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나 Aug 16. 2024

13화 서서히 풀리는 실타래

24시 무인라면가게

오전 10시.

학교 정문 앞으로 태진이 가장 먼저 모습을 보였다. 방학이라 학교 주변은 조용했다.

잠시 후 소율이 왔고 준기도 2분 간격으로 도착했다. 소율은 준기의 옷차림을 보고 풉~ 하고 웃음이 났다.

평상시 준기의 힙한 옷차림이 아니라 누가 봐도 초대받은 사람 같은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낯설어하는 준기 표정에 소율과 태진은 함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야, 웃지 말라고. 나도 이런 내가 어색하다. 하지만 어쩌냐. 서우 아빠도 소율이 엄마 못지않게 무서운 분일 텐데 좋은 인상을 줘야 하지 않겠냐."


셋은 나란히 횡단보도 앞에 섰다.  학교 앞에서 길을 건너면 바로 서우네 아파트가 있다.

세 친구들은 오랜만에 서우 얼굴을 볼 생각에 들뜨면서도 한편으론 긴장이 되었다.

마치 학생부장 선생님한테 혼나러 가는 것처럼 죄지은 것도 없는데 괜히 떨렸다.


"야야 긴장 풀어."


가장 긴장하고 있는 준기가 이런 말을 하니 더 어색할 수밖에.


"우리 저기 편의점 좀 들렀다 가자. 우리 엄마가 빈손으로 가지 말고 꼭 음료수라도 사서 들고 가라고 했어."


준기 녀석 이럴 때 보면 우리 중 제일 어른 같단 말이지. 태진은 편의점으로 달려가는 준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준기 부모님께서 잘 가르친 덕분이겠지. 분식집을 운영하시면서 매달 가게 월세를 걱정

하실 만큼 생활이 넉넉진 않지만 준기를 보면

참 좋은 가정에서 잘 컸구나 하고 느낄 때가 많았다.

태진도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지금보다는 나은 가정에서 자랐을까.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아빠와도 헤어지지 않고

아빠를 미워하지 않고 살았을까.

늘 밝고 구김이 없는 준기를 보면서 태진은 처음으로 준기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서우방에 모인 세 친구들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모두들 서우가 괜찮은 건지 살피느라 평소답지 않게 눈치 아닌 눈치를 보고 있었다.

서우방은 고등학생 네 명이 함께 앉아있기엔 조금 비좁은 듯 한 작은 방이지만 침대와 책상, 키보드까지 있을 건 다 있는 알찬 방이었다.

자기 방인데도 불구하고 서우는 침대에 어정쩡하게 걸터앉아 있었고 세 명의 친구

들은 바닥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있었다.

그때 소율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아, 도저히 못 참겠다. 이 어색한 공기."


깜짝 놀란 눈동자 여섯 개가 소율을 향했다. 서우의 책상 의자를 빼서 앉으며 소율이 말했다.


" 여기 좀 앉자. 너희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어색하게. 서우 넌 이제 건강은 괜찮은 거지?

괜찮아졌으니까 우릴 초대한 거 맞지?"


"어... 응. 맞아. 얘들아 나 이제 괜찮아. 불편해하지 않아도 돼. 아빠와도 많이 좋아졌어. 준기한테 들었겠지만 아빠가 나 음악 하는 것도 허락해 주셨어. 너희들한테 직접 말하고 싶어서 집으로 초대한 거야."


서우는 정말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아보였다. 그리고 좀 더 씩씩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근데 너희 아빠는 어디 가셨어? 아빠 보는 줄

 알고 내가 의상까지 조신하게 입고 잔뜩 긴장

 하고 왔는데."


"아빠는 일찍 카센터 나가셨어. 아들 친구들 만나는 게 아직은 어색하신가 봐."


"그나저나 대체 너희 아빠를 어떻게 설득했길래 그 무섭다던 아빠가 바뀐 거야? 나도 비결 좀 알려주라."


누구보다 소율이 알고 싶었으리라.

소율과 엄마와의 관계도 서우 못지않았으니까.

요즘은 엄마랑 대화 자체를 하지 않고 지내는 것 같다. 소율의 엄마는 그 어떤 대화와 설득으로도 바뀌지 않는 분이었다.


"실은... 내가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도 그 이유야. 내가 우울증 약 삼일 치를 한꺼번에 먹었거든..."


"뭐?? 너 미쳤어?"


다른 친구들도 놀랐지만 준기가 가장 많이 놀란 것 같았다. 한 마디 더 하려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서우 엄마가 간식을 들고 들어오는 바람에 준기가 멈출 수 있었다.


