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나 Jul 06. 2024

8화 모든 일에는 다 계획이 있다

24시 무인라면가게

버스는 고속도로에 진입하자마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첫 차를 탄 덕분에 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아서 버스는 막힘없이 내달렸다.

버스 안은 네 명의 친구들을 제외하고 두 명의 사람이 더 있었다.

앞자리가 텅텅 비었지만 친구들은 모두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말없이차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준기와 서우는 각자 이어폰과 헤드셋으로 외부와의 소음을 차단하고 있었고

소율과 태진의 시선은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진은 그런 소율을 한 동안 바라보았다.


'소율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소율의 엄마라면 분명 이 모든 상황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태진이 잠깐이지만 옆에서 지켜본 소율의 엄마는 그랬다.

아주 가끔이지만 태진은 그런 엄마라도 곁에 있는 소율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어느새 눈을 감아버린 소율. 태진도 어젯밤 잠을 설친 탓에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고속터미널에 도착한 버스에서 소율과 태진, 준기와 서우가 내렸다. 친구들이 내린 승강장에는 소율의 엄마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태진이 소율의 엄마를 알아보고 꾸벅 인사를 하자 준기와 서우도 어? 누구? 아... 대번에

소율의 엄마임을 눈치채고 함께 인사를 했다. 소율의 얼굴은 몹시도 구겨져 있었지만 엄마는 표정의 변화 없이 싸늘함 그 자체였다.


"아, 안녕하세요. 소율이 어머님이시죠? 저희는 같은 반 친구들이고 저는 백.."


"주차장에 차 있다. 따라와."


준기의 말은 소리 소문 없이 묻혀버리고 말았다. 소율엄마의 기에 눌린 서우는 뒤로 한 발자국 주춤거렸다.

인사를 받기는커녕 친구들을 본체 만 체 하고 돌아서서 가버리는 엄마를 보며 소율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엄마를 닮아 늘 냉정하고 차갑던 소율도 이런 상황은 아직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그래도 딸의 친구들인데 아무리 나한테 화가 나도 그렇지...


"미안... 나 먼저 갈게. 학교에서 보자..."


친구들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미안한 티를 얼굴에 내는 것조차 창피했던 소율이 서둘러 엄마 뒤를 따라 사라졌다. 소율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몇 초간 멍하니 있던 준기와 서우, 태진도 이내 정신을 차렸다.


"우리도 가자..."


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율이 괜찮을까..."


서우는 자신이 아빠와 마주했을 때 느끼는 숨이 조여 오는 그런 압박감을 소율의 엄마에게서 그대로 느꼈다. 그래서 소율이 누구보다도 걱정되었다.


"괜찮길 빌어야지... 지금 나는 내 코도 석자야. 나도 집에 가서 우리 부모님께 석고대죄드려야 한다..."


1박 2일간의 행복했던 일탈은 벌써 오래된 추억처럼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월요일이 되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교에 온 준기와 서우, 태진은 소율이부터 살폈다.


"음... 살아는 있네. 일단 다행인 건가..."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떨쳐내려고 한 농담이었지만 전혀 웃지 않는 서우와 태진의 모습에 준기는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 아무래도 지금은 농담을 할 타이밍이 아니었나 보다.


"아니 난 그냥... 너무 너희들까지 가라앉아 있으니까 그런 거지. 알았어. 입 닥치고 있을게."


"소율이 표정만 봐서는 괜찮은지 아닌지 알 수가 없네..."


걱정 어린 서우의 말에 태진이 답했다.


"당분간 먼저 다가올 때까지 내버려 두자. 그게 저 녀석이 바라는 바 일거야."


서우와 준기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태진의 말에 수긍했다.

 



6월 말이 될 때까지 소율은 그림자처럼 학교와 집을 오갔다. 친구들과 그 어떤 말도 섞지 않았다.

24시 무인라면가게도 가지 않았다. 그냥 육체와 정신이 따로 있는 것 마냥 그렇게 떠다니듯이 다녔다.

자신을 걱정하는 친구들의 눈빛을 봤지만 애써 외면했다. 지금은 아무와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지금은... 먼저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나 자신과 대화할 시간이 더 필요했다.

소율의 미래에 대한 계획에 확신이 서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어렴풋이 머릿속으로만 그려봤던 소율의 계획은 그날 엄마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더 명확해졌다.


"너 제정신인 거야? "


"......"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해? 여태껏 불평 없이 잘 따라왔잖아. 이제 1년 반만 견디고 노력하면 되는데... 그럼 네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데 그걸 못 참고."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지는데요?"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러니까요. 궁금해서 묻는 거잖아요.

 내 인생이 뭐가 어떻게 달라지냐고요?"


"그리고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하고는.

 너한테 도움 1도 안 되는 그런 애들이랑 그러고

 다니느라고 중요한 특강을 빼먹어? "


소율의 물음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불꽃이 튀었다. 친구들까지 싸잡아 깎아내리는 데는 소율도 참을 수가 없었다.


"제가 먼저 가자고 한 거예요. 친구들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때마침 빨간 신호로 바뀌고 엄마는 급브레이크를 꾹 하고 밟았다. 엄마의 발끝에서 모든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고개를 돌려 뒤에 앉아있는 소율을 쏘아보는 엄마. 소율도 피하지 않고 엄마를 덤덤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곤 다시 바뀐 초록 신호에 차를 출발시키면서 엄마가 말했다.


"7월부터 두 달간 기숙학원 등록했어. 방학 시작하기 전부터 갈 거야. 담임 선생님께는 어제 전화해 뒀고 정학습으로 빼기로 했으니까 그리 알아. "


엄마는 앞만 보고 이야기를 끝냈다.

