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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Sep 28. 2024

16화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24시 무인라면가게

이상하게 소율은 잔뜩 긴장이 되었다. 바짝바짝 마른 입술은 립밤을 꺼내 잔뜩 발라 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혼자 앉아있는 사람은 소율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녁시간 패밀리 레스토랑은 주로 가족단위로 오거나 연인들이 오는 곳이니까.

소율도 어렸을 때 엄마, 아빠와 종종 오던 곳이었다. 엄마, 아빠와 함께 저녁 외식을 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물론 원치 않는 가족모임은 매년 있었지만 그걸 함께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율은 지금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 이곳을 약속장소로 잡은 이유는 어릴 때 추억 때문만은 아니다.  딱히 아빠와 갈 만한 곳이 생각나지도 않았거니와 너무 조용한 곳은 아빠와 단둘이 어색할 것 같아서였다.

아빠와 딸 사이가 애틋한 친구들을 보면 소율은 부럽기보단 이상했다.

소율은 아빠에 대한 애틋하고 좋은 기억이 없다. 아니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해야 맞나? 그렇다고 해서 아빠에 대한 기억이 나쁘지도 않다. 그만큼 아빠와 소율은 대면대면한 부녀 사이였다.

치과의사인 아빠는 병원일로 늘 바빴고 쉬는 날은 잠을 자거나 골프약속이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소율이 여섯 살 때였나. 어렴풋이 그때 이곳 패밀리 레스토랑에 아빠와 둘이 왔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재판 준비로 야근하던 엄마를 빼고 아빠와 둘만 왔던 것 같은데  다른 건 지워

졌어도 이상하게 그 기억만 났다.


"많이 기다렸니?"


소율이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아빠가 왔다.


"아뇨. 10분 밖에 안 됐어요."


아빠는 서둘러 자리에 앉으며 메뉴판부터 살폈다.


"주문부터 할까? 먹고 싶은 걸로 시켜봐."


소율은 적당히 인기 있는 메뉴 두 가지를 주문하고 음료가 먼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이 어색한 시간을 견뎠다. 곧이어 주문한 자몽에이드 두 잔이 나왔다.


"무슨 일로 우리 딸이 아빠와 단 둘이 독대를 요청했을까?"


에이드를 마시려고 빨대를 들던 소율의 눈이 깜짝 놀란 눈이 되었다.


'우리 딸...이라고?'


소율의 아빠는 단 한번 우리 딸~ 하고 다정하게 부른 적이 없었다. 아니 있었는데 소율이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어쨌거나 갑작스러운 아빠의 우리 딸 이란 멘트에 소율은 적잖이 놀랐다.

하지만 더 놀란 것은 그다음에 이어진 아빠의 말 때문이었다.


"요즘 특수분장학원 다니는 건 어때? 다닐만하니?"


빨대로 에이드를 쪽쪽 빨던 소율이 순간 켁하고 음료수를 뿜을 뻔했다. 아빠가 어떻게 알지?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소율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오늘 아빠를 보자고 먼저 요청한 것도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빠부터 먼저 내 편으로 설득해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엄마는 넘기 힘든 산이라면 아빠는.....

그래도 아빠는.... 자신에게 무관심하긴 하지만 엄마보다는 도전해 볼만한 산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내가 엄마, 아빠 몰래 특수분장학원에 다닌단 사실을 알고 있다고?


"아빠 어, 어떻게 아셨어요?"


"외할머니와 통화했다."


아... 외할머니...

할머니가 아빠한테 말할 거라곤 1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외할머니와 아빠가 통화하는 사이라는 것도 생각하기 힘들었다. 딸인 엄마도 자신의 엄마에게 전화를 잘 안 하는데....


"많이 놀랐나 보구나? 외할머니랑 아빠랑 자주 통화해. 엄마보다도 더. 물론 너는 몰랐겠지만. "


소율은 오늘따라 아빠가 많이 낯설었다. 소율이 알던 아빠가 아닌 것 같았다.


"외할머니가 네 걱정 많이 하신다. 그리고 네가 하고 싶어 하는 꿈도 지지하시고. 그래서 아빠인 나라도 너를 지지해 주고 밀어줬으면 좋겠다고 하셨어. 학원비 외할머니 통해서 아빠가 낸 거야."


"근데 왜 갑자기 아빠가.... "


"왜라니? 네가 아빠 딸인데 아빠가 내는 게 당연하지. 그동안 아빠가 너한테 너무 무심해서 아빠에 대한 네 생각이 어떤지는 알겠는데 아빠가 너한테 전혀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아빠도 서툴러서 그랬어. 아빠도 우리 엄마, 아빠한테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없어서 딸인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랐다."


소율의 여섯 살 때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

소율의 아빠는 누구보다 첫 딸인 소율을 사랑했고 아꼈다. 엄마의 소율에 대한 과한 집착과 자신의 성공에 대한 욕망이 심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빠는 가난하지만 자신감 넘치고 자존심 강한 엄마의 모습에 반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지만 엄마는 결혼하고 점점 변해갔다고 했다. 어찌 보면 자신을 반대했던 시댁 어른들과 친척들에게 더 성공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줘야 했고 자신의 딸도 이 집안에 맞는 수준으로 보란 듯이 키우기 위해서였겠지.

아빠는 그런 엄마의 모습에 점점 지쳐갔고 싸우지 않는 방법으로 무관심을 택했던 것이다.


"네 엄마 설득하기 쉬운 사람 아니란 건 알지?"


