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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동미 Jun 21. 2020

트럼프 시대의 영화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 <디트로이트>, <블랙 클랜스 맨> 등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2019)


“오늘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교육 잘 받은 흑인으로 태어나겠다. 지금은 흑인들이 오히려 혜택을 받는 세상이니까.” 1989년 비즈니스맨 백인 남성 도널드 트럼프가 방송에 출연해 이처럼 말한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년 여성은 “사람들이 우리 아들을 죽이려고 해”라고 읊조린다. 그의 아들은 죄를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갇혀 고초를 겪고 있는데, 텔레비전 속 백인 남성은 논평이랍시고 사형제를 부활시켜서 벌을 줘야 한다며 이같이 주장한다.


영화 <셀마>를 연출한 에바 두버네이 감독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2019)에서 실제 트럼프의 발언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과거 실화를 바탕으로 한 극을 파고드는 실제 푸티지가 현재를 향해 던지는 시선이 날카롭다. 뉴욕 센트럴 파크 공원을 달리던 백인 여성이 성폭행과 폭행을 당해 중퇴에 빠졌는데, 같은 날 공원에서 어슬렁거리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네 명과 한명의 히스패닉계 미성년자가 일방적으로 피의자로 지목되었다. 이들 다섯명은 일명 ‘센트럴 파크 파이브’라고 불렸다. 텔레비전 방송을 보던 중년 여성은 센트럴 파크 파이브 중 한 명의 어머니로 “저렇게 편견 심한 사람은 tv에 못 나오게 해야 해”라고 덧붙인다. 그의 대사는 마치 “대선에 못 나오게 했어야 했다”는 후회의 말로 들리기까지 한다.


센트럴 파이브 사건이 발생한 지 30년이 흘러 드라마란 형태로 우리 앞에 도착했고, 그때의 비즈니스맨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트럼프가 과거에 했던 생각과 태도를 고쳐 잡았을 수도 있겠으나 그는 끝내 당시 행동을 사과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흑인 여성 감독 에바 두버네이가 각본과 연출을 맡고, 오프라 윈프리, 로버트 드니로 등이 제작한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는 지난해 5월 공개돼 한달 동안 전세계적으로 2300만명이 넘는 시청자를 모을 만큼 인기가 높았다. 온라인에서는 드라마 속에 삽입된 트럼프 대통령의 과거 발언이 도마 위에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러나 “센트럴 파크 파이브 사건을 두고 한 과격한 발언을 사과하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을 받고도 “지금 그 같은 질문을 하는 저의가 의심스럽다”고 받아쳤다. 끝내 사과는 없었다. 당시 미성년자였던 센트럴 파크 파이브는 경찰의 강압에 못 이겨 허위로 진술하는 바람에 10년 가까이 감옥 생활을 했고, 이후 그들이 받은 보상액은 뉴욕주 역사상 최대 손해배상금인 41,000,000달러(약 493억6400만원)에 달했는데도 말이다. 사건은 이미 역사에 의해 국가의 실책으로 기록돼 있다. 트럼프는 1989년 당시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사형제 부활, 우리의 경찰을 돌려내라!(Bring back the death penalty. bring back our police!)”라는 내용의 전면 광고를 뉴욕 주요 신문에 실었던 인물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91년 로드니 킹 폭행 사건, 2012년 트레이 본 마틴 사살 사건, 2014년 마이클 브라운 총격 사건 등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시위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번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 역시 백인 경찰 데릭 쇼빈의 무릎에 목덜미가 짓눌리는 과잉진압으로 인해 사망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에게서 촉발되었다.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에서 트럼프의 발언을 바라보는 어머니가 아들의 죽음을 읽어내는 감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시대적 감각이 늦지 않게 영화로 이어졌던 과거 할리우드 영화들 앞에서 현재 진행 중인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시위도 언젠가 늦지 않게 스크린에 도착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다. 트럼프를 직접 인용한 에바 두버네이를 비롯해 할리우드는 트럼프 시대의 암울한 미국의 역사를 어떻게든 영화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은가. 루벤 플레셔의 <베놈>(2018)은 불법이주민에게 강경한 정책을 펴는 트럼프를 향해, 좋든 싫든 이주민이 미국 사회에 함께 붙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애니메이션 영화 <보스 베이비>(2017)는 백금발에 정장을 입고 비즈니스를 운운하는 신생아 캐릭터에다가 방송 프로그램에서 줄곧 트럼프를 흉내 냈던 배우 알렉 볼드윈의 목소리를 부여하면서, 기실 트럼프의 소영웅주의를 비판하다 못해 그를 정말 작은 신생아로 만들어버린 게 아닐까. 조던 필은 <어스>(2019)를 통해 지하에서 올라온 테서드 무리가 만든 인간 장벽을, 트럼프의 멕시코 장벽이 사실 그에게 표를 준 사람들이 세운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는 않나. 요컨대 조지 플로이드의 목덜미를 짓누르는 백인 경찰 데릭 쇼빈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이 성경을 들고 세인트존스 교회로 향했던 것처럼, 정치와 할리우드라는 이미지의 전쟁에서 둘은 영향을 이미 주고받고 있었다.  