"서우 친구들이 집에 오는 건 처음이네. 엄마가 너무 좋다. 간식들 먹고 편히 놀다 가렴."


서우 엄마가 나가고 준기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말하려는데 서우가 얼른 입을 막았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의도는 정말 아니었어. 정말이야."


"정말? 죽으려고 그랬던 거 정말 아닌 거지?"


"응. 아니야. 그냥 그땐 아빠와의 갈등에 너무

지쳐 있었고 내 자존감도 너무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어. 나도 잠깐 이성을 잃고 내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아. 약을 하나만 먹어야 하는 건 알았지만 그냥 나도 모르게 그렇게 먹어 

버렸어..."


서우는 덤덤하게 그날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날 처음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게 해 달라고 아빠에게 소리쳤고 아빠에게 맞았다고 했다. 서우는 극도로 불안한 감정과 한없이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은 우울감에 휩싸인 채로 자신도 모르게 그냥 손에 짚히는 대로 약을 털어놓았다 그리곤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다. 서우 아빠는 이번에 처음으로 서우의 담당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고

했다. 서우가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아왔던

몇 년 간 절대 서우의 병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던,  그런 병은 정신상태가 나약한 놈이나 걸리는 거라며 강해져야 한다고 서우를 더 다그치던 아빠였다.

그런 서우 아빠가 의사를 만나 상담을 한 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동안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자신보다는 더 좋은 직업을 가지고 더 높이 올라가기를 바라왔던 서우 아빠가

가족이 없다면, 가족 중에 누구 하나라도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를 깨달았다고 했다.


"나도 아빠가 그렇게까지 갑자기 변할 줄은 몰랐어. 병원에 있으면서 정말 더 우울했었거든. 이제 내가 이렇게까지 밑바닥으로 내려가는구나 싶어서.... 근데 입원하고 삼 일째 되는 날 의사 선생님이 아빠와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시더라. "


서우는 아빠와 단둘이 그렇게 오래 이야기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꼬여 있던 실타래가 아주 천천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이 실타래를 서로 풀려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서우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게 하겠다고. 대신 학교 공부도 소홀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음악으로 가든, 공부로 가든 열심히 해서 대학은 꼭 갔으면 좋겠다는 조건으로.




서우 집에 준기만 남겨두고 태진과 소율은 먼저 나왔다. 주말은 태진이 식당 아르바이트를 가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오전부터 서우를 보러 간 것이다. 준기는 서우와 함께 하는 음악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눈다고 해서 둘은 먼저 일어섰다.

태진이 일하는 식당이 소율의 동네이기 때문에 둘은 함께 버스를 탔다. 뒷 좌석에 나란히 앉은 태진과 소율은 한참을 차창밖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냐. 최근에도 이런 비슷한 얼굴을 내가 본 적이 있는데.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말을 하던가."


소율은 신기하게도 늘 태진의 마음을 들여다

보듯 말을 한다. 그럴 때마다 깜짝 놀라면서도 태진은 그런 소율이 고맙기도 하다. 무언가를 털어놓을 수 있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친구...


"아빠가 왔어."


"음... 그렇군."


태진은 언젠가 소율에게만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소율에게는 언제나 그렇듯 털어놓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데 전혀 놀라지 않는 소율이다. 태진을 버리고 나간 뒤 1년 넘게 연락두절 상태였던 태진 아빠가 집에 돌아왔다는데 소율은 왜 놀라지 않는 걸까. 아빠가 다시 돌아올 거란 걸 알고 있었을까.


"아빠를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거야? 여전히 아빠와 함께 사는 건 안 되겠어?"


소율이 태진의 진심이 무엇인지 물었다. 사실 태진도 잘 모르겠다. 할머니를 생각해서 아빠를 집에 들어오라고 했지만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아빠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아빠가 그리웠고 보고 싶었고 걱정되었던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 "


"그럼... 아빠한테 딱 한 번만 변명할 수 있는 기회를 드려보는 건 어떨까. 두 번, 세 번도 아니고 한 번인데 그건 해드릴 수 있잖아. 아빠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나서 그때 너의 마음이 어떤지 생각해 보는 거지."


그냥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자식을 버리고 그렇게 나가버린 것 자체를 용서할 수 없었다. 아마 연락이라도 했었더라면 태진이 이렇게까지 상처받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소율의 말대로 어떤 이유에서 그랬는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변명이라도 들어봐야 하는 건가.

태진은 다시  깊은 생각의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근데 나도 참 우습지 않냐. 너나 서우나 준기

한테 온갖 아는 척과 오지랖은 다 떨면서 정작

내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야. "


소율도 언젠가는 자신의 엄마와 얽힌 실타래를 풀고 싶을 것이다. 소율이 자신은 그런 날이 절대 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지만....




