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진은 자꾸만 흐르는 피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다. 피하려고 했는데 눈가를 제대로 맞은 것 같다. 입고 있던 티셔츠를 당겨 눈가의 피를 닦아보지만 자꾸만 흘렀다.
'젠장, 이렇게 집에 들어가면 할머니가 놀라실 텐데...'
그 와중에도 태진은 할머니가 가장 걱정이 되었다.
"거기 서. 엄태진!"
신태호였다. 같이 있던 친구들은 버려두고 태진을 따라온 태호는 자신의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수건을꺼내 태진의 이마를 눌렀다.
"됐어."
"가만있어 새끼야. 찢어진 거 꿰매지 않으면 피 쉽게 안 멈춰. 병원 가자."
"됐어. 지금 이 시간에 병원을 어떻게 가냐"
"바보냐. 응급실 뒀다 뭐 하냐. 하여간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지."
태진은 태호를 따라가는 게 죽기보다 싫었지만 할머니를 걱정시키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못 이기는 척 태호가 이끄는 데로 택시를 잡아 타고 둘은 응급실에 도착했다.
조금만 더 왼쪽으로 맞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눈가가 이 정도 찢어진 걸 다행으로 알라는 의사의 말에태진보다 태호가 더 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찢어진 눈가를 세 바늘 꿰매고 약을 받아 들고 나서야 태진과 태호는 응급실을 나설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아, 이런 할머니....
"잠깐만 나 할머니한테 전화 좀 걸고"
태진은 태호와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전화를 걸었다. 이미 할머니한테 온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나 있었다.
"할머니, 죄송해요. 전화드린다는 게 깜빡 잊었어요. 오늘 회식이었는데... 제가 먹느라고 전화 온 줄 몰랐나 봐요. 네, 할머니. 이제 끝났는데 사장님이 데려다주신다고 하니까 걱정 말고 먼저 주무세요. 네~"
'거짓말하는 것도 어설픈 자식...'
어느새 태진 가까이 와서 통화 내용을 다 듣고 있던 태호가 혼자 생각했다.
'거짓말도 자연스럽게 못하는 자식이 누굴 속이겠어... 그렇게 나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태호는 태진이 갑자기 전학과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때가 떠올랐다.
함께 체고를 다니던 시절, 태호와 태진은 아이스 하키부의 1학년 에이스였다. 중학교 때부터 동고동락하며 운동하던 태진이 갑자기 학교를 전학 가고 운동을 그만둔다고 했던 때, 운동이 세상 전부라던 태진이 이제 운동 그만두고 공부해서 대학 갈 거라고, 그래서 공부하기 좋은 8 학군으로 이사 간다고 했을 때도 태진의 눈빛에서 알았다.
이 모든 것들이 거짓말이란 것을... 부모님들을 통해 태진의 가정사를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던 태호를 태진은 몰랐던 거다.
"뭐냐. 이제 남의 전화도 엿듣냐?"
가까이 다가와 있던 태호를 보고 태진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새끼야. 거짓말하면 다 티나. 어설퍼. 그러니까 하지 마라."
"뭐래...."
그럼 언제부터 태진이 한 거짓말을 다 알고도 속아준 걸까. 태진은 자신이 태호한테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택시비는 있냐?"
태진이 지갑을 열어보니 오천 원짜리 한 장뿐이었다. 태호는 자신의 지갑에서 삼만 원을 꺼내 태진에게 주었다. 태진이 머뭇거리자 태진의 손에 삼만 원을 구겨 넣었다.
"너 폰 번호도 바꿨더라? 번호 뭐야?"
"내 번호는 왜 묻는데?"
"야! 너 응급실 올 때 택시비에 병원비도 울 엄마 카드로 긁었다. 그리고 지금 택시비까지. 그럼 안 갚으려고 했냐? 니 번호를 알아야 내가 받을 거 아냐."
"아..."
태진은 하는 수 없이 휴대폰 번호를 불렀다.
"내 번호는 그대로다... 그렇게 전학 가고 연락 한 번을 안 하는 냉정한 새끼..."
