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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Aug 17. 2024

14화 한 걸음씩 꿈을 향해

24시 무인라면가게

방학이지만 소율은 여전히 아침 6시에 눈이 떠졌다. 요즘 들어 습관이란 게 참 무섭구나 하고 느낀다. 휴대폰 알람을 해놓지 않았는데 6시에 눈이 떠진다는 것, 그리고 소율이 늘 하던 대로 창을 열고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아 방학이지 하고 깨닫고 나선 다시 침대에 눕는다.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엄마와 아빠가 출근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원래는 기숙학원에 있어야 할 소율이지만 다수의 학원생들이 식중독에 걸려 언론을 한바탕 떠들썩하게 하는 바람에 소율이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소율을 데리고 왔다.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맞았을 것이다.

소율은 그렇게 생각한다. 아마도 엄마는 언론에서 그렇게 떠들어대지 않았다면 다른 기숙학원으로라도 소율을 옮겼겠지.

언론에서 기숙학원들의 문제점에 대해 파헤치는 통에 잠잠해질 때까지는 학원으로 등하원을 결정한 것일 테니까.

학원 아침수업이 9시부터라 7시쯤 일어나서 준비해도 되지만 소율은 매일 6시 반쯤 거실로 나가 출근하는 엄마를 배웅했다.

배웅한 다기보단 의심을 잠재우기 위한 일종의 착한 딸 퍼포먼스랄까.


요즘 엄마는 간단한 샐러드와 커피 한 잔만을 마신 후 아빠의 아침식사를 차려놓고 먼저 나가신다. 늘 함께 출근하던 모습에서 이런 변화가 찾아온 건 엄마가 회사를 옮겼기 때문이다.

엄마는 한 달 전 규모가 큰 법무법인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TV에도 많이 나오고 승률도 매우 높은 유명한 회사라고 했다.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엄마는 끊임없이 올라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올라가는 길을 내가 함께 하길 바랐다. 너도 올라가야 한다고,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고....

현관 앞에서 구두를 신는 엄마를 보며 소율은 속으로 외쳤다.


'엄마! 전 다른 길을 갈 거예요. 저와 함께 가려고    

 하지 마세요.'


엄마가 전신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살폈다. 그리고 서류가방을 들고 소율을 본다.


"학원 수업 잘 따라가고 있지? 원장 선생님한테 엄마가 한 번씩 체크한다."


"네."


엄마는 시계를 보더니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엄마가 요즘 소율의 학원이나 공부에 대해 예전처럼 꼼꼼하게 챙기지 못한다는 것을 소율은 안다. 큰 회사로 옮긴 뒤로 엄마는 실적을 내기 위해, 동료들보다 더 빠르게 올라가기 위해 바빠졌다. 그래서 소율을 전처럼 타이트하게 감시하지는 못했다.

소율도 한동안은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착실한 모범생 딸 노릇을 유지해 왔다.

엄마가 바빠지고 소율에 대한 의심을 거둘 때쯤 소율이 움직였기 때문에 당분간은 별 일이 없을 것이다.

아빠까지 출근하고 난 뒤 소율도 학원 갈 준비를 하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 오후 5시쯤 학원 수업이 모두 끝나고 소율이만의 비밀스러운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서 하루 24시간이 빠듯했다.

소율은 요즘처럼 하루를 바쁘고 알차게 살고 있는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버스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소율은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예전 단골 떡볶이집은 그대로였다. 태진엄마의 여고시절부터 단골 떡볶이집이었다고 하니 30년은 족히 된 가게였다. 한쪽 벽면에는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반 친구들은 떡볶이 뷔페를 많이 가지만 태진은 이런 곳이 더 정겹고 좋았다.

맛도 훨씬 더 좋았다.

이사를 간 후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었는데 그대로인 가게 모습과 여전히 무뚝뚝한 이모님까지 모든 것이 변함이 없어서 마음이 놓였다.  토요일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도 없었다.

아빠가 온 뒤로 태진은 주말 식당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아빠는 빌딩 경비일과 야간에는 대리기사 까지 투잡을 뛰고 있었고 태진이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학업에 전념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나마 새벽 우유배달 아르바이트는 운동삼아 하고 싶다고 우겨서 그것만 하고 있다.

주말 일이 없어진 덕분에 이런 시간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고 있냐?"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신태호가 옆에 서 있었다. 괜히 뭔가를 들킨 것 같아서 멋쩍었지만 애써 아닌 척했다.


"영영 연락 안 할 줄 알았는데."


자리에 앉으면서 태호가 무심한 듯한 말을 내뱉었다. 비꼬는 투는 전혀 아니었고 연락해 줘서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저렇게 하는 거다.


"너한테 꾼 돈 갚으려고. 안 갚으면 돈 떼먹고 도망갔다고 평생 욕할 거 아냐."


태호도 안다. 태진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태진의 마음을.


"내가 알아서 시켰다. 우리가 항상 먹던 걸로."


태호도 태진이 하던 대로 자리에 앉자마자 가게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태호도 오랜만에 오는 눈치였다. 엄마의 학창 시절 단골 떡볶이

집을 태진과 태호는 초등학교 때부터 같이 다녔다.

떡볶이를 좋아하는 것부터 좋아하는 반찬, 좋아하는 취미까지 모든 것들이 둘은 같았다. 어릴 때부터 함께 해왔기 때문일까...