소율은 대답 대신 우울한 눈빛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아빠가 조건 하나만 내걸어도 되겠니? 이것만 지켜준다면 아빠는 무조건 너 지지한다."


소율의 우울했던 눈빛이  갑자기 초롱초롱 빛났다.  


"우선 대학은 꼭 가라. 가능하면 특수분장 쪽으론 우리나라보단 미국이 나을 테니까 미국에 있는 특수분장으로 유명한 학교에 합격하도록 해. 그래서 소율이 네가 하고자 하는 분야가 결코 쉽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네가  이만큼 노력했다는 걸 증명해. 대학이 꼭 중요한 건 아니지만 네 엄마를 설득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라고 생각해라. 대학을 미국으로 가면 엄마한테서 당분간 떨어져 지내는 거니까 서로에게 생각할 시간도 주어지고 나

 쁘지 않다고 본다. 합격만 하면 아빠가 무조건 엄마 설득해서 보내줄게. 학교 졸업하고 하고도 변변한 직장 하나 못 구하게 된다면 그땐 뒤늦게라도 엄마가 하라는 데로 하겠다고 해.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알겠지?"


"아빠....."


"아빠가 너한테 관심이 없었던 적은 없었어. 무관심하게 보였다면 그건 아빠가 미안해.

네 교육 문제로 더 이상 엄마와 싸우기 싫어서 엄마에게만 맡겨놓고 멀리 떨어져 보고만 있었던 건데, 엄마와 싸우면서 아니 엄마를 계속해서 설득해서라도 너를 덜 힘들게 했어야 했는데.... 아빠도 아빠가 처음인지라,

우리 아빠한테 보고 배운 것도 없는지라 많이 부족한 아빠였다. 너한테 상처가 되었다면 미안하구나. "


소율은 아빠의 진심을 그동안 몰랐다는 것에 더 미안했다. 아니 아빠의 진심 따위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도 엄마처럼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듣고 싶은 대로만 들었던 것일지도....

나 자신만의 힘듦이 너무 커서 소율도 엄마나, 아빠에 대해 진심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아빠 덕분에 용기가 생겼다.

엄마도 쉽진 않겠지만 설득할 수 있을 거란 희망도 생겼다.




띠링~

24시 무인라면가게 문이 열렸다. 서우와 준기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들어왔다. 소율과 태진은 이미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야야, 우리 오기도 전에 먼저 먹으려 했다 이거지? 배신이야, 배신!"


"헐. 라면 하나 가지고 배신까지는 좀. 너네 오는 소리에 딱 맞춰서 방금 올린 거야."


넷은 모처럼 24시 무인라면가게에 둘러앉았다. 학기 초부터 네 친구들의 아지트였던 이곳이

곧 없어진단다. 그럴 만도 한 게 중심가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이곳을 자주 찾는 사람들은

이 네 친구들 뿐이었으니까.


"그래도 곧 폐업한다고 하니까 서운하다. 이제 우리 어디서 모이지?"


"그러게. 사람 없어서 좋다고 했는데 주인한테는 좋은 게 아니었지."


"앞으로 우리 아지트는 준기네 분식집으로 하면 어떨까? "


"오~ 나쁘지 않은데. 서비스도 팍팍 주실 거고."


이곳에서 처음 만났을 때 친구들은 꿈을 향해 달리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체 방황하는 상태였다.

부딪히고 방황하고 도망치고....

지금은 힘들었던 시기를 열심히 헤쳐나가고 있는 중이다. 뿌옇게 낀 안개가 아주 조금씩 걷히고 있는 중이랄까.


"자, 이쯤에서 우리의 희소식을 하나 전할까?"


준기가 갑자기 목소리를 깔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서우와 내가 J엔터테인먼트 연습생으로 계약을 하게 되었단 말씀!!"


"뭐? 진짜? 어떻게 된 거야?"


소율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우를 보며 물었다. 쑥스러워하면서도 기분 좋은 표정의 서우가 말했다.


"나도 아직 얼떨떨해. 회사에서 내가 만든 곡이 맘에 들었나 봐. 4인조 아이돌 밴드를 기획 중인데 우리가 재능이 보인다면서 준기와 나, 그리고 두 명의 멤버를 더 영입하겠대. 아직은 연습생이라서 쑥스럽지만 준기랑

진짜 열심히 해서 꼭 데뷔하고 싶어. "


"와~ 서우 너. 갑자기 눈빛에서 욕망이 막 이글이글거리는데?"


농담이 어울리지 않는 태진의 농담에 모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난 태진이 너도 다시 운동과 관련된 공부를 하게 되어서 너무 좋고 소율이도... 아직 엄마 허락은 못 받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야. 너희들 덕분에 나도 이렇게 용기 내서 앞으로 갈 수 있게 되었잖아. 모두들 고맙다. 우리 정말 열심히 하자."


누구보다도 많이 변한 서우가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냈다. 서우는 진심으로 모두가 잘 되기를 바랐다.

24시 무인라면가게에서의 마지막 라면 만찬을 즐기고 있는 네 명의 친구들 앞에 평탄한 길만 펼쳐지진 않겠지. 앞으로도 평탄한 길과 울퉁불퉁한 길을 교대로 오가겠지만 친구들과 함께라면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길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든든하다.

24시 무인라면가게 간판이 깜빡거린다.

곧 문을 닫을 이곳에서 시작된 이들의 소중한 우정이 앞으로도 영원하기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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