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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Aug 03. 2024

12화 슬픔의 무게

24시 무인라면가게

영정 사진 속 태진의 엄마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엄마는 자신의 병을 알고 난 후 곧 이런 날이 올 거란 걸 알았다는 듯 많은 준비를 하고 떠났다. 영정 사진도 직접 찍어 두었다.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가족 모두가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 엄마의 영정 사진 앞에서 아빠는 통곡을 하며 울었다. 엄마의 장례식장은 정말 조용했다. 찾아올 친인척도 많지 않은 태진이네였기에 정말 소수의 지인들만이 엄마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했다.

태진은 이상하게도 눈물이 별로 나지 않았다.

그저 꾸역꾸역 슬픔을 속으로 삼키고 서 있기만 했다. 아빠처럼 차라리 시원하게 울고 싶었지만 좀처럼 감정이 뜻대로 되질 않았다.

어쩌면 엄마가 암선고를 받은 후부터 태진도 이런 날이 올 거란 걸 예감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서였을까.

엄마는 태진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엄마는 씩씩하게 암을 이겨낼 거니까 아들은 걱정 말고 운동만 열심히 해.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엄마가 암에게 지는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어. 우리 태진이는 늘 하던 대로 열심히 운동하고 네 인생을 살아나가면 되는 거야. 조금만 슬퍼하고 말이야. 알겠지? "


엄마가 자주 하던 말처럼 태진도 만약을 늘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엄마의 죽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가...  태진은 정말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이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저 아빠의 무너져 내린 모습 앞에서 나라도 엄마의 마지막을 잘 보내드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빠가 1년 만에 집에 돌아왔다. 이사 간 집을 알고 찾아왔다는 건 할머니가 아빠에게 알려줬다는 거겠지.

엄마를 보내고 아빠는 두 달간 술에 절어 지내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태진 앞으로 남겨둔 보험금과 함께...

그랬던 아빠가 지금 태진의 눈앞에 서 있다.


"태진아, 아빠가 왔어. 엄마 기일을 잊지 않고 그래도 찾아왔네. "


할머니가 태진의 표정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태진은 할머니 옆에 서 있는 아빠를 똑바로 쳐다봤다.

아빠는 차마 태진을 볼 수가 없었던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 뭐예요? 나 몰래 아빠랑 연락하고 계셨어요? 집주소 알려 준거예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할머니에겐 아빠가 자식이라고 나보다 먼저였던 건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태진은 아무 잘못 없는 할머니에게도 괜한 배신감을 느꼈다.

엄마 보험금을 날리고 그렇게 떠났어도 태진은 아빠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었다. 아빠가 일부러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니까. 아빠도 운이 나빴던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돈 벌겠다고 떠나서는 1년 동안 자기 자식한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는 것,

미성년자인 자식과 노모를 남겨두고 조금의 생활비조차 보내주지 않았다는 것....

태진은 모든 것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이제 고등학교 2학년 밖에 되지 않은 자신에게 가장의 무게를 예고도 없이 떠맡기고 사라져 버린 아빠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태진아.... 아빠가 미안하다.... 너한테 정말 면목이 없다..."


"할머니!  엄마가 우릴 버려둔 아빠가 찾아온 거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


태진은 참았던 울분을 쏟아냈다. 아빠도, 할머니도 자신을 이렇게 혼자 두고 가버린 엄마까지도 모두 미웠다.

세상에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태진아...."


할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태진에게로 다가왔다. 태진의 손을 부여잡고 자꾸만 자꾸만 우셨다. 아빠를 한 번만 용서해 줄 수 없겠니 하는 눈빛으로 태진의 손을 꼭 잡았다.


"아빠가 안 나가면 내가 나갈게요."


태진이 그대로 돌아서서 현관문을 잡으려는 순간 아빠가 소리쳤다.


"태진아! 아빠가 나가마. 아빠가 나갈 테니까 그만 들어와라. 엄마 기다리신다..."


태진이 먼저 나갈까 봐 아빠는 재빠르게 태진의 옆을 스쳐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할머니는 나가는 자식을 차마 잡지 못해 우셨고, 불쌍하고 안타까운 손자를 보며 또 우셨다.

엄마의 첫 번째 기일은 어떻게 치렀는지 모르게 그렇게 정신없이 끝이 났다.




24시 무인라면가게에 태진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 준기의 긴급 호출이 있었다.

아침을 늦게 먹은 탓에 점심을 그냥 걸렀더니 태진은 배가 고팠다. 친구들과의 약속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해서 라면을 올려놓았다.   

수프를 넣고 버튼을 누르자 뜨거운 물이 쏟아져내렸다. 수증기가 뿌옇게 태진의 앞을 가렸다.