정치적 올바름에서 후퇴한 미국 사회를 비추는 할리우드...은유 대신 직접 재현으로  


“앵커 베이비(Anchor Baby)라고 부르겠다.”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는 앵커 베이비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며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지킬 생각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더라도 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시민권을 자동적으로 가지게 되는 아이들은 ‘이민의 닻을 내린다’는 의미로 과거 앵커 베이비라고 불렀다. 이 단어에는 이민자 혐오 정서가 깔려 있어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용어로 분류되어 왔다. 하지만 트럼프는 대선 후보 시절, 이들에 대한 전면 전쟁을 선언하면서 이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했다.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당시 “그들은 아기일 뿐이다”라는 내용의 트윗으로 응수했던 것과는 반대되는 행동이다.


그 사이 할리우드는 한동안 주춤했던 ‘백인 경찰 대 흑인 피해자’ 서사를 직접적으로 재현하기 시작했다. 버락 오바마 정권을 거치며 다양성과 정치적 올바름이 강조되었던 사회적 분위기가 깨졌고, 혐오 표현을 그대로 발화하는 트럼프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은 <디트로이트>(2018)를 통해 군인, 주 방위군, 주 경찰, 시 경찰이 대거 투입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진압했던 1967년 디트로이트 폭동 사건을 핸드핼드 카메라로 현실감 있게 재현했다. 당시 무고한 흑인 세 명이 백인 경찰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일명 알제 모텔 사건이다. 영화 <디트로이트>는 이 알제 모텔의 시간을 길고 집요하게 재현한다. 그들이 겪는 폭력을 동반한 심문과 공포스러운 상황을 길고 집요하게 재현한다. 비글로우의 백인 경찰과 흑인 시위대의 직접적인 대결의 서사는 레이건 정부 시절 만들어진 스파이크 리의 <똑바로 살아라>와 조지 W. 부시 시절 만들어진 폴 해기스의 <크래쉬>를 보는 것과 같은 기시감을 안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웨스턴 석유 시추 현장을 집요하게 담으면서, 조지 W. 부시 정부가 벌인 이라크 전쟁이 사실상 석유를 위한 탐욕이었다는 의견을 메타포로 제시한 것과 달리, 트럼프 시대의 할리우드는 직접적인 비판을 가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트로이트>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5인조 가수 ‘드라마틱스’가 공연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통행금지 시간에 돌아다닌다는 이유로 경찰로부터 위협을 받았던 것처럼, 조지 플로이드 시위가 격화되고 방화와 약탈이 이어지자 주요 도시 40곳에서는 통금 제도가 시행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급기야 1967년 디트로이트의 풍경처럼 21개 주에 주 방위군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하려고 했다. 할리우드가 픽션을 통해서 얼마간 미국 사회를 향해 논평을 해왔지만, 이번처럼 거장 반열에 오른 감독들이 미국 사회의 모순을 직접적으로 영화화하는 현상은 정치적 올바름을 벗어던진 트럼프 시대의 징후로 보인다. 실제로 <더 포스트>에서 언론의 자유를 이야기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SF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을 제작하던 중 급하게 시대적인 필요에 의해서 <더 포스트>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언론의 정당한 보도를 가짜뉴스라고 매도하고 있는 현실의 절박한 필요성이 있었다”고 말했다. 


조지 H. W. 부시 정부 시절 <말콤 X>(1992)를 만들어 블랙 시네마의 기치를 드높였던 스파이크 리 감독 역시 트럼프 시대에 접어들어 <블랙 클랜스 맨>(2018)으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과 아카데미 각색상을 받으면서 화려하게 귀환했다. <블랙 클랜스 맨>은 백인 우월주의 단체인 KKK단에 잠입한 흑인 경찰 론 스톨워스에 대한 이야기로, <겟 아웃>, <어스>의 감독 조던 필과 프로듀서 제이슨 블룸이 시나리오를 건네면서 제작에 돌입한 영화로 알려져있다. 스파이크 리 감독은 백인 경찰과 흑인 시위대의 대결 서사를 비틀면서도 트럼프 정권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의 칼날을 세웠다. 영화는 전 KKK단 회장인 데이비드 듀크의 대사 “미국의 위대함을 다시 달성하기 위해서(for America achieve its greatness again)”를 여러 번 반복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인종 혐오 발언을 하는 인물들에게 반대 의견을 표하지 않는 백인들의 침묵을 꼬집는다. 스파이크 리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국경에 장벽을 쌓으면서 "멕시코인은 강간범"이라고 말하는 상황은 정말 말도 안 된다.”라면서 “이 영화는 오늘날 트럼프가 있는 백악관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논평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이 발생한 지 2주가 지나면서 장례식이 거행되고 분노는 평화시위의 형태로 바뀌었다. <디트로이트>에서처럼 군을 동원하는 폭동진압법은 발동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분간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적인 비판을 하는 할리우드 영화들은 계속 스크린을 찾을 성 싶다. 



덧1. 지난해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를 보면서 정말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기교를 부리지 않는 담담한 화면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눈물이 계속 쏟아졌습니다. 드라마 중반에 트럼프 대통령이 비즈니스맨 시절 당시 사건을 두고 아무렇게나 이야기하는 뉴스 푸티지를 볼 때는 참담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이미지가 잊혀지지 않더라구요.


덧2. 시절이 시절인지라 블랙시네마 영화를 몰아서 봤는데 훌륭한 작품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언급한 작품 <어스>, <블랙 클랜스 맨>은 정말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덧3. <블랙 클랜스 맨>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배우 존 데이비드 워싱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존 데이비드 워싱턴은 유명 아프리카계 배우인 덴젤 워싱턴의 아들입니다. 곧 개봉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테넷>의 주인공이기도 한데, <블랙 클랜스 맨>에서 보여준 호쾌한 에너지와는 어떻게 다른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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