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음악을 발견하게 된 건 심야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색,계>(2007)의 사운드트랙이었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음악을 먼저 들었는데 왠지 모르게 뭉클한 기분을 느꼈다. 중국 영화에 삽입된 프랑스 음악 감독의 음악. 음악이 먼저 내게 도착했고, 그 뒤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상상했던 것과 비슷한 감정선이었다. 데스플라의 음악은 부드러우면서도 귀에 남는 멜로디가 특징적이다. 이젠 멜로디가 아닌 리듬으로만으로 남은 영화음악들이 많은데, 데스플라의 부드러운 멜로디는 듣고 있으면 아련한 기분까지 든다. 그렇게 한번 인지한 뒤로는 의식하지 않아도 그의 음악을 여러 영화에서 들을 수 있었다. 지난 20년 동안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감독이 참여한 작품은 모두 129편에 달한다.
영화 <셰이프 오브 뮤직: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이하 <셰이프 오브 뮤직>)는 데스플라를 주인공으로 2014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다. 2007년부터 거장 음악감독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시리즈로 만들고 있는 프랑스 영화 감독 파스칼 쾨노는 2014년 <셰이프 오브 뮤직>을 완성하면서 데스플라를 새로운 거장 리스트에 올렸다. 촬영 당시 데스플라는 조지 클루니 감독의 <모뉴먼츠 맨>의 음악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가 할리우드 감독들과 어떻게 소통하는지, 어떻게 연주자들과 호흡하는지 카메라에 담겼다. 특히나 그와 작업한 감독들의 음성으로 데스플라의 음악이 어떻게 영화와 호흡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게 이 작품의 백미다. 영화 <르누아르>(2012)의 감독 질 부르도스가 데스플라의 음악은 극의 뉘앙스 뿐만 아니라 이미지의 빈곳을 채우며 서사를 견인한다는 설명을 하는데, 다큐의 감독인 파스칼 쾨노는 데스플라의 음악을 제거한 채 <르누아르> 속 한 장면을 보여준 뒤, 음악을 덧입힌 뒤 같은 장면을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쉽게 데스플라 음악의 힘을 설명한다.
다큐가 완성된 2014년은 데스플라가 왕성하게 활동한 해다. 다큐에 미처 다 담기지 못한 데스플라의 이야기가 더욱 재밌다. 2014년에 그는 <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 <모뉴먼츠 맨> <이미테이션 게임>을 완성시켰다. 그러면서도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베니스국제영화제가 영화감독이 아닌 음악감독에게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을 맡긴 건 데스플라가 처음이다. 그리곤 <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과 <이미테이션 게임>으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 후보에 오른다. 그는 두 작품으로 음악상 후보에 두 번의 지명을 받았고, <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로 오스카 트로피를 수상했다. 데스플라는 이후 <셰이프 오브 워터>로 또 한번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하게 된다. 뒤늦게 개봉한 다큐의 제목이 <셰이프 오브 뮤직>이라고 지어진 건 개봉을 준비한 한국의 마케팅 홍보팀에서 그의 대표작에서 이름을 본딴 것으로 보인다.
<셰이프 오브 뮤직>은 본래 방송용으로 제작된 다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 데스플라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와 영화인들의 인터뷰들로 구성돼있으며 실험적인 시도는 크지 않다. 하지만 이 다큐에는 내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등장해 데스플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로만 폴란스키의 존재였다. 실제로 데스플라는 아동성범죄자 로만 폴란스키 감독과 2010년 <유령작가>로 만나 최근작 <장교와 스파이>까지 총 6개의 작품을 함께 했다. 데스플라는 최근 폴란스키와의 세 번째 작품을 마친 다음 한 인터뷰에서 “로만 폴란스키는 음악을 정말 사랑하고, 음악감독에게 완전한 자유를 준다”라고 밝힐 정도로 그와의 협업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데스플라는 아동성범죄자 폴란스키에 대한 지지성명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다큐 속에서 데스플라는 폴란스키와의 작업에 대해서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의 성범죄 전력에 대해서는 질문되어지지도 않고, 따라서 그에 대한 답변도 알 길이 없다.
데스플라가 계속 성범죄자 폴란스키와 작업하는 건 폴란스키가 템프 뮤직(temporary music)이란 관행을 깨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영화사는 편집과정에서 임시적으로 이전에 발표된 영화음악들을 깔고 편집 작업을 한다. 이때의 사용되는 음악은 임시적으로 얹는 음악이라고 해서 템프 뮤직이라고 불린다. <가위손>의 음악감독 대니 엘프만은 할리우드 리포트가 마련한 음악감독 집단 인터뷰에서 "내 일은 영화감독이 들은 모든 템프 뮤직을 잊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템프 뮤직은 음악감독에게 골치 아픈 존재다. 데스플라에 따르면, 그가 아는 감독 중에 템프 뮤직을 사용하지 않는 감독은 폴란스키뿐이다. 데스플라의 음악을 좋아하는 누군가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알려져있다시피, 폴란스키의 가장 최근작인 <장교와 스파이>에서도 데스플라는 음악을 책임졌기 때문이다.