태호의 말에 서운함과 그리움이 느껴진다는 것을 태진도 모를 리 없었다. 태진 역시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때와는 180도로 뒤바뀐 태진의 녹록지 않은 삶에 과거 추억 따위를 떠올리기엔 태진도 너무 아팠기 때문에...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현재를 살아내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운동부 친구들과의 연락을 끊어버린 거였다.
"그래도 나한테 만큼은 연락할 줄 알았는데..."
"......."
"태진아.... 운동 다시 시작할 생각은 진짜 없는 거냐? "
태진은 말이 여전히 말이 없었다. 서먹해진 태호와 태진의 사이가 이미 무너져버린 다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 같았다. 태진이 등을 보이며 그대로 걸어갔다. 세 발자국 정도 갔을까. 태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가만히 서 있는 태호를 향해 한 마디를 던지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 태진.
"전화할게."
오랜만에 24시 무인라면가게에 모인 태진과 서우, 준기 세 친구는 소율의 빈자리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소율의 잔소리가 이토록 그리울 줄은 세 친구도 아마 몰랐겠지.
"소율이 카톡도 안 읽어. 1이 안 지워지네."
서우가 라면 뚜껑을 열어 라면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오늘 라면가게에서 우리 모일 건데 올 수 있으면 오라고 남겼는데..."
라면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 때문에 서우의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가장 슬퍼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얼굴은 어떻게 된 거야? 이제 말 좀 해 주지."
준기가 하루종일 물어봐도 입도 뻥긋 안 하던 태진에게 눈을 흘기며 물었다.
"강호 패거리들 짓 맞지?"
준기의 물음에 태진은 고개만 끄덕였다.
"강호 이 자식이 너한테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지만 너무하네. 1대 다수라니... 혼자 있을 때 그냥 당한 거잖아. 우리라도 있었으면..."
역시 준기답다. 소율의 잔소리가 없어도 준기의 모터 달린 수다가 있으니 친구들은 심심할 틈이 없다.
"라면 불기 전에 먹자 그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진은 자신을 걱정해 주는 이 친구들이 너무 좋다. 머릿속으로 계산하지 않고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다 보이는 이 친구들이 어느새 좋아졌다.
무심한 듯냉정하지만 츤데레 같은 소율의 잔소리도...
소율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친구들의 연락도 받지 않고 연락도 없고...
그리고 7월 초부터 학교에도 나오지 않고 있다. 담임은 소율이 가정학습을 냈다고 하는데 대체 무슨 일일까. 다음 주면 방학인데...
"근데 강호는 학교 왜 안 나오는지 알아? 혹시 태진이 일 때문인 거야?"
서우도 하루종일 태진의 엉망이 된 얼굴과 학교에 나오지 않은 강호 일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강호네 애들이랑 다른 학교 일진들이랑 패싸움이 있었다나 봐. 그래서 경찰서 가고 난리도 아니었대. 그 일로 지금 학폭도 올라가 있고 그거 말고도 교권에, 선도위에 한 두 개가 아닌가 봐. 아마도 이번엔 등교정지로 끝나진 않을 분위기야. 강전까지 가게 될 거라고 소문났어."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어디 교무실에 소식통이라도 있냐?"
태진은 학교에 돌아가는 모든 일들을 시시콜콜하게 알고 있는 준기가 정말로 신기했다. 그 와중에 아이돌 연습생한다고 학교도 자주 조퇴하던 녀석인데 학교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모르는 게 없으니.
준기는 신기하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한 녀석 같았다. 정말 강호가 강제전학을 가게 된다면 태진의 학교 생활은 조금 괜찮아지려나. 하긴 뭐 학교 아닌 밖에서 마주칠 확률도 무시할 수 없으니 마냥 좋은 건 아닌 건가....
아 맞다. 태호 녀석 돈도 갚아야 하는데...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들을 하며 라면을 먹고 있는데 띠링~
무인라면가게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친구들이 일제히 돌아보니 놀랍게도 소율이 거기에 서 있었다. 그것도 해맑게 웃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