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해체하기
어두운 숲이었어. 아무도 없었어. 뾰죽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어. 분명 일행과 함께였던 것 같은데, 혼자 길을 잃었나 봐. 무서웠어. 추웠어. 얼어붙은 계곡을 하나 건너서, 헛간 같은 밝은 건물을 발견했어.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간 순간 봤어. 수백 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 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걸.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어. 끝없이 고깃덩어리들을 헤치고 나아갔지만 반대쪽 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 입고 잇던 흰옷이 온통 피에 젖었어.
어떻게 거길 빠져나왔는지 몰라. 계곡을 거슬러 달리고 또 달렸어. 갑자기 숲이 환해지고, 봄날의 나무들이 초록빛으로 우거졌어. 어린아이들이 우글거리고, 맛있는 냄새가 났어. 수많은 가족들이 소풍 중이었어 그 광경은, 말할 수 없이 찬란했어. 시냇물이 소리 내서 흐르고, 그 곁으로 돗자리를 깔고 앉은 사람들, 김밥을 먹는 사람들. 한편에선 고기를 굽고, 노랫소리, 즐거운 웃음소리가 쟁쟁했어.
한강, 채식주의자 중에서
오늘은 드디어 한강 편입니다. 자그마치 노벨 문학상 수상작, 채식주의자! 그중에서도 꿈에 대해서 영혜가 누군가에게 말하는 혹은 독백을 발췌해 봤어요. 하나씩 일단 살펴보죠.
1. 화자의 개입
영혜, 다른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로, 화자의 개입이 보이네요. 개인적으로는 화자가 개입을 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화자의 개입은 독자의 상상력을 줄여버린다고 생각해서요. 많은 소설이 그렇습니다만 특히 우리나라 소설은 더더욱 그런 걸 "문학적 사유"라고 하나 봐요.
2. "뾰족한 잎", "팔에 상처", "무서웠어", "추웠어", "시뻘건 고깃 덩어리들", "붉은 피가 떨어져-"
감각적인 또 감정적인 표현이 독자에게 그대로 느껴지도록 전달하네요. 육체적인 고통, 공포의 시각화가 두드러집니다.
3. 격렬한 대비
문단 두 개가 매우 상이한 대조를 이룹니다. 첫 번째 문단은 고깃덩어리, 어두운 숲, 피 등 공포스러운 표현이 가득하고 두 번째 문단은 평화로운 소풍의 모습이 드러나네요.
1. 화자의 개입 제거
그러면 제가 나름대로 다시 써보도록 하죠. 일단 화자의 개입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시청각으로 묘사를 합니다.
캄캄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발이 땅에 닿았다. 부스럭. 나뭇잎이 부서졌다.
어떤가요? 시청각적인가요? 맘에 듭니다.
2. 클로즈업/숏컷
클로즈업을 가도록 하죠. 팔에서 나뭇가지 나뭇가지 위로 갔다가 피부를 다시 조망하면 좋을 것 같아요. 카메라 시선이 따라가듯요.
팔은 나뭇가지에 찔렸다. 나뭇가지 위로 시뻘건 물이 조금씩 번졌고 피부가 너덜너덜해졌다.
그리고는 숏컷으로 가면 좋을 것 같아요. 얼굴, 둘러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 그다음에 발. 마지막 숨.
얼굴을 팔로 닦았다. 물기가 느껴졌지만 보이진 않았다. 발끝에 한기가 올랐다. 짧은 숨을 들이켰다.
3. 롱샷
카메라가 영혜를 따라서 이동합니다. 롱샷으로요.
얼어붙은 계곡 앞에 다다랐다. 내달렸다. 냉기가 오르는 듯했으나 감각이 사라졌다. 헛간 같은 건물이, 빛이 보였다.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갔다.
4. 이제 다시 클로즈업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주요 묘사 포인트니까 이걸 클로즈업하면서 영혜가 고깃덩어리들을 밀치고 나가는 장면이면 좋겠어요.
커다란 시뻘건 고깃 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었다. 어떤 덩어리에선 붉은 피가 떨어져 내렸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팔을 들어 고깃덩어리들을 밀쳐냈다.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흰 옷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오 괜찮은데요?
유사한 방식으로 다음 문단도 작업해 봅니다. 화자의 개입 제거, 롱샷, 음향효과, 클로즈업 정도면 좋겠네요. 한 가지 더 숏컷으로 장면을 이동시킵니다. (계곡, 숲, 나무들, 빛)
그래서 최종적으로 탄생했습니다!
캄캄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발이 땅에 닿았다. 부스럭. 나뭇잎이 부서졌다. 팔은 나뭇가지에 찔렸다. 나뭇가지 위로 시뻘건 물이 조금씩 번졌고 피부가 너덜너덜해졌다. 영혜는 멈췄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굴을 팔로 닦았다. 물기가 느껴졌지만 보이진 않았다. 발끝에 한기가 올랐다. 짧은 숨을 들이켰다. 얼어붙은 계곡 앞에 다다랐다. 내달렸다. 냉기가 오르는 듯했으나 감각이 사라졌다. 헛간 같은 건물이, 빛이 보였다.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갔다. 커다란 시뻘건 고깃 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었다. 어떤 덩어리에선 붉은 피가 떨어져 내렸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팔을 들어 고깃덩어리들을 밀쳐냈다.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흰 옷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계곡, 숲, 나무들. 빛.
얼굴에 온기가 스며들었다. 나뭇가지 끝 뾰죽한 잎들에 푸르름이 번졌다. 어린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코를 킁킁거렸다. 부모들도 보였다. 돗자리를 깔고 김밥, 다양한 음식과 과일이 그 위를 장식했다. 영혜는 침을 삼켰다. 시냇물 소리가 들렸다. 불판 위에서 고기 타는 소리도 들렸다. 노랫소리, 아이들은 꺄르륵거렸다.
개인적으로는 제 버전이 더 재밌네요. 어떠신가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