템프 뮤직은 실제로 할리우드의 내로라하는 음악 감독들도 겪는 문제다. 영화음악은 촬영, 편집, 추가 촬영 등 일련의 제작 과정에서 거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한다. 다 재단된 영화에다가 음악감독이 오롯이 한 영화를 위해서 완성시킨 음악을 깔면 영화의 편집이 뭔가 이상해진다. 편집점이 안 맞아서다. 앞서 언급한 인용한 인터뷰에서 엘프만은 이렇게 말한다. "제 직업은 영화 감독이 들은 모든 템프 뮤직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저는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템프 뮤직을 딱 한 번만 듣는다. 두번 다시 듣지 않는다. 만약 감독이 템프 뮤직에 중독된 상태라면 내 작업은 고행길이다. 종내에는 제 음악을 제 손으로 잘라내야 하기 때문이다. 정말 음악을 계속 계속 자른다. 감독을 설득하기 위해서다." 이 인터뷰에서 데스플라 또한 엘프만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디지털이 야기한 문제 같다. 내가 올드해서 그런 건 아니지만(웃음) 디지털 편집 과정에서 영화제작자들은 음악을 너무 쉽게 지워버린다. 음악을 이미지 싱크에 맞추려 들기 때문이디. 듣고 또 듣고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거의 1년 동안 그러는 거다. 그러다보면 음악이 편집한 영상에 딱 붙는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온다." 데스플라와 같은 음악감독도 영화를 위해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잘라내야 한다는 게 현실이라면 현실이다.
덧1. 언급한 인터뷰는 한번쯤 보시길 꼭 추천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P793Rw1cIQ&t) 특히 엘프만의 이야기에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해요. 제가 버나드 허먼 음악 감독의 시대에 활동했더라면……. 허먼이 피아노로 노트를 쓰고 최종 녹음에 들어갈 때까지 히치콕은 음악을 전혀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상황과는 완전 다르죠. 현대 영화와 영화음악은 너무 긴밀하게 연계돼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템프 뮤직이 문제될 게 없을 수도 있죠. 하지만 제 경우에는 템프 뮤직이 제 존재 자체를 지운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덧2. 우리는 가끔 몸집이 너무 커져서 횡설수설하는 영화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전작 영화의 성공이 다음 영화의 성공을 담보해주지 않기에, 언제나 완벽한 마스터피스를 만들어내는 거장도 없고, 언제나 졸작만을 만드는 감독도 없다는 단순한 사실에 대해서 깨닫게 하는 영화를 오랜만에 본 것 같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 이야기입니다. 지난 22일 토요일 <테넷> 프리미엄 상영이란 이름으로 개봉 전 주말에 이뤄진 특별 상영 회차에 영화를 예매하고 보았는데요. 영화를 다 보고 극장을 빠져나오면서, 열역학 제2법칙이나 엔트로피 등 물리학 법칙에 대한 생각보다 ‘쇼트란 무엇인가’, ‘리버스 쇼트란 무엇인가’란 영화적 질문에 대해 계속 생각했습니다. 고다르가 그의 영화 <아워뮤직>에서 이야기한 “결국 쇼트의 문제다”라는 잠언 말입니다. “<테넷>의 쇼트는 과연 적절했는가”란 질문이 계속 머릿속에 남습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폭발하는 비행기의 크기가 얼마나 거대했느냐, 비행기 값이 얼마인가가 아니라, 쇼트의 길이는 충분히 관객에게 의미를 전달할 만큼의 시간을 주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눈은 신호를 받아들이기만 하는 시각-기계가 아닙니다. 시간의 지속이 있어야만 보이는 것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테넷>의 모든 쇼트는 너무나 짧으며, 그 짧은 쇼트들이 모여서 이뤄지는 신과 시퀀스 역시 너무 급박합니다. 오페라 하우스 폭발 장면의 경우, 영화를 보는 것보다 스틸사진을 보는 편이 더욱 자세하게 볼 수 있다고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주인공은 제이슨 본보다 더 빨리 움직여서 다음 목적지에 바로 도착해버리고, 대화신은 언제나 걷고 탈 것을 이용 중인 채로 이뤄지고, 캐릭터들이 걷지 못하면 숫제 카메라까지 주위를 빙빙 돌며 도무지 관객을 가만히 두는 법이 없었습니다. 놀란 감독은 시간을 테마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고 알려져 있고 그 자신도 자신의 시그니처를 공공연하게 강조해왔지만, 정작 놀란 자신이 관객에게 가장 무신경하게 대한 게 시간의 문제이지 않나 싶습니다.
덧3. 한달 휴식을 마치고 다시 브런치 매거진을 시작합니다. 그 사이 코로나 19 바이러스 확산은 점점 더 심각해져서 전국적으러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실시되며, 수도권의 경우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를 목전에 두고 있네요. 사람 사이의 연결에 대해서 더욱 생각해보게 되는 요즘입니다. 영화를 통한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상영관에서 50명 이상이 함께 영화를 볼 수 없다고 해요. 국가에서 막지 않더라도 극장에 그같이 많은 사람이 모일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예전에 꽉 찬 극장에서 단지 영화를 위해서 전혀 알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집중해서 웃고 울며 영화를 봤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도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네요. 마지막으로 그처럼 즐겁게 본 영화가 무엇이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벌새>더라구요. 지난해 3월에 인디스페이스에서 <벌새> 특별 상영이 있었는데, 그때 좌석이 매진됐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도 너무 좋았어서 특별한 시간들로 기억에 남아있는데요. 그때와 같은 시간을 다시 경험할 날이 머지않아 도래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