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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Jul 21. 2024

10화 용기가 필요할 때

24시 무인라면가게

오랜만에 아지트인 24시 무인라면가게에

네 명의 친구들이 모두 모였다.

소율의 깜짝 등장까지 있는 바람에 서우도, 준기도 기분이 몹시 업이 된 상태였다.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얼굴에 살짝 티가 나는 태진까지 모두의 표정이 밝았다.


"어떻게 된 거야? 그동안 학교 안 나와서 걱정했어."


가장 걱정을 많이 한 것 같은 서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우는 이 중에서 가장 내성적이고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지만 세 명의 친구들을 제일 많이 걱정하고 챙기는 친구였다.


"소율이 너 그날 고속터미널에서 너희 엄마한테 끌려간 이후로 진짜 무슨 일이 생겼나 했어.

학교에서 우리한테 말도 안 하고 쌩~ 하니 찬바람만 불고..."


준기도 소율을 걱정하긴 마찬가지였다. 태진은 슬쩍 곁눈질로 소율을 바라보았다.

소율은 말없이 라면만 후루룩 입에 넣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꼭 며칠 굶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라면만 먹었다.


"너... 괜찮은 거 맞지?"


보다 못한 태진이 물었다. 소율은 아무런 대꾸 없이 라면만 먹더니 마지막 국물을 시원하게 들이켠 후에야 입을 열었다.


"아 잘 먹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헐, 너 며칠 굶었냐? 혹시 너희 엄마가 널 굶기는 것으로 벌을 준 거냐?"


준기의 말에 그제야 소율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백준기~ 너의 농담이 그리웠다. 나 외할머니댁 다녀온 뒤로 외출금지령 내렸었어. 그래서 그동안 여기도 못 온 거고, 집과 학원만 오갔지. 라면도 얼마 만에 먹는지 몰라."


"그랬구나... 그럼 그동안 학교에서 우리랑 말도 안 하고 혼자 지냈던 건 왜 그런 거야? 우린 소율이 네가 우리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아서 우리에게 화가 나 있는 줄 알고..."


서우가 정말 어렵게 말을 꺼냈다.


"너희들한테 왜 화가 나? 준기 찾으러 가자고 한 것도, 우리 할머니집에 가자고 한 것도 다 난데.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엄마랑 사이가 더 안 좋아지면서 내 진로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어.

너희들을 일부러 외면하려고 그랬던 건 아닌데,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시간이 좀 필요했거든.

나만 생각하고 나만 돌아볼 시간이 말이야... "


소율이 정말 진지한 눈빛과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바람에 모두들 그 어떠한 말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소율이 자신에게만 집중하면서 생각한 진로에 대한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태진은 너무나도 궁금했다. 하지만 소율이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결론은 내려졌고?"


태진이 궁금해하던 것을 준기가 먼저 물었다.


"응. 하고 싶은 게 생겼는데 의대가 아닌 이상 엄마는 당연히 반대할 거니까 당분간은 엄마 모르게 작전을 짜는 수밖에. 좀 더 확실해지면 너희들에게도 말해줄게. 지금은 그럴만한 단계가 아니라서."


"그래. 그때가 되면 꼭 우리에게도 말해줘라. 뭔지는 몰라도 윤소율 너를 응원한다."


"응원 고맙다."


"나랑 서우도 너희들한테 할 말 있어."


준기의 얼굴이 갑자기 진지한 모드로 변해

있었다. 서우와 둘이 눈빛을 주고받더니 서우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실은... 나 준기랑 함께 음악 하기로 했어."


"정말? 서우 너 곡도 만들고 있다고 하더니 둘이 팀 결성한 거야? 잘했네. 너흰 꼭 잘 될 거야."


소율의 말에 서우 얼굴이 더 붉어졌다. 아직 뭔가 대단한 일을 해 낸 것도 아니고 이제 막 시작하려

는 건데 소율이 힘을 북돋우는 말까지 해주니 부끄럽기까지 했다.


