 것을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 인생과 소율의 인생은 다른데 아무리 부모와 자식이지만 서로 다른 인생을 사는 것인데....

엄마는 자신의 인생에 소율을 자꾸만 끼워 넣으려고만 한다. 그래서 소율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밥공기를 거의 다 비울 무렵 소율이 들어왔다.

너무 열심히 먹던 친구들이 소율을 보자 미안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어쩌지. 네가 너무 안 와서...  우리끼리만 먹은 것 같네. 미안."


"아냐. 괜찮아. 우리 할머니 밥 맛있지?"


"응. 진짜 너무 맛있어. 셔도 될 것 같아."


서우와 준기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최고의 밥상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할머니~~ 저 라면 끓여 주세요. 할머니 라면 오랜만에 먹고 싶어요."


"우리 강아지가 또 라면이 먹고 싶어? 느그 에미가 그렇게 싫어하는데 좀 줄여라.

 할미 집에 올 때만 먹고."


"알았어요. 줄일게요."


"기다려봐. 할미가 후딱 끓여 올게."


엉덩이 붙이고 앉을 틈도 없이 할머니는 또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야, 너는 힘들게 할머니가 밥 차려 주셨는데 라면 타령이냐."


말이 없던 태진이 입을 열었다. 아무튼 소율이를 타박할 때만 입을 여는 엄태진이지.



"너희들 우리 할머니가 얼마나 라면을 맛있게 끓여주시는지 모르지?"


"정말?? 그렇다면 우리도 2차로 라면을~~"


젓가락을 입에 물고 입맛을 다시는 준기 눈빛이 다시 똘망똘망해졌다.



"너는 밥 한 그릇을 다 먹고도 라면이 또 들어가냐?"


"할머니 라면이 엄청나다잖냐. 엄태진 너 라면에 젓가락 꽂기만 해 봐."


"나는 먹을래.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먹어도 되지?"


서우 말에 태진도, 소율도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소율의 소울푸드 할머니 라면. 2년 만에 먹어보는 라면이었다.



"와, 큰일 났네."


라면 한 젓가락을 맛보던 준기가 말했다.


"왜? 또."


"우리 돌아가서 무인라면가게 라면 이제 못 먹겠는데. 할머니 라면을 맛봤으니 말이야.

 진짜 최고예요. 최고!!"


준기의 넉살은 주름진 할머니의 눈가를 더 주름지게 만들 정도로 웃겼지만 할머니를 웃게 해 준 준기가 소율은 고마웠다. 비록 내일 엄청난 후폭풍이 몰려올 예정이지만...


"얘들아 우리 라면 먹고 나가자. 너희들 밤바다 안 가봤지?

 죽여준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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