소율은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길, 수 없이 많은 학원가가 스쳐갔다. 그 어디에도 소율이 발 붙일 곳은 없었다.

 



토요일 밤 10시,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끝낸 태진이 식당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아직  태진은 10대 청소년이기 때문에 밤 10시면 퇴근을 해야 했다. 늘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혼자만 먼저 퇴근하는 것이 미안했던 태진은 그래서 언제나 두 배로 열심히 일을 했다.

다행히도 사장님은 성실한 태진을 예뻐해 주셨다. 자신의 성인 아들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사는데 고등학생인 태진이는 이렇게 열심히 산다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태진은 그래서 더, 더 열심히 일했다.

다른 친구들은 공부에 지쳐 허덕인다면 태진은 당장 앞에 놓인 생계에 지쳐 살아가는 소년 가장이니까...


버스정류장으로 가려던 발길이 자신도 모르게 소율의 아파트 근처로 바뀌어 있었다. 강릉에서 돌아온 후부터 말이 없던 소율. 어쩌다 교실에서 눈이 마주치거나 급식실에서 마주쳐도 소율은 못 본 척 지나쳐갔다.

태진은 소율이 지금 얼마나 힘들지 이해는 하면서도 마음 한 편으로 서운함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휴대폰을 들어 카톡창에 몇 글자를 두드려 보았다.


'너 괜찮니?'


그러다 곧바로 지워버렸다. 그냥 소율이 혼자만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리라, 조금만 더 기다려주자 생각하며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태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게 누구실까~ 엄태진 아니야?"


버스정류장으로 갔어야 했는데 괜히 소율이네 집 근처를 배회하다가 최강호 무리들과 또 마주치고 말았다.


"야, 저 새끼 조용히 끌고 와라."


강호의 한 마디에 덩치 큰 녀석 둘이 태진의 양 옆으로 와서 팔짱을 꼈다. 빠져나갈 수 없도록 단단히 팔짱을 낀 채로 태진을 끌고 번화가에서 안쪽에 있는 공원으로 들어왔다.


"너 내가 그동안 딴 일로 바빠서 가만히 있었지, 조용히 내버려두었다고 그냥 넘어갈 줄 알았냐?"


태진은 이번만큼은 무사히 넘어가지 않겠구나 하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교실에서도 몇 번이나 강호를 맞닥들인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요 근래 들어 강호 무리들은 무슨 일이 있는지 쉬는 시간만 되면 바쁘게 왔다 갔다 했다. 아마도 일진 무리들 간에 무슨 기싸움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지만 태진은 자신에게까지 관심 가질 틈이 없어 보여서 다행이다 싶었거늘.... 일이 터져도 이렇게 터질 줄이야....


"이거 놓고 말해."


태진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두 녀석들의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이 새끼가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하고 있네. 야!! 이 새끼 잡아."


태진이 미쳐 피할 틈도 없이 덩치들 몇 명이 몰려와 태진을 꼼짝달싹 못하게 잡았다. 그리곤 강호의 주먹이 곧장 태진의 배로 날아왔다.


"윽."


강호의 펀치에 태진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태진을 붙잡고 있던 덩치들도 그제야 손을 놓았다.

아주 잠깐, 3초가량 흘렀을까. 잠시 방심하고 있던 틈을 타 태진이 그대로 강호에게로 달려들었다.

태진에게 얼굴을 한 대 맞은 강호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피를 보자마자 강호는 더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야! 저 새끼 밟아!!"


아무리 어릴 때부터 운동으로 다져진 태진이라도 떼로 덤벼드는 것에는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맞고 있는데 지나가던 한 무리들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야 너네 뭐야?"


태진을 한참 때리던 강호와 무리들이 잠시 멈추고 그들을 보았다.


"그냥 가던 길 가시지."


"어? 너 엄태진 아니야?"


태진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어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지만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운동복 차림을 한

세 명의 친구들...

함께 체고에서 운동하던 아이스 하키부 친구들이었다. 그중엔 중학교 때부터 함께 운동을 하던, 한때 절친이었던 태호도 보였다.

늘 붙어 다니며 운동하던 단짝 친구 태호. 취향부터 식성까지 모든 것이 비슷해서 친구들

태태 커플이라며 놀리던 그 시절이 불현듯 떠올랐다.

저 녀석들을 하필 여기서 마주치다니... 강호 무리들에게 맞는 게 차라리 낫지 저 녀석들과 이런 상황으로 마주치는 건 죽기보다도 싫었다.


"아, 나 오늘 시합 끝나고 왔는데 다시 몸 좀 풀어야 하나?"


강호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고 덩치도 큰 아이스 하키부 친구가 앞으로 나서자 두 친구들도 따라나섰다.

쪽수에서는 아이스 하키부가 조금 밀릴 수 있겠지만 체격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겁도 없이 달려드는  강호 무리들을 세 친구들은 5분도 되지 않아 제압해 버렸다.


"아이 씨발. 너네 두고 봐. "


강호는 씩씩거리면서 이 한 마디만을 남기고 도망가버렸다. 물론 강호의 똘마니들도 함께.


"엄태진! 너 괜찮냐?"


어느새 다가온 태호가 태진을 부축하고 있었다. 태진은 온몸이 욱신욱신 쑤시고 아팠지만 태호의 부축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여전하네. 엄태진 자존심."


친구들을 뒤로하고 태진은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태진의 뒤로 들리는 말들은 못 들은 척 한 체 그저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뭐야 저 자식. 기껏 구해줬더니 고맙단 말 한마디 없이."




이전 07화 7화 바닷가의 추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