"일단 우리의 계획은 서우가 듀엣 곡을 만들면

함께 편곡 작업도 해 보려고 해. 그런 다음 데모를 만들어서 기획사에 돌릴 생각이야. 너희들 서우 이 자식 노래 얼마나 잘 부르는 모르지? 나도 놀랐다니까.

우리 함께 싱어송 라이터 듀엣 팀이 되는 거지. 악뮤 같은 팀 말이야. 어때? 근사하지?"


"최서우가 노래를 한다고??"


여태껏 친구들 이야기만 묵묵히 듣고 있던 태진이 깜짝 놀라 물었다.  서우에게 그런 숨겨진 재능과 끼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던 소율도 적잖이 놀랐다.


"내가 연습생 잘리고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고 있을 때 서우가 먼저 그러더라고. 자기가 실용음악학원 다니면서 만들어 놓은 곡이 있는데 네가 한번 불러보면 어떨까 하고 말이야.

근데 이 녀석이 자기 노래를 직접 가이드 녹음한 걸 들려줬는데 너무 잘 부르는 거야. 캬~

그걸 여태 숨기고 어떻게 살았대~~~"


"왜들 그래. 쑥스럽게.... 다들 알잖아. 나도 아빠 몰래 이러는 거... 나도 혼자만의 탈출구가 필요해서 그냥 내 만족으로 해 왔는데 준기가 너무 좋다고 잘한다고 하니까 정말인가 싶기도 하고 얼떨떨해."


"우리가 당장 뭔가를 잘 해내려고 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하고 싶은 걸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기대로 하는 거지. 암튼 난 너희 둘 듀엣 찬성!! 야 나중에 팀 이름 정할 때 우리랑 같이 정해.

백준기의 작명 센스는 믿을 수가 없어. JK빽이라고 하고 다닐 때부터 내가 알아봤다니까."


"그건 그래. 하하하"


서우가 소율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준기가 와~ 서우 너마저 이러기야 하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이내 수긍했다.

24시 무인라면가게에서 이렇게 즐거워보긴 정말 오랜만이었다.  


모두들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열심히 찾고 있는 것 같은데 태진은 자신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내가 하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지금은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

태진의 처지를 생각하면 진로를 이야기하는 게 너무나도 큰 사치였다. 그렇담 태진은 언제까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어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지워버렸다.




친구들과의 만남으로 기분이 좋아진 서우가 현관문을 힘차게 열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학원을 마치고 아이들과 라면을 먹느라고 다른 때보다 조금 늦긴 했지만

10시가 넘지 않은 시간인데, 늘 이 시간이면 엄마가 거실에 앉아 TV를 보다가 서우를 맞아주셨는데 오늘은 온 집안에 정적이 흘렀다. 느낌이 좋지 않다는 것을 서우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안방 문이 열리고 아빠가 나왔다. 서우의 등줄기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최서우! 너 이리 들어와."


아빠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잔뜩 긴장한 엄마가 아빠의 눈치를 보며 뒤따라 나왔다.

서우는 대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드디어 걸렸구나.'


서우는 천천히 신발을 벗고 거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곤 아빠 앞에 섰다.

차마 아빠와 눈을 마주치고 말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손이 벌벌 떨려오기 시작했다.


"너 이게 뭐야?"


아빠가 서우 앞에 내민 것은 실용음악학원 결제 영수증이었다. 아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서우는 학원에서 결제를 하고 나면 바로 영수증을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아빠 손에 가 있는 거지?

아.... 지난주 학원 등록일에 엄마가 미디작곡 선생님을 만날 겸 서우도 본다고 왔었는데...

그날 엄마가 직접 결제를 하고 갔었다. 아무래도 엄마가 카드와 영수증을 자연스럽게 지갑에 넣은 것을 아빠에게 들킨 것 같다.

아빠는 종종 엄마 지갑을 검사하듯이 뒤지는 버릇이 있으니까...


"하, 학원 영수증이요..."


"그걸 누가 몰라서 물어? 실용음악학원 영수증이 왜 있냐고. 가 왜 여길 다니냐고?"


