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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보 Oct 14. 2020

예보 일기_02

거짓 호의 (好意)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이미 보고 들은 것을 타인에게 공유하지 않고 입이 근질거려도 참는 게 어렵기도 하지만, 더 어려운 것은 ‘척’하는 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느껴도 못 느낀 척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살면서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예전에는 이 말을 그저 새롭게 만나는 사람의 성향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정도로 이해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는 사귀고 보니 괜찮은 사람을 처음에 나쁘게 봤을 때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좋은 사람이면 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는 데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경우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말로 스스로 결론을 내린다. 그러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문제’는 모든 사람을 기본적으로 좋게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사람을 좋게 보는 사람’이 ‘사람 볼 줄 모르는 사람’이 된 걸까? 두 표현이 주는 느낌은 너무나도 다르다.


부모님을 따라 2살 때부터 십 년 넘게 해외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일이 있었다. 현지 유치원에 처음 등원한 날 언어가 통하지 않아 쉬 마렵다는 뜻으로 아래를 계속 가리키자 의자에 앉혀버린 선생님 때문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던 순간도 있었고, 눈치 빠른 짝꿍이 손을 잡고 달려준 덕분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실례하는 대참사를 면할 수 있었다. 타고나기를 말에 민감하게 태어났지만 어쩌면 더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던 그때를 돌아보면 나는 언어, 표정, 분위기의 미묘한 온도 변화를 빠르게 감지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성공적으로 외국인 티를 벗었다. 따로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 발음을 듣고 외국인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학교 숙제는 부모님이 더 이상 도와줄 수 없는 수준이 되어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이 시점에 한 ‘친구’가 등장했다. 제니(가칭)는 예쁘고 명랑한 동갑내기 이웃으로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집도 옆 동이라 서로 매일같이 서로의 집을 드나들었다. 완벽한 단짝 친구 제니에게도 한 가지 이상한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상황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태도였다.


우리 집에서 놀 때면 제니는 항상 다정하고 배려심 많은 언니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둘 만 있거나 제니 집에서 놀 때는 기분에 따라 갑자기 쌀쌀맞게 변하곤 했다. 이 미묘한 양면성을 설명하기에 초등학교 3학년은 너무 어렸고, 우리 집에서 노는 경우를 제외하고 나는 점점 제니를 피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제니와 다투었다 생각하시고 진정한 친구는 서로 배려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어느새 내 마음속에서 제니는 좋은 친구였고 나는 친구를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멀리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러던 어느 유난히 지루했던 하루, 부모님은 제니네 놀러 갈 것을 권했고 어린이의 지루함은 어떤 위화감보다도 강력했다. 오랜만에 찾은 제니는 선뜻 문을 열어주지 않고 문 틈 사이로 지금은 다른 친구가 와있다고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린이의 지루함은 강력하다고 언급했던가? 나는 같이 놀면 안 되냐고 물어봤고 문틈 너머로 나타난 다른 친구 두 명이 괜찮으니 같이 놀자고 했다. 순간 웃음기가 사라진 제니의 표정을 못 본 척해서는 안됐다.


놀이가 재밌어질 즈음 제니는 다 같이 주방에 가서 간식을 만들어 먹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다 같이 일어났다. 다른 두 친구를 먼저 보내고 제니가 앞을 막아섰다.


‘너는 여기 있어.’


‘왜?’


‘너는 우리랑 다르잖아. 너는 외국인이잖아.’


그 날 처음 마주한 제니의 감정 없는 얼굴은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아있다.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한 적의 (敌意). 친절한 제니, 따듯한 제니, 잘 웃는 제니 모두 제니의 모습이었겠지만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제니를 제대로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동안 훑듯이 지나간 불편한 느낌이 명확해졌다. 나는 말과 표정 그리고 분위기의 미묘한 온도 변화를 잘 알아차리는 민감한 사람이었고 민감함은 불편할 때 훌러덩 벗어던질 수 있는 티셔츠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그 뒤로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사람 보는 눈이 없어’ 발생한 사건이 쌓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조금 더 나 자신을, 나의 민감함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좋아서, 상대방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고 싶어서 눈을 감고 귀를 닫았던 어린 시절 내 모습이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라면 나보다는 조금 더 일찍 여리고 민감한 자신을 안아주었으면 좋겠다. 때때로 사람은 다양한 이유로 거짓 호의를 보이곤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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