"너도 오랜만에 온 거냐?"


"응."


"너희 집에선 가깝잖아. 왜 오랜만에 와?"


"혼자 뭐 하러 오냐 여길."


"같이 올 친구도 없냐 넌."


"너보다 친구는 내가 더 많거든."


괜히 서로를 툭툭 건드리며 영양가 없는 말들만 주고받고 있는데 드디어 떡볶이가 나왔다.

즉석 떡볶이가 냄비에서 금방 지글지글 었다. 떡볶이를 반쯤 먹어치우는 동안 태진과 태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맛있어서 정말 순식간에 먹어치운 것 같았다. 마무리로 볶음밥 두 개를 시켜놓고는 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빠가 왔어."


태호는 조금 놀라는 눈빛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다. 아빠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말고. 그래도 오셨으니까 잘 된 거라고 생각해."


"그러려고. 오늘 너 보자고 한건 도움을 좀 청하려고 부른 거야."


태진의 입에서 도움을 청한다는 말을 하다니. 태호는 태진아빠가 왔다는 말보다 더 놀라웠다.

태진이 자존심에 절대 그런 말을 할 녀석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태호는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나... 아이스하키를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 오래 쉬었고 늦은 거 알아. 그래서 말인데....

 체대입시를 해보고 싶어. 비록 하키는 못해도 체대 가서 나중에 아이들 가르치는 일도 좋을 것 같고 공부 좀 더 해서 지도자나 이런 쪽으로 가는 건 어떨까 싶기도 하고....

근데 내가 이런 쪽으로 의논할 사람이 너 밖에

더 있냐."


태진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친구들 덕분이었다.

하루하루를 살아내기에 힘겨운 그런 삶으로 추락한 것만 같았던 태진의 인생에,

그 어떤 희망도 꿈도 꿀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태진의 인생에 준기와 서우, 소율은 힘이 되었다.

모두들 힘들지만 자신의 꿈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태진도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미워했던 아빠였지만 아빠가 돌아왔고 용서하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아빠가 돈을 테니까 너는 너의 길을 가라고 한 것도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소율이 해준 말도 도움이 되었다.


"꼭 네가 몸으로 뛰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운동과 관계된 일들을 찾아봐.

 네가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이 있지 않을까?"


아빠 때문에 체고에서 일반고로 전학을 오게 되고 운동을 못하게 된 것에 대해 원망만 하고 있을 때 소율이 내게 했던 말이었다.

그때는 잘 들리지 않았던 이 말을 아빠가 오고 나서 다시 한번 곱씹어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나서 가장 먼저 태호가 생각이 났다. 태호라면 자신의 고민을 이해하고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얼~~~ 엄태진~~ 철들었네. 그런 생각을 다 했다니."


"나 진지하다 정말. 너무 늦지 않은 걸까 체대입시도. "


"잘 생각했다. 당연히 늦지 않았지.

다른 애들이면 몰라도 넌 운동했던 놈이잖아.

지금 시작해도 충분해. 근데 체대입시도 전문학원 도움을 받는 게 좋다더라.

내가 학교 가서 선배들이랑 코치님한테 물어보고 알려줄게."


"그래. 고맙다. 오늘 떡볶이는 내가 쏘는 거다. "


"당연한 거 아냐?"


둘은 오랜만에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냄비에

붙은 눌은밥까지 박박 긁어먹으면서 웃고 또 웃었다. 태진은 자신도 뭔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에 그저 행복해서 웃음이 났다.




태호와 헤어진 후 태진은 쇼핑몰이 즐비한 번화가 거리로 들어섰다.

쇼핑을 하는 것 자체도 오랜만이었지만 이런 번화가를 혼자 온 것은 거의 처음인 것 같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태진은 엄마와 자주 쇼핑을 하러 나왔다.

대부분은 주로 친구들끼리 쇼핑을 하지만 태진은 항상 엄마와 함께 했다.

태진과 데이트하는 것을 행복해하는 엄마를 보며 차마 친구들과 갈 수가 없었다.

학교 갈 때는 교복을 입으니까 상관없지만 방학인 요즘은 몇 벌 안 되는 사복을 빨아가며 돌려 입고 있었다.

그런 태진을 본 아빠가 옷을 사 입고 오라고 용돈을 쥐어 주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해도 아빠가 그동안 못 사준 게 미안해서 그렇다고 오늘은 꼭 새 옷을 사가지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어쩔 수 없이 나온 거라고 생각했지만 옷구경을 하니 기분이 좋긴 했다. 마네킹에 입혀져 있는 옷들을 눈으로만 열심히 훑고 있다가 마음에 드는 모자를 발견한 태진이 손을 뻗었다.

모자를 잡으려는 순간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동시에 팔을 뻗었다.  함께 같은 모자를 잡게 된 얼떨떨한 상황에 태진이 먼저 손을 놓았다.


"아, 죄송합니다. 먼저 하세요."


"아니에요. 그쪽이 먼저 잡았, 어? 엄태진!!"


누구? 화려한 화장에 마치 댄스팀의 댄서와도 같은 힙한 옷차림의 여자가 태진의 이름을 부르다니. 대체 누구지?


"저를 아세요?"


한참을 쳐다보던 태진의 동공이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입까지 떡 벌어졌다.


"유, 윤소율??"


화려하게 변신한소율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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