"여보 그게...."


"당신은 가만히 있어!

지금 이 자식한테 묻고 있잖아."


"제, 제가 다니고 싶다고 엄마한테 말했어요... "


"그럼 영어, 수학 학원은?"


"영어는 다니고 있고 수학만 잠시 쉬는 거예요. 서우가 너무  하고 싶어 하고 선생님이 재능도 있다고 하고..."


"당신 조용히 못해!!"


아빠 옆에 놓여 있던 TV리모컨이 날아가 거실 벽에 부딪히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엄마는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놀라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서우도 순간적으로 그것이 자신에게 날아드는 줄 알고 움찔하면서

뒤로 피했다. 아빠는 늘 그랬다. 화가 나면 손에 잡히는 것들을 던지고 부수고 하는 것으로 가족들을 위협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아빠가 화를 낼 때마다 어디로 숨고 싶었던 서우였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 익숙해진 상황에 조금 덤덤해졌다고나 할까. 하지만 여전히 손발이 떨리고 아빠가 무서운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엄마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제가 보내달라고 졸랐어요. 아빠! 저 공부보다는 음악이 좋아요. 곡을 만들고 부르고 하는 일이 더 좋아요.

제가 하고 싶은 걸 하게 해 주세요. 제발...."


서우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말도 더듬지 않고 아빠 앞에서 이렇게 말을 한 자기 자신이 놀라울 정도였다. 그리곤 용기를 내어 아빠 눈을 바라보았다. 아빠 눈동자 속에

불꽃같은 게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뭐? 공부를 그만두고 뭘 해? 음악? 너 이 자식 내가 뼈 빠지게 일해서 번 돈으로 여태 공부시켜 놨더니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야? 공부해서 좋은 대학 안 가면 네까짓 게 뭘 해서 먹고 살 건데? 좋은 대학 안 나오면 누가 너 같은

거 써주기나 한데?

우리나라에서 무시 안 당하고 살려면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밖에 없다고 몇 번을 말해?"


"저 잘할 수 있어요. 아빠. 한 번만 믿고 지켜봐 주시면..."


"닥치지 못해!!

그리고 당신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애 교육에만 신경 쓰라는데도 그걸 하나 못해서 이 지경을 만들어? 집에서 밥만 축내지 당신이 하는 게 뭐가 있어?"


"엄마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시라고요!!!"


잠깐 동안 집안에 정적이 흘렀다. 순간적으로 시간이 멈춘 듯했다. 서우는 자신이 아빠에게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도 자신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의심했다.

지금 이거 나 맞아? 나 맞는 거야?

눈을 질끈 감고 아빠에게 소리를 친 서우가 서서히 눈을 뜨려는데, 순간 번쩍 하고 번개가 보였다. 아빠의 커다란 손이 서우의 뺨을 향해 날아온 것이다. 서우는 귀까지 얼얼했다.

그동안 아빠 앞에서 늘 움츠러들기만 했던 서우가 한쪽 뺨을 감싸 쥐고 아빠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그동안 참기만 했던 서우의 내면에서 갑자기 활활 무언가가 불 타오르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은 이렇게 살기가 싫었다. 씩씩거리며 아빠를 노려보기 시작하자 아빠도 잠시 당황하는 것 같더니 서우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이런 싹수없는 새끼를 봤나. 어디서 아빠를 노려봐? "


"이거 놔요. 놓으시라고요."


서우가 발버둥 칠수록 아빠는 멱살을 잡고 더 위로 끌어올렸다. 숨이 턱턱 막혔다. 옆에서 엄마가 아빠에게 손을 놓으라고 하면서 말려봐도 소용없었다. 아빠의 힘을 서우가 감당해 내기엔 아직 역부족이었다.

서우는 컥컥거리며 발버둥을 쳤다.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처럼 몸이 어딘가로 빠져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겼다.

서우는 집이 아니라면 어디든 좋다고,

어디든 이대로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서우야, 서우야 정신 차려봐. 어머 얘가 왜 이래. 서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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