태진이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식당을 나섰다. 식당 문 앞에는 아빠가 태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는 태진을 향한 미안함에 여전히 태진의 얼굴을 똑바로 보질 못했다.

그래도 태진의 문자에 한걸음에 이곳으로 달려왔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 아니. 아빠도 5분 전에 왔다. 덥지? 어디 시원한 데 갈까?"


"근처에 햄버거 가게 있어요. 거기로 가요."


아빠는 말없이 태진의 옆에 서서 걸었다. 가까이 붙지도, 그렇다고 멀찌감치 떨어지지도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태진과 함께 걸어갔다.

햄버거 가게에 들어온 태진과 아빠는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출출할 텐데 햄버거를 먹으라는 아빠의 부탁에도 태진은 콜라 하나면 된다고 고집을 부렸다. 뭔가 진지한 이야기가 오고 갈 것 같은 이 분위기에 햄버거를 우걱우걱 먹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태진은 콜라를, 아빠는 아이스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몇 분 간 서로 말이 없었다. 호로록 빨대로 음료수 마시는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침묵을 깨고 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빠"


꿀꺽하고 커피가 태진 아빠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 것만 같았다.


"지금부터 저한테 하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하세요.   말할 기회를 드릴게요."


태진의 아빠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는 눈빛이었다. 태진엄마가 암 선고를 받고 투병을 시작한 그날부터 시작

해야 하는 이야기였다.

태진 아빠가 다니던 중소기업의 빠듯한 월급

으로는 엄마 수술비와 항암치료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태진의 운동 뒷바라지까지 해야 했기에 당시 아빠는 투잡을 뛰어야 하나 고민했었다.

아빠가 주식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런 상황들 때문이었다. 펀드매니저였던 아빠 친구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아빠는 월급의

몇 배나 되는 큰돈을 처음 벌었다. 손쉽게 큰돈을 벌 수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부터가 모든 잘못의 시발점이었다.

아빠는 점점 더 욕심을 내기 시작했고 엄마 몰래 회사까지 그만두면서 퇴직금 전부를 주식에 투자했다. 무리한 투자의 끝은 한없이 곤두박질치는 그래프를 보는 것이었지만 그때라도 멈췄어야 했다.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사망보험금으로 아빠는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

했겠지. 그동안 잃었던 것도 모두 되찾고 아내를 대신해 아들을 잘 돌보리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결과는 돈도, 직장도, 엄마의 보험금도 모두 잃었다. 무리한 투자를 부추겼던 아빠 친구는 어디론가 도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빠도 사라졌다....


"그때는 도저히 너를 볼 면목이 없었다. 엄마가 태진이 네게 남긴 목숨값이었는데.... 내가 그 돈까지 그렇게 날렸다고 생각하니까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처음엔 그렇게 숨어버리고 싶었다. 가다가다 보니 어느 날인가 부산까지 와 있더구나. 처음 한 달은 정말 폐인처럼 술만 마시고 살았지.

너한테 몇 번이나 전화하려고 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어...."


태진은 그저 묵묵히 아빠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해 잠들었는데 꿈에 네 엄마가 나왔어. 나를 보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더구나. 한참을 눈물만 흘리던 네 엄마가 그랬어. 우리 태진이 불쌍해서 어떡하냐고... 당신이 이러고 있으면 우리

태진인 어떡하냐고... 잠에서 깨고 나서 정신이 번쩍 들었지. 그날부터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어.

막노동부터 뱃일까지 몸을 혹사시켜가면서 일을 했지.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괜히 아들 목소리 들으면 마음이 약해져서 그만두고 올라가고 싶어질까 봐. 그래서 독하게 마음먹고 1년만, 딱 1년만 뼈가 으스러지도록 돈만 모아서 돌아가자 생각했어. 너희 고모한테 엄마와 태진이 너를 부탁하고 왔기에 그래도 함께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다. 네 고모가 너와 엄마를 그렇게 내보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 아빠 잘못이야. 아빠가 잘못 생각했어.

그래도 연락을 했었어야 했는데... 바보 같은 생각이었어.

태진아, 아빠가 정말 미안하다. 아빠가 용서가 안 되겠지만... 부족한 아빠지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는 없겠니?..."


아빠의 변명이자, 고백이자, 1년 간의 스토리는 이렇게 끝이 났다. 태진은 아빠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아마도 그러기로 한 순간부터 아빠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모른다.

엄마가 아빠도 지켜주었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따뜻해졌다.

태진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 늦었어요. 이제 그만 집에 가요. 할머니 걱정해요."


이전 12화 12화 슬픔의 무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