태진의 앞날은 뜨거운 수증기가 내뿜는 것처럼 늘 뿌였게 흐렸다. 태진에게 내쫓긴 아빠는 어제 어디서 잤을까. 찜질방? 아니면 모텔? 그것도 아니면 정말 다시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을까?

태진은 머리를 저었다. 아빠 걱정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그것뿐이야...


"뭐 하냐? 하면 안 되는 생각이라도 했냐?"


"아이 깜짝이야. 인기척 좀 하고 다녀라 제발. 휴..."


"뭔 소리야. 라면가게 종이 딸랑딸랑했는데도 못 듣고 머리만 휘젓고 있던 사람이 누군데?"


"그랬냐?...."


소율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태진의 속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항상 중요한 순간이면 태진 앞에 나타나있었다.


"약속시간 8시 아냐? 왜 일찍 왔어?"


"그러는 넌?"


"나도 너처럼 배고파서 라면 먹으려고. 준기 오면 그 녀석 얘기 듣느라고 라면에 집중할 수가 없잖아."


소율은 배고파 죽겠다고 호들갑을 떨며 늘 먹던 라면을 집었다. 태진은 그런 소율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예전과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변한 것 같은데 뭔지 잘 모르겠다.


"그만 봐라. 뚫어질라."


태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자신의 개인사를 소율에게 들켰을 때도 이렇진 않았는데 갑자기 얼굴이 후끈거렸다. 때마침 준기가 들어와 줘서 태진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었다.


"일찍 와 있었네. 내가 긴급 호출한 이유 대충은 짐작하겠지?"


"서우한테 연락 온 거야?"


"응. 정확히 말하면 서우 어머니한테서. 서우가 퇴원을 했는데 집으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싶다고 했대. "


"그래? 근데 서우 아빠는? 집에 계신 거 아니야?"


"아빠가 결국 항복하신 것 같더라. 자세한 건

만나봐야 알겠지만 말이야. 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냐."


준기가 어른 흉내를 내면서 이런 말을 할 때면 정말 웃겼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더라. 세상 모든 부모가 그렇진 않단다. 우리 엄마 봐봐.  세상엔 자식을 반드시 이겨야만 하부모도 있다."


소율이 이렇게 말하면 친구들은 할 말이 없다. 왜냐면... 소율의 말은 너무 사실이니까...


"야, 너는 정말. 우리가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만들어. 어휴. 암튼 이번주말 저녁이니까 같이 모여서 가자."


서우가 정말 아빠와 극적인 협상을 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서우아빠가 자식에게 져 준 걸까.

태진도 아빠와 풀어야 할 매듭이 있는데 서우 이야기를 들으니 마냥 부럽기만 했다.

태진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가 자식에게 양보하는 게 아니라 태진이 아빠를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이 상황이 태진은 너무 불공평했다.

아빠들은 왜 다들 그런 거야? 대체 왜....




그날 밤 태진은 오랜만에 할머니 옆에 나란히 누웠다. 엄마가 살아계실 땐 종종 할머니와

잔 적이 많았다.

엄마한테 혼나고 속상할 때도, 운동이 잘 안 되고 화가 났을 때도 할머니 옆에 누워 있으면 이상하게 편안해지면서 쌓여있던 모든 것들이 다 풀렸다. 생각해 보니까 엄마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 옆에서 잔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할머니"


"응."


작은 취침등 하나만 켜져 있어서 할머니의 표정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할머니는 왠지 슬퍼 보였다.


"할머니, 아빠 걱정 많이 하고 있죠?"


할머니는 태진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왜 걱정이 안 되겠는가. 아빠는 태진의 아빠이기 이전에 할머니의 자식인 것을...


"할머니... 아빠 집에 들어오라고 연락하셔도 돼요."


"태진아... 할머니는 괜찮다. 우리 손주가 상처받는 거 이 할미는 원치 않아."


"저 괜찮아요. 사실 어제 아빠를 봤을 때만 해도 너무너무 화가 났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할머니한테도 아빠는 소중한 자식이더라고요. 그 생각을 못했어요. 저도 아빠한테 변명이든 뭐든 들어줄 준비가 되었으니까 괜찮아요. "


태진은 이제 슬픔의 무게를 좀 내려놓고 싶었다.

태진이 지니고 있는 수많은 슬픔들을 이제는

조금씩 내려놓기로 다짐했다.

그 첫 번째가 아빠가 아닐까.


"태진아... "


할머니는 어둠 속에서 눈물을 훔쳤다. 어느새 다 자란 것 같은 손주가 너무 대견스럽고 한편으론 너무 미안했다.


"태진이 네가 아빠보다 더 어른스럽구나.

이 할미가 너한테 너무 미안하다."


태진은 눈을 감았다. 갑자기 졸음이 확 밀려왔다. 오늘은 꿈에서 엄마를 만났으면 좋겠다.

엄마가 꿈속에 나타나 '잘했어 아들' 하고